팔도: “제도권 안팎의 지식 공유 회로를 간섭”하는 일종의 비평콜렉티브라고 소개한 저희 누협은 이전에 <아마추어, 돈, 여자>라는 제목으로 광주 독립서점 <이것은서점이아니다>에서 한 차례 발표한바 있습니다. 연선님께서 약간 제도랑 되게 거리가 멀 수도 있다는 말씀을 해 주셨는데 사실 굉장히 붙어있는 발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실 지난 방금 전 세션(<빈곤통치와 보조금 분배정치>, 조문영)이랑 되게 연결되는 얘기가 많다고, 저는 방금 이제 그걸 듣기 잘했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어쨌든 그때 광주에서 했던 거랑 조금 다르게 더 제도랑 관련된 얘기가 더 많이 나올 것 같고요. PPT를 넘기면서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될 것 같습니다. 우선 목차는 이렇고요.
팔도: 누협이 왜 자꾸 아마추어리즘 얘기를 하는지 문제 의식을 곧바로 공유하기 전에, 최근의 아마추어(리즘) 논의 흐름을 소개할까 하는데요. 오늘 발표는 기존 논의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자 비평이자 되먹임, 응답으로서 누협이 이 논의를 이어받아 확장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해주시면 될듯 합니다. 네, 여기 인용을 한번 읽어볼 건데요. “아마추어리즘이라는 게 개념이 아니라 전문성이나 탁월함에 반대함으로 부정당하고 있을 뿐”이라고 저희가 많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추어는 프로의 반대다, 전문적이지 않다 그래서 경멸의 의미로 많이 통용되는 말이고, 뭔가 아마추어를 벗어나서 어떤 자격, 인정, 제도의 어떤 보증(‘이 사람은 훌륭한 프로다. 이런 훌륭한 작업을 한 사람이다.’라는 보증)을 이렇게 얻어서 전문가가 되기를 바라지 아마추어리즘 자체를 진지하게 사고하지 않는 것 같다.” 아마추어리즘 관련된 논의를 특히 이여로 님께서 되게 많이 전개를 해 오셨는데, 최근 특히 예술/비평 쪽에서 대두되고 있는 아마추어(리즘) 논의에서는 “아마추어”라는 단어에 붙어있는 부정적 속성을 말하자면 긍정적 속성으로 가치 제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여로 님은 다음과 같이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진지하게 사고하자고 제안하고, 그것의 긍정성을 조명합니다.
팔도: 아마추어리즘을 진지하게 개념화해서 사고하고 또 옹호한다고 할 때 제기될 수 있는 질문 내지 의심 중 하나는 단연, ‘아무리 그래도 아마추어됨은 조악함, 질적으로 후짐, 못 만듦, 구림을 내포하지 않느냐?’ 이런 종류일 텐데요. 하지만 여로님의 경우, 반복적으로 “아마추어리즘은 질적 판단을 폐기하려는 개념이 아니”라고, 오히려 아마추어리즘이야말로 ‘잘 만든 것’의 가치판단 기준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자족적으로, 자기가 있는 그 자리에서 내가 처한 환경과 내가 가진 도구로 행위하면서, 자기의 언어로 주관성을 발견하고 체계화하는 아마추어는 훌륭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아마추어리즘이야말로 모든 지적 존재의 보편적 역능이라고도 말씀하고요. 이런 식으로 아마추어가 오히려 좋다. 좋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처한 상태다, 라고 강조할 때 물론 “아마추어는 프로에 미달한다. 미숙하고 조악하다”라는 편견, “아마추어"가 가진 부정적 함의에 반박할 수 있게 됩니다. 게다가 훌륭함을 보증해주고 “프로"라는 자격을 내려주는 제도에 덜 의존할 수 있게 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하지만 이런 논의가 오히려 “프로"와 “아마추어"라는 개념 자체의 역사성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판단의 기준을 구축해 주관성을 발견, 체계화하는 아마추어일 수 있다’라는 논의는 지나치게 아마추어의 ‘주체성'을 강조하게 되는 게 아닐까 하고요. 그래서 얼핏 보면 완전 다른 얘기 같지만, 아마추어의 자아상, 행위성, 주체성을 다시 생각해보게끔 만드는, 젠더 정체성 관련 논의를 하나 참조해보고자 공유드립니다.
팔도: 카지 아민의 <우리는 모두 논바이너리다: 간략히 살펴보는 우연의 역사>라는 제목의 글인데 거칠게나마 요지를 정리하고 소개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민은 트랜스젠더 개념의 “깔끔한 논리적 대립항"으로 만들어진 시스젠더 개념이, 이제 이 역사와 무관하게 개인 정체성으로만 정의되는 문제를 짚습니다. 여기에 더해 최근 논바이너리 개념의 반대항으로 바이너리라는 상태가 전제되기 시작했다고 쓰는데요. 반대항일 뿐인 이 바이너리 개념은 정말 실존하는 상태가 아니라 이상화된 대립항일 뿐인데, 문제는 이 이분법에 따라서 사람들이 점점 무조건 논바 또는 바이너리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여기게 된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 선택지 안에서 논바는 급진적이고 바이너리는 규범적이라고 생각될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논바 정체화를 하게 되고요. 젠더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독립적인 것으로 생각되면서 오늘날 ‘젠더 정체성'은 어떤 표현이나 체현 필요 없는 자아를 가리키게 되고 있다는 게 아민의 관점입니다.
아민은 논바이너리 담론에서 문제되는 이분법이란 결국 단순히 논바/바이너리 이분법 자체라기보다, ‘내가 선택하는 것', ‘자기 결정적’인 것, ‘자기학적이고 자주적인 개인'이라는 자아상(그니까 신자유주의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자아상) vs 사회에서 중층적으로 결정되는 ‘계보적' 자아상의 이분법이라고 씁니다. 여기 비추어볼 때 사실 아마추어랑 프로도 그냥 개인이 뚝 떨어진 게 아닌 거잖아요. 전 세션에서 얘기 나왔던 것처럼 제도에 의해서 구성되고, 계속해서 경쟁하면서 뭔가를 증명해야 되는 사람들 중에 돈이 많다거나 시간이 많다거나 어떤 조건이 되어서 포트폴리오를 만들 시간이 훨씬 많이 확보되는 그런 상황에 처해져 있는 개인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상황과 조건 안에 있는 개인이 있는 건데, 뭔가 ‘아마추어의 주체성’ 여기에 초점이 가버리면 이 상황에 대해서 얘기를 못하게 된다는 문제도 좀 있다고 생각이 됐습니다.
좀 정리를 하자면요. 통상적으로 아마추어가 프로의 반대로서만 부정적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씀드렸고 그렇기 때문에 근래 아마추어(리즘) 담론에서 오히려 아마추어의 주체성, 아마추어의 주관성, 아마추어 개인들의 연결, 이런 것들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는 흐름도 있다고 소개드렸고요. 여기서 아민의 관점을 참고해서 볼 때, 최근 아마추어의 긍정적인 주체성을 추출하는 방식으로 논해지는 방식이 방금 아민의 글에서 나왔던 표현인 ‘자기학적 자아상'이랑 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신자유주의적 영향력 아래 있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개인이라는 자아상을 전제하는 게 아닐까.
팔도: 아마추어됨을 개인의 선택과 선언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이고 계보학적인 차원에서 인식한다면, 아민이 쓴 용어를 빌려 달리 말해 아마추어가 계보적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면, 사실 오히려 ‘그럼 프로는 뭔데?’ 프로는 대체 언제부터 프로였으며 어떻게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이라는 규범/통념이 자리잡게 된 건데라고 질문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프로랑 아마추어 둘 다 사실은 굉장히 우연적이고 역사적이고, 어떤 식의 제도가 구성되면서 같이 만들어진 그런 게 아닌가라는 얘기를 하고자 합니다. 프로야말로 분과학문제도가 확립되고 자본주의와 함께 노동의 가치 또는 존재의 가치가 매겨지면서 이상적인, 신뢰할 만한 상품으로 나타났고 아마추어가 그 반대항으로 구성되었다면 아마추어 또한 제도 ‘이전의', 제도에 ‘앞서는' 존재가 아닐 겁니다. 제도에 가까이 감으로써 아마추어와 프로와 제도가 어떻게 얽혀있는 상황인 것인지를 함께 봤으면 좋겠습니다.
진송: 네 그러면 1번에서는 아마추어를 만드는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 건데요. 아마추어가 앞서 말씀드렸듯이 프로라는 범주의 여집합으로서 개념화가 된다고 이제 다른 동시대 담론에서도 이야기가 됐었고 저희도 아마추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그런 의미로 되고 있음에 동의하는 바인데요. 그럼 당연히 아마추어가 무엇인지 그리고 아마추어 제도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 프로가 무엇인지 그리고 프로라는 게 어떻게 제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아봐야할 것 같아요. 이 부분에서는 지식이라는 것을 아마추어와 프로라는 문화적인 범주를 생산해내는 중요한 요소로 보고 이 지식이 대학 제도 국가라는 제도에 어떻게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진송: 일단 프로라는 말이 지금 현재 동시대 사회에서 어떻게 범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찾아봤어요. 여러 가지 사전에 나온 다양한 정의들을 고루 찾아봤는데 첫 번째는 전문적인 훈련 혹은 교육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 관련된 것 이것이 프로패셔널이라고 되어 있고 그 아래에 보시면 돈을 벌기 위해서 어떠한 활동이나 일을 하는 것 취미와는 좀 다른 것이 프로라고 적혀 있어요. 그리고 세 번째 오른쪽 상단에는 높은 수준의 교육과 훈련을 필요로 하는 유형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프로페셔널이라는 명사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해 보시면 지금 문화적으로 합의되어 있는 프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대충 파악할 수 있어요. 즉 저는 여기서 세 가지 중요한 점을 꼽아보았는데 첫 번째는 프로가 교육받은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교육 그리고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은 사람이고요. 두 번째, 이런 훈련을 통해서 프로가 습득하게 되는 그리고 해야 하는 지식이란 전문적인 지식이에요. 전문적인 기술 및 지식을 습득한 사람이 프로고 세 번째는 직업인이라는 것입니다. 즉 이 프로가 하는 일을 통해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이게 일이 가진 내적인 속성보다 더 주요하게 프로페셔널이라는 것을 구분해내는 특징이 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일의 속성이 즐거운 것이냐 즐겁지 않은 것이냐를 떠나서 그걸 즐겁게 하든 말든 돈을 벌 수 있어야 프로로 간주된다는 것이죠.
진송: 그럼 다음으로 프로의 어원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할게요. 어원의 의미를 따라서, 그러한 전통적인 의미에 따라서 프로를 엄밀하게 정의해야 된다 혹은 지금도 그 의미대로 사용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드리려는 건 아니고요. 프로라는 모델을 역사적인 것으로서 살펴보기로 한 만큼 그 궤적을 살펴보고 싶은 거에 가까워요. 그림 자료로 나타나 있는 걸 간단하게 요약을 드리자면 프로페셔널의 프로페스에서 프로는 사람들 앞, 즉 공적인 장소를 뜻하고 페스는 고백한다는 뜻인데 이때 고백되는 것은 자신의 지식입니다. 프로페스가 사용되는 단어로는 또 프로페서, 교수라는 단어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교수는 프로 모델의 가장 원형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적인 장소에서 지식을 선언하는 사람으로서의 프로, 주로 교수를 일컫던 이 표현은 16세기가 되면서 전문 직업이라는 의미로 확장이 되었다고 해요. 프로의 시작점에는 지식, 정확히 말해 공적인 것으로서의 지식이 있었던 것인데요. 이 공적인 지식이라는 요소는 16세기뿐만 아니라 근대적인 것으로서의 프로 개념이 형성될 때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합니다. 이건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진송: 현재 동시대 사전들에서 프로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된다고 말씀드렸죠. 일반적인 지식과 ‘전문적인 지식’은 뭐가 다른 걸까요? 지식의 전문성에 인정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이라는 범주를 생산해내는 가장 중요한 제도는 대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전문적이라는 건 남들보다 뛰어난 것으로 공인되었다는 의미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기가 특출난 지식과 경험을 가진 한 분야, 오직 그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가졌다는 거예요. 이매뉴얼 월러스틴이라는 학자가 <지식의 불확실성>이라는 책에서 근대대학제도의 형성과 분과학문화를 다룬 바가 있는데요. 분과학문화가 추동하는 것이 바로 지식의 전문화라고도 할 수 있겠죠. 다들 아시겠지만 분과학문화는 학문을 세세하게 구획해서 학생들이 전문가로서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만드는 과정입니다.
아래 인용된 피터 드러커의 <프로페셔널의 조건>은 경영학 서적인데요. 다소 자기계발서처럼 느껴지는 구석도 있구요. 그렇다고 해서 내용이 단순하지만은 않아요. 지식의 역사를 폭넓고 깊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피터 드러커도, 경영학적 시각에서, 프로페셔널의 조건으로서의 지식은 고도로 전문화된 지식이라고 말해요. 여기까지 갈 필요 없이 오늘날 누군가가 전문성을 인정받기 위해서 대학 학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떠올려 본다면 프로와 전문지식, 그리고 전문지식을 생산하는 곳으로서의 대학이 가진 긴밀한 관계가 바로 다가오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프로의 정의에 좀더 살을 붙여 보면 “대학의 분과학문 제도를 통해 특수한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가” 정도가 되겠네요.
진송: 전문적인 지식이 프로의 주요 조건이 되는 것은 학제에서뿐만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혹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산업과 생산에서 역시 전문적인 지식은 프로의 가장 주요한 조건이고 이러한 측면에서도 역사성을 되짚어 볼 수가 있어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공적인 전문지식’을 통해서 비로소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고, 즉 그 효율성이 극대화되었고, 동시에 자본주의의 생산성이 포화상태에 이르게 된 것인데요. 지식이 생산성의 증대뿐만 아니라 생산성 증대가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까지를 야기한 것이죠. 산업화 이전에는 지식이 지금처럼 독립된 것으로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지식인, 현인, 성인과 같은 지식의 소유자 개인에게 귀속된 것이자 그 개인과 구분되지 않는 것이었어요. 논어가 곧 공자이고 공자가 곧 그의 사상인것과 마찬가지인 방식으로요. 공자의 학문은 세상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 공자의 지혜였죠.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나 형이상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은 공적으로 공유되기보다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통해 은밀하게 전수되었죠. 1번 보시면 1700년경 또는 그 이후에까지 craft라는 말을 쓰지 않고 비법이라는 의미의 mysteries를 사용했다고 하는데요.
진송: 이렇게 은밀한 것이었던 지식은 1700년부터 체계화를 거쳐 공공의 이익을 위해 공유되기 시작했어요. 1~4에서 보시다시피 최초의 백과사전이 등장하며 지식이 공공화된 시기와 산업이 크게 발달한 시기, 그리고 기술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시기가 모두 동시다발적입니다. 이때 2번에 나와 있는 기술이라는 유형의 지식은 그냥 일반적으로 말하던 상식이나 이런 게 아니라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혜와는 완전히 구분되는 거죠. 지혜 혹은 지식이 학문화되고 조직화된 것이 기술이기도 하면서 그것이 생산성이 있어야지 기술인 것이었어요. 그런 식의 지식을 뜻하는 범주가 새롭게 생겨난 거예요.
진송: 이어서 지식의 공공화가 어떻게 생산성 혁명을 낳았는지를 살펴볼게요. 간단히 말하자면 어떻게 하면 생산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를 모두에게 공유함으로써 그렇게 한 것인데요. 그러한 지식을 심지어 최대한의 효율로 교육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형태로 조직화하고 학문화한 겁니다. 이러한 학문화의 대표적인 결과 중 하나가 프레드릭 테일러가 쓴 『과학적 관리 원칙』이라는 책이예요. 이 프레드릭 테일러는 우리가 알고 있는 ‘테일러주의’의 그 테일러가 맞구요. 테일러주의는 노동자들의 업무에 필요한 지식을 체계화하자고 주장했고 이에 더해 아니라 그 업무를 극도로 세분화하여 분업 체계를 통해 생산성을 증대 시켰습니다. 아까 전문 지식이라는 것이 자기 분야에 대한 지식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이런 점을 고려해보자면 테일러주의의 분업이 바로 전문화의 초석이라고도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는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지식의 공공화를 통해서 당연히 업무 효율이 무척 높아졌고 그 시기를 생산성 혁명이라고 이름 붙이게 됐을 정도로 산업은 이익을 많이 남길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세상은 믿기 힘들 정도로 풍요로워졌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자본주의는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 것은 아니예요. 자본주의가 낳은 것은 불평등이죠. 지금도 사실 지구상의 모든 사람을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식량이 생산되고 있는데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엄청 많잖아요. 이건 생산성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문제고 생산성 자체는 지금 여기서 더 나아질 수 없는 수준입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마르크스도 자본주의의 모순이 극에 달하면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거라고 예측을 했었는데 생각보다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을 꽤나 괜찮게 만들어 준 결과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죠. 이렇게 살기 좋아진 것의 결과로 마르크스가 예견한 바대로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대신 부르주아가 등장했잖아요.
진송: 앞서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지식 개념의 탄생, 그리고 지식의 공공화와 그 시기를 같이 한 테일러주의의 분업을 산업의 전문화 과정 중 하나라고 말씀드렸는데 이와 함께 대학의 분과학문 제도를 살펴보면 그 사이에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대적 대학제도가 곧 분과학문 내에 직업 학자들이 조직되어있는 구조이기 때문에 근대적 대학제도의 탄생은 분과학문의 탄생이자 전공자의 탄생, 즉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으로서의 전문가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해요. 피터 드러커는 오늘날 생산성 혁명 이후 생산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제조업이나 공업에서와는 또 다르게 지식이 그 자체로 생산수단이 되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 실질적으로 분과학문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말에는 상당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학문의 이름을 딴 직함, 학문의 이름을 딴 학술지, 학문의 이름을 딴 도서관의 분류목록, 출판사의 이름, 서점의 서가” 등.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말한 바대로 분과학문은 지식개념의 범주이기 이전에 제도인데다, 수익을 창출하는 기능 즉 생산도 하고 있어요. 실질적으로 대학이 지금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만 봐도 이 말이 되게 타당성이 있어요. 어떤 분과 학문이 새로 생기잖아요. 그럼 그 학문의 이름을 딴 직함, 뭐뭐 학과 교수, 이런 게 생기고 그 학문의 이름을 딴 학술지가 생기고. 이런 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가 있게 되죠.
앞에서 잠깐 말씀드리기도 한 얘기인데, 지금 더 이상 생산성을 증대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죠. 이에 대해 피터 드러커는 『프로페셔널의 조건』이라는 책에서 생산성 혁명 이후 생산성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고 표현을 해요. 즉 제조업이나 공업과 같은 방식으로 기존의 자원을 활용해서 더 많은 상품을 만들어내고 이런 거는 한계가 있는 거예요. 오늘날 한국에서 산업 구조가 얼마나 바뀌었는지도 이걸 잘 보여주죠. 제조업이나 공업의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고 소위 잘 사는 나라에서는 다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자본주의적 생산성이 포화 상태에 도달하면서 사람들이 새롭게 생산의 수단으로 삼게 된 것이 지식이다, 이렇게 피터 드러커가 얘기를 하거든요. 지식 자체의 생산수단화는 포화 상태에 이른 생산성에 대한 자구책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덧붙여 설명하고 싶은 것은 분과 학문화 자체가 그냥 어떤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지식을 생산하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는 거예요.
진송: 예컨대 철학과 과학이 분화되면서 사회과학의 자리가 마련되었죠. 그렇다고 얘기를 많이 하죠. 이건 단지 제도적으로 사회과학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넘어 사회과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의 유형이 탄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과학을 통한 생산이 가능해졌다는 말이기도 하고요. 아직까지도 이런 일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어요. 예를 들어서 대학에 있는 분과 학문 제도에 만족을 하지 못한,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글로벌 어쩌고 연구소 이런 걸 대학 밖에다 만들어요. 근데 그러고 나면 머지않아서 대학 안에 글로벌 어쩌고 학과가 생기게 되고, 거기서 교수를 채용해서 교수에게 월급을 줄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사례를 생각해 보면 제도의 생산이 제도의 규범을 따라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도에 반하는 움직임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좀 드리고 싶었어요.
진송: 지금 분과 학문은 너무 많고 점점 더 많아지고 있죠. (ppt 참고)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지금의 분과학문 제도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근데 그럴 때 그걸 하나로 통합하는 일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문제를 엄청 복잡하게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또 멀티 어쩌고, 트랜스 어쩌고, 글로벌 어쩌고, 비판적 어쩌고, 이런 새로운 학문 범주들이 조직으로서의 분과 학문을 훼손하지 않고 그것들이 분과 학문을 강화한다는 분석을 하고 있어요.
진송: 이걸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상황이 변했고 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맥락을 돌이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프로나 아마추어, 지식 개념의 진짜 기원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의 맥락을 파악하여 더욱 적실성 있게 문제의식을 벼리기 위한 거였어요. 지식이 산업과 학제에서의 생산을 거치며 지식화되었고, 전문적인 지식의 보급을 통해 생산성은 생산성 혁명을 넘어 생산성의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됐고, 분과학문화는 학문의 융합과 학제에 대한 저항까지도 제도 내의 새로운 지식범주이자 생산수단으로 흡수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달리 말해 전문적인 지식과 교육을 통해 산업과 대학 모두에서 생산성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생산이 어려워졌고, 이러한 상황, 간단히 표현하자면 더 이상 더 많은 생산을 해내기가 어려워진 이 상황을 타개하고 더 많은 것을 생산하기 위해 이제는 전문지식 그리고 프로들에게 프로 개념, 프로의 전문성 자체에 대한 개량이 요구되고 있어요.
기존의 제도 안에 있는 것만을 이용해서는 생산을 할 수 없는, 하던 것만 해서는 더 이상 먹고 살 수가 없는, 그러니까 자기 전공 분야에서만 뛰어나서는 충분히 입에 풀칠을 할 수 없고 뭘 더 해야 돼요. 투잡, 쓰리잡을 해야 되는 이런 상황이 단지 비숙련 노동자나 비전문가에게만 요구되는 상황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프로 개념이 개량되었다’ 이런 표현을 쓰는 건데요. 그러니까 프로에게 기존의 것 이상의 어떤 미덕이 요구된다는 것이죠. 오늘날의 프로는 자기 분야에 대해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넘어 ‘인터--’ ‘멀티--’ ‘트랜스--’의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전문적인 것이 전문가 개인의 전공 분야에 한정된 능력을 말한다고 할 때, 이게 전문적이라는 것의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말할 때 오늘날의 프로는 비전문성을 되려 요구받고 있습니다. 이런 프로-아마추어의 등장은 사실상 아마추어-프로의 등장과도 공명합니다. 아까 전에 프로와 아마추어가 서로와의 관계 속에서 그 개념과 의미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죠. 프로 개념이 개량되면 아마추어 개념도 개량이 될 수밖에 없어요. 아마추어적인 것을 요구받는 프로-아마추어가 등장할 때, 아마추어적인 것 자체를 프로적인 것으로 향상시키기를 요구받는 아마추어-프로도 등장합니다.
이 아마추어-프로의 의미를 두 가지 의미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첫 번째는 프로-아마추어와 구분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아마추어-프로이며, 두 번째는 ‘아마추어됨’을 전문적으로 탐구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멀티--’ ‘인터--’ ‘트랜스--’ 및 ‘탈-제도화를 통한 생산’에 대해 말하고 쓰고 또 가르치는 전문가로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이렇게 긴밀하게 맞물려 있고 상황이 변하면서 점차 다른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에 아마추어를 단순히 대안적 주체의 모델로 제시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또 이렇게 실질적으로 현실 속에서 프로와 아마추어를 둘러싸고 작용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맥락을 절단하고 백지에서부터 아마추어를 긍정성 위주로 새롭게 개념화하는 것은 프로를 만들어내는 폐쇄적인 제도와 그 현실에 개입하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주체성을 통해서 아마추어를 정의하는 것은 아마추어를 생산하는 제도에 대해 탈역사적이기 때문이에요. 개량된 아마추어-프로, 프로-아마추어 모델이 전문적인 것, 지식, 그리고 제도가 맺는 복합적인 관계를 단순화한다고 쓴 것도 이 때문입니다.
여기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저는 아마추어리즘에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예요. 아마추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적인 것, 아마추어의 작업을 더 많이 보고 싶으며 저 자신 역시 아마추어적으로 보일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발표에서 하고자 하는 것은 동시대에서 전개되고 있는 아마추어리즘 담론이 어떤 현실, 어떤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지, 문제를 겨냥하는 문제의식은 어떤 방식인지, 그리고 그것을 겨냥하기에 동시대 아마추어리즘의 전제와 방향 등이 적실한지 등을 검토하는 겁니다. ‘아마추어리즘을 왜 얘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의 사람이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가 아마추어도 성공할 수 있으면 좋겠어서,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아닐 거예요. 아마추어를 생산하고 동시에 배제하는 제도의 폐쇄성이 지식의 생산과 순환을 불건전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의 지식은 단지 학술적인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라는 점을 덧붙여 두고요. 이 지점은 발표 뒷부분에서 다시 설명하게 될 거예요.
1부 맨 처음에 프로의 어원이 지식을 공적으로 선언한다는 의미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얘기했죠. 그리고 근대적인 지식이 생산성 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 지식을 공유했기 때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아마추어 개념의 개량은 공적 영역의 축소 그리고 사적 영역의 확대와도 무관하지 않은데요. 제도가 공고해지거나 폐쇄적으로 변하는 것과 별개로 공공의 것으로 간주되는 것, 심지어는 공적으로 논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축소되고 있고 이는 지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뭐, 공적인 것으로서의 지식을 논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 니 말도 맞고, 내 말도 맞고, 여튼 네 말은 뭔가 틀린 것 같은데 그냥 각자 자기들의 진실이 있는 걸로 생각하고 각자의 길을 가자. 이거는 내가 우리 과에서 할 테니까 너는 네가 할 말 너네 과에서 해라. 그리고 우리 이제 만나지 말자. 안 그래도 되지? 사실 안 그래도 되게끔 제도가 잘 만들어져 있는 거 아닐까요. 약간 이런 식으로 지식에 대한 가치관이 합의가 약간 좀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고도로 발달한 지식의 전문화 과정이 전문적인 것을 통해서 각자의 진실, 각자의 이론, 각자의 영역에로의 축소로 전개된다면 이것 때문에라도 전문적인 것 바깥, 즉 아마추어적인 것을 상상해야 된다고 봅니다. 즉 공적인 것으로서의 지식이 곧 프로페셔널한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과는 완전히 모순되게도, 공적인 것으로서의 지식, 공적으로 논의가 가능한 것으로서의 지식을 말하기 위해 제도 비판이 필요하고 아마추어적인 것을 사유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팔도: 여태까지 저희가 아마추어랑 프로가 제도 안에서, 제도랑 같이 구성되었음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수익을 올리느냐, 수익을 얼마큼 올리느냐랑 학계에서 얼마나 전문적인 교육을 받았느냐를 검증해주는, 프로를 생산하는 제도로서 자본이랑 학제를 뽑았던 건데요. 이런 게 이제 신뢰할 수 있는, 실력이 보증된 그런 종류의 프로를 만들고 또 그 사람들에게 보상을 굉장히 해준다. 그래서 프로를 유지하는 체계로 작동한다고 저희가 믿고 있잖아요. 그리고 동시에 이 보상 체계가 프로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강력한 기준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이 보상 체계를 첫째로 돈, 그리고 둘째로 동료애에 대해서 이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우선 방금 진송 님께서 말씀드렸다시피 프로도 뭔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융합형 인재가 되기를 기대받고 있고 아마추어도 마찬가지로 개량화가 되면서 굉장히 프로 같은 아마추어, 이렇게 되고 있는 복잡한 상황이잖아요. 다들 먹고 살기 굉장히 힘들다지만, 그래도 프로는 돈을 받잖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프로는 먹고 살만 하느냐.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건 사실 다들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을 해요. 이전 세션에서 정부 지원금 제도에 그렇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랑도 전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고요.
지금 보는 피피티에 삽입된 이미지는 2020년 장은정 평론가가 문학계의 궁핍한 고료를 고발한 내용을 담은 기사인데요. 매당 5,000원으로서 어떻게 노동자로서 평론가가 지속 가능하냐, 불가능하다. 즉 보상이 충분치 못하다, 이 체계가 프로 예술가의 활동을, 삶을 지속가능하지 못하게 한다라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계 전반에서 꾸준히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 사실 “프로여도 돈을 많이 못 받는다"라는 거잖아요. 많은 작가들이 한 분야의 전문가로, 그리고 그 전문성을 토대로 생계를 온전히 꾸려나가기 힘들어서 전업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투잡 쓰리잡 이런 형태로 불안정한 수입을 올리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전 세션에서도 이 부분에 대해서 동의하시는 분들이 말씀 많이 해주셨는데요.
팔도: 지금 피피티에서 보이는 글은 누협의 <2023 장판문예> 기획에서 송승언 시인이 보내주신 후기 발췌입니다. 신춘문예를 패러디한 <장판문예> 기획의 취지는 등단제도처럼 단 하나의 탁월한 1등 글과 그에 대한 평을 내놓는 게 아니라, 투고된 모든 작품과 그에 대한 후기까지도 모두 웹페이지에 공유한다는 것이었는데요. 문제는 저희도 무급 노동으로 이 기획을 진행했고 남한테 줄 돈도 없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심사위원이 아닌 후기위원들에게 청탁서를 보내드리면서 ‘고료가 0원이지만 이만저만한 문제의식으로 이 기획을 만들었다. 괜찮으신 분들은 함께 해주시면 좋겠다’고 명시했었습니다. 여기 응답해주시면서 송승언 시인이 원래는 “고료가 1천 원이라도 책정되어 있어야 청탁에 응한다"는 원칙을 말씀해주신 것이고요. 문학계 많은 작가들이 고료 명시조차 안 되어있어서 작가가 고료를 재차 몇 번이고 물어보아야 했거나 혹은 고료가 형편없이 짠 아니면 아예 돈 안주는 청탁서를 수도 없이 많이 받아왔다는 건 많이들 알고 계실 거라 생각됩니다.
팔도: 돈을 받으면 프로, 돈을 안 받으면 아마추어. 이게 상식으로 공유되지만 프로도 돈 못 받는 현실인 셈입니다. 프로에게 돈으로 보상해주는 이 체계 자체가 특정 노동의 가치를 낮게 측정하는 문제가 있는 거죠. 그리고 자기 작업으로 수입을 올리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 단순 취미로 작업하는 사람들이 아마추어라고들 한다지만, 등단했든 아니든 전공을 했든 안했든 어떤 아마추어들은 포타(포스타입) 같은 플랫폼을 활용한다거나, SNS를 통한 커미션을 받거나 메일링 구독자를 모집하는 등의 경로로 돈을 벌고 있기도 해요. 때문에 돈 안 받으면 아마추어라는 상황은 이미 변해있다는 거죠. 여기에 더해 아마추어의 활동들이 역으로 제도에 은근슬쩍 흡수되기도 한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앞서 진송님이 설명해주신대로 제도에 저항하는 어떤 움직임이 제도로 흡수되는 것과 유사하죠. 비판 어쩌고, 글로벌 어쩌고, 융합 어쩌고… 이런 것들이 결국 제도에 흡수가 되는 형태에 대해 말씀 드렸잖아요. 그거랑 되게 비슷하다고 생각이 돼요. 예를 들어서 대형 출판사에서 미등단 시인들이나 작가들의 메일링 기획 이런 거 그대로 흡수해서 한다든가 이런 형태로 계속 상황이 바뀌고 있다라는 건데요.
이런 상황에서 프로도 돈 더 주고, 아마추어도 제도적 보상 체계에 편입되어야 한다(아마추어도 돈 줘야한다)는 당위가 당연히 가능하고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 발표 안에서 더 말하고 싶은 건, 돈 책정되고 고료가 책정되는 거는 당연히 어떤 종류의 지식의 가치 평가가 있는 거고 이게 얼마나 생산성을 극대화하거나 수익성이 있느냐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효율적인 종류의 지식이고 노동이고 활동이냐 이런 것에 대한 평가가 전제되어있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돈 더 달라, 임금인상해라, 내 분야 하면서 지속가능하게 살 수 있게 해라’라는 투쟁만큼이나 대체 어떤 종류의 지식, 어떤 노동, 누구의 지식과 노동이 주변화되고 가치 절하되느냐고 공적으로 계속 논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느껴진다는 겁니다. 왜 하필 예술은 돈을 이렇게 못 받지, 왜 이 분야는 생산성이 없고 수익성이 없다고 생각되고 가치 절하되고 주변화가 되지. 이런 논의를 공적으로 이어가는 거요. 뒤에서 더 얘기할 텐데 돈 못 받는, 달리 말해 제도적으로 ‘신뢰받을 만하다’ ‘탁월하다’ 이런 식으로 승인받지 못하는 지식이 뭐가 있지?하면 저희 발표 제목처럼 아마추어 지식, 그리고 여자 지식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앞서 얘기했던, 돈 많이 못 받는 예술계 안의 지식과 노동도 마찬가지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종류가 아니라는 평가가 있기 때문에 보상이 그렇게 형편없는 것일 거고요.
다시 좀 돌아오자면, 복잡하게 돈이라는 보상체계와 프로/아마추어가 다 얽혀있는 상황, 그리고 특정 지식/노동이 계속 주변화되고 가치절하되는 상황을 문제삼으면서 동시에 그것과 또다른 어떤 내부적? 자체적? 대안적? 보상체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지, 탐구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떤 대안이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 동시대 작업자들이 많이 논의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 우정 혹은 동료애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팔도: 피피티 왼쪽부터 순서대로 독립출판만화 판매전 홍보 포스터, 민음사 인문잡지 <한편>, 세마 코랄에 게시된 동료비평 관련 글 <다시 보아주는 사람들, 사물들> 이미지입니다. 독립출판만화 판매전 <칸새>를 기획한 만화가 란탄님의 인터뷰부터 순서대로 소개해볼까 합니다.
팔도: 칸새라는 행사의 취지이자 동력으로 란탄님은 동료애를 꼽는데요. (참고: 독립출판만화 판매전 칸새는 ‘독립출판 만화책'의 단일한 기준을 세우기 보다, 그것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모으고자 별도 심사 없이 선착순으로 부스/전시 신청을 받으며 전시 신청에 별도의 참가비도 받지 않습니다.) 한 번 읽어볼게요. (읽음) 여기서 저희가 공감하고 또 강조하면서 나누고 싶었던 대목은 빨간 밑줄친 대목인데요. 그러니까 돈이라는 보상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보면 이 제도의 인정(자격을 주고 돈을 주는 식의 인정)과 보상 체계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작업을 계속 해내가는 사람이 나 말고도 저기에도 있구나. 저게 가능하구나. 느끼게 해주고 알게 해주는 다른 동료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세요. 내가 제도의 보상체계에만 의존하지 않고도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그걸 하는 다른 동료도 필요하다는 거죠. 이 때 동료란 단순히 자주 연락하는 사람, 친구가 아니고요.
팔도: 다음은 세마코랄에 올라온 글 <다시 보아 주는 사람들, 사물들>의 발췌입니다. 동료 피드백에 대해 다루는 글인데, 란탄님이랑 비슷하게 여로님은 동질적 소집단, 패거리. 친구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동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작업자가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제도가 (별로 주지도 않지만) 주는 돈과 인정 외에도 동료와 상호인정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여로님 글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이 부분 같은데요. 그러니까 내 집단 바깥의 다른 집단/분야의 작업자를 호명하고, 협업하고, 피드백하면서 폐쇄적인 카르텔을 “넘어서" 작업자들과 연결될 필요가 있다는 얘기요. 친한 애들끼리 다니면서 니 글 좋다 내 글도 좋지 너 작업 너무 멋지다. 이게 아니라는 거죠. 연결과 상호피드백을 통해 서로의 작업, 관점 이런 것들에 서로서로 건전한 변화를 야기하는 관계를 지향할 만한 동료 관계라고 하시는 거죠. 이런 관계성이야말로 작업자들에게 자기지속적 보상체계로 가능하다고 보는 거고요.
팔도: 세번째로 가져온 건 인문잡지 <한편>에 실린 글 일부입니다. <한편>은 매 호 주제가 달라지는데, 12호는 아예 우정을 주제로 기획되었고 여기에 리타님의 글 <비우정의 우정>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그 글의 발췌입니다. (인용 읽음) 란탄님과 여로님이 “그냥 자주 연락하는 사람", “내 패거리"가 아닌 동료에 대해 얘기하셨다면, <비우정의 우정>은 좀 비슷하면서도 다른 식으로 동료와의 관계를 얘기하고 질문한다고 느껴집니다. 란탄님이 “저기에 나랑 비슷한 방식으로(제도적 보상에만 의존하지 않고)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사람이 있구나. 힘이 된다.” “작업 얘기도 같이 하고, 제도적 보상에만 의존하지 않는 활동에 대한 고민을 나눌 수 있는 동료,” 이 쪽에 대해 말씀하셨다면 여로님은 “내 울타리 바깥에 있는 저 사람, 나랑 다른 분야인 저 사람과 상호영향, 피드백, 변화를 나누는 편이 좋다!"라고 하시는 것 같아요. 한편 리타님은 “우리는 서로 모른다. 절대적 모름. 절대적 차이를 동료/우정의 조건으로 인정하고 시작하자. 근데 이렇게나 완전히 영원히 서로 모르는데, 어떻게 얘/네랑 같이 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으로 옮겨갑니다.
정리하자면, 최근 제도적 보상체계에 대한 대안을 상상하는 여러 동시대 작업자들이 ‘동료와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성 구축하고 지속하기’를 제시해주고 있는데 이 때 ‘특정한 방식’이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친밀성. 그러니까 거리, 빈도, 감정적 교류 이런 게 있거나, 이런 걸 기대하는 형태가 아닌 거죠. 서로 잘 안다, 비슷하다, 잘 통한다, 감정적으로 친밀하다는 감각보다 오히려 우리가 다르다. 나는 너를 잘 모른다. 이런 감각을 공유하는 형태의 동료 관계성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여요. 이 경향을 저희 식으로 표현하자면 “친밀성을 제거하는 형태의 동료 만들기"인 겁니다.
그런데 첫째, 일단 이게 가능한지. 둘째, 개인이 개인을 호명하고 인용하고 반응해주는, 1:1 상호피드백과 상호인정의 시스템보다도 더 공적인 방식으로 동료 상상하기는 어떻게 가능한지, 이런 질문을 공유하고 싶은데요. 첫째, 우선 “감정적" 친밀성, 교류랑 좀 거리를 두는 동료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요. 사실 이런 방식의 동료 관계를 지향하는 흐름은, 어떻게 보면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함으로도 보여요. 여로님 글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지나치게 폐쇄적인, 균질화되기만 하고 서로 서로 물고 빨아주는 카르텔이요. 이 안에 말하자면 객관성 상실, 비판 능력 상실의 위험 혹은 불건전함이 도사리는 건데 이런 위험 요소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것처럼 보이고, 여기 더해 물리적, 감정적 폭력, 성폭력, 위계, 이런 종류의 위험요소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한 측면도 있을 것 같고요.
하지만 제아무리 내 집단 바깥의 누군가와 연결되고, 적당히 거리두고, 느슨한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해서 침해, 갈등, 폭력 이런 요인은 제거되지 않거든요. 그렇다고 이걸 그냥 용인하거나, 이런 위험 요소에 대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말하려는 게 절대 아니고요. 말하려는 건, 동료됨은 항상 모호한 친밀성을 동반한다는 거에 가깝습니다. 언제나 오직 내 작업적 성장의 필요에 의해, 아니면 아주 말끔히 “순수"하고 확실한, 타인의 작업에 대한 관심이 동기가 되어서 내가 내 집단 바깥의 누군가와 작업에 대해 토론하고 상호작용하고 싶다, 이런 욕망이 생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작업 활동과, 작업자 개인을 깔끔하게 분리해서, 저 사람의 작업 내지는 활동만 쏙 뽑아서 그것과 교류하는 건 전 개인적으로 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부분과 관련해서 란탄님, 여로님 글과 리타님 글을 붙여서 좀 더 얘기해보고 싶은데요. 이 빨간색 표시된 첫번째 질문과 두번째 질문과도 연관되는 지점입니다. 리타님이 우정/동료애라는 걸 논할 때 말하는, “절대적으로 알 수 없고 절대적으로 차이를 보존하고 있는 타인”은 여로님과 란탄님이 생각하는 동료랑 조금은 달라 보이거든요. <비우정의 우정>에서의 “너", 혹은 “친구"는, 여로님이 정의하는 “주관성을 체계화"한, “좋은" 작업을 하고 서로에게 도움되는 건전한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동료도 아니고 란탄님이 말하는, “저기에 저렇게 나랑 비슷한 방식으로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구나" 멀리서 힘이 되는 누군가도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얘는 대체 누군가.
리타님 글에서 철학자 아비탈 로넬의 일화가 인용되는데, 깜빡하고 피피티에 안 넣어놔서 대충 설명을 드리자면, 여기에는 정말 참기 힘들 정도로 짜증나고, 끈질기고, 작업에 어차피 하등 도움 안 되는 종류의 만남(커피 한 잔 하자)을 제안하는 아비탈 로넬의 친구들이 등장해요. 로넬은 거절하기 어려워하는데, 그건 그 친구들을 사랑해서, 아껴서, 좋아해서, 그 관계가 소중해서, 그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냥 거절 행위 자체가 로넬한테 죄책감을 심하게 유발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리타님이 진짜 문제는 사실 그 짜증나고 도움 안 되는 로넬의 동료가 아니라 아비탈 로넬 본인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나랑 안 맞고, 서로 모르고, 사실 좀 그렇게까지 만나고 싶지도 않고, 작업 얘기든 사적 만남이든 일체 하기 싫을 수까지 있는 사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관계가 가능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도출합니다.
리타님의 논의를 저는 어떻게 견디기 힘든, 그닥 건전하지도 내가 좋거나 편하지도 않고 서로 서로 긍정적인 영향력 선한 영향력을 주고받지도 못할(별로 주고받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만나고 심지어 동료까지 될 수 있을까로 읽었거든요. 어떻게 우리가 같이 클 것인가. 이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정말, 전혀 별로 긍정적이지 않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는, 작업적 성장을 주고받을 수 없는, 구린 사람. 정말 안 맞고 나도 널 모르겠고 니가 왜 이런 허접한 걸 만드는지 모르겠고 서로서로 그런데도 대체 같이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같이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도출해낸다는 지점에서 앞서 소개드린, 어떤 되게 긍정적인 순환이 가능한 종류의 동료의 만들기랑은 조금 다른 지점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사실 이런 고민이야말로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게, 1:1로, 어떤 개인 작업자가 또다른 개인 작업자와 연결되고 호명되고 힘을 주고받고 반응하고 이런 형태의 동료 만들기/연결되기는 어쨌거나 내가 견딜 수 있고 견디고 싶은, 긍정적이고 건전한 비판, 비평 피드백 순환을 도모하는 류의 상상이잖아요. 패거리, 카르텔을 지양하는 피드백 순환 체계임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의 동료 만들기에서 충분히 ‘공적'인 느낌이 안 든다면, 그건 어쨌든 이 때 호명될 수 있고 같이 건전한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대상이 애초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견딜 수 있는, 참을 수 있는 건전한 종류의 이질성까지만 허락하는 느낌이랄지. 이런 동료 만들기가 전제하는 범위보다 더 공적인 방식으로 동료 상상하기도 가능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질문이 드는 거죠. 왜냐면 사실 나도 “쓸모”있고 탁월하고 주관성의 체계가 잘 잡혀있는,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 종류의 동료가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요.
진송: 동시대 담론에서 아마추어는 긍정성을 중심으로 재개념화되어 대안적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고 저희가 정리를 했었죠. 프로를 구성하는 제도가 아마추어를 배제하거나 저평가한다면, 아마추어가 프로처럼, 혹은 프로보다 탁월한 구석을 가지고 있다거나 사실은 프로의 탁월성으로 간주되고 있는 속성들, 예를 들면 독창성이나 주체성 같은 것들도 원래 아마추어에 귀속되어야 하는 속성이라는 식으로. 근데 진짜 아마추어들이 프로 못지 않나요? 그 이전에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대체 아마추어에 대한 얘기를 왜 하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프로만 인정해주는 현재 상황이 전체 씬 자체의 퀄리티를 떨어뜨리고 있어서 그런 건가요? 예를 들자면, 등단한 사람들 글만 지면에 실어주지만, 사실은 등단 안 한 사람들이 글 더 잘 쓰기 때문에 그런 건가요? 지금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이야기를 하시는 분들이 이런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절대 아니예요.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하지만 그 이야기가 지지를 받는 이면에 이런 식의 열정과 열망이 있는 점을 부정할 수도 없다고 생각해요. 또 긍정성을 중심으로 하는 대안적 모델의 제시가 이런 식의 결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인지해야 되는 비판은 꽤 쓸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지식과 자본의 영역 모두에서 생산이 문제가 되는 지점은 생산성의 부족이 아니라 생산성의 포화이고, 이 생산성의 포화로 인해 제도 바깥의 움직임들이 생산의 제도를 오히려 강화해버리는 맥락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이와 관련지어서 생각해보니까, 저는 근본적으로 이런 의문이 들더라고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과연 진짜 더 발전하는 건가? 더 뛰어난 것, 더 훌륭한 것을 찾아내는 걸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뛰어난 것은 너무 많잖아요. 아무리 많아도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기보다 저희가 지금 어떤 방식으로 이것이 성장한 것인지를, 뛰어나다거나 구린지를, 좋음과 나쁨을 평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평가의 방식이 얼마나 이미 우리가 서로에게 관계되는 방식을 결정짓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공유된 차원의 것인지를 사유하는 게 더 중요해 보여요. 그래서 뭐가 중요하다는 거냐? 잘 모르겠다. 잘 모르겠는데요?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정말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함께, 계속 해 나가는 거예요. 잘 하는 사람만 계속 하고, 잘 만든 것만 보는 것, 잘 만든 것만 보일 수 있게 하는 건 프로를 더 쳐주는 문화 안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요. 잘하는 사람들끼리, 잘하는 사람이 잘할 때까지 할 수 있게 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안 생겨요. 아마추어리즘이 제도 비판의 기능을 하는 담론이 되려면 긍정성에 초점을 맞춰서 아마추어를 재개념화하는 것은 불충분하다고 누차 얘기를 했는데, 왜 불충분할까요? 왜 불충분하다는 걸까? 여기(ppt에) 아마추어가 조건, 환경적으로 구릴 수밖에 없다고 적혀 있는데, 다시 말하면 개인의 주체성과 탁월함으로 아마추어적인 것이 정의될 때 조건, 환경에 대해서는 얘기하기가 어렵게 된다는 겁니다.
진송: 지금 인용된 게 그거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거 같아요. 메리울스턴크래프트가 쓴 유명한 여성학 고전인 『여성의 권리 옹호』 일부입니다. 여기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뛰어나다거나, 모든 탁월함이 사실은 기본적으로 여성에게 귀속된 것이라는 식의 얘기는 하지 않아요. 사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그냥 너네들이 모를 뿐이야. 사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무거운 걸 더 잘 들어. 이렇게 얘기를 하지는 않아요. 심지어는 여성이 인위적이고 나약한 성격을 가졌고, 그리고 사회에서 효용성 없는 구성원임을 수긍하고 선언하는데 이게 단지 울스턴크래프트의 여혐일까요? 여자들은 학교를 안 보내주는데 어떻게 여자가 남자보다 수학을 잘 하고 문학에 정통할 수 있나요? 여자들한테 바지를 안 입혀주는데 여자가 어떻게 남자보다 민첩하게 행동하나요? 소설이나 희곡에서 여자들에게 가능한 유일한 것이 로맨스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데 여자가 어떻게 하면 남자한테 의존을 안 할까요? 그전에 여자가 돈을 못 버는데 남자한테 어떻게 의존을 안 하나요? 여자한테 취직을 안 시켜주는데 어떻게 여자가 돈을 버나요. 당시에 이런 것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보다 돈을 더 잘 벌수 있다”라고부터 이야기했다면 허황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조건과 환경을 배제하고 말하는 방식이 되었을 거예요.
진송: 그 여기 보면은 약간 여혐 짤들 같은 걸 가져왔는데요. 여기 성형을 많이 하신 분들이 서로서 로 너희 성형 티 너무 난다. 이러고 살 쪄서 입을 옷 없는 거라고 하면서 옷 계속 사고. 여기에 진짜 일말의 진실도 없나요? 그러니까 여자들이 성형을 하든 말든, 하든 말든은 아니지만, 여기다 대고 여자들은 성형 많이 안 하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거예요. 왜 그렇게 여자들이 외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게 됐는지 이런 거에 대해 얘기를 할 수 있어야죠. 이런 현실이 있다는 걸 부정하는 거 자체는 아무런 도움도 안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송: 구림이란, 저희가 생각했을 때는 구림이라는 거는 어떤 작품으로 쳤을 때 작가성, 작품성이 떨어진다. 어떤 미적이나 어떤 여러 가지 판단의 기준을 따라서 되게 별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탁월한 것과 열등한 것이 있으면 그것에서 아래에 더 가깝다. 얼마나 고유성, 독창성, 주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얼마나 ‘자기 언어’로 표현되었는지도 구린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작가성과 작품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겠죠.
근데 자기 언어를 갖는 일이 얼마나 힘듭니까?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니라, ‘학교를 안다니고도 자기 언어를 가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 만큼이나 학교를 보내주는 것, 혹은 학교 밖에서도 그에 준하거나 본인이 얻고 싶은 교육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이 얘기까지 하면 길어지겠지만 이론 공부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생각해요. 역사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앞에 프로의 개념 얘기를 하면서 같이 살펴봤잖아요. 지금 여기서 시작해도 된다는 말은 중요하지만, 몰라도 된다는 것과는 다르고, 지금 여기서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알 수 있게 하는 것도 중요하고요.
각설하고, 작품으로 치자면 못 만든 작품, 작품성이 떨어지는 거, 이런 걸 이제 구림이라고 간단히 정리를 해보았는데, 이제 저희가 ‘뛰어난 거 필요 없어! 이렇게 뛰어난 게 많은데 뛰어난 거 하고 싶으면 그냥 아마추어리즘 안 하고 프로페셔널리즘 하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을 하는 입장에서, 그럼 ‘좋고 나쁨에 대한 가치 판단이나 평가가 필요 없다는 거냐’ 이런식으로 정말 너무 어려운 질문들이 제기가 될 수 있어요. 근데 저는 이렇게 구리지 않은 것만 추구하지 말자는 얘기가 너무 어렵고 이해가 안 되게 느껴지는 게, 그냥 구림에 대해서 얘기할 만한 언어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예를 들어서 어떤 게 어떤 작품이 내 마음에 안 든다, 이거 너무 허접하다, 라고 할 때, 훌륭한 것을 판단하는 이러이러이러한 기준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훌륭하지 않은 거야, 이런 식으로 탁월함의 기준에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리다는 식으로만 얘기가 된다든가. 그러니까 결국 탁월함에 대한 언어만 있는 거죠. 좀 구체적으로 얘기가 되더라도 ‘이건 너무 정치적이어서 미학적으로는 좋지 않다’, 혹은 ‘이건 너무 미학 측면에만 집중해서 정치적으로 구려졌다’ 이런 식의 엄청 간단한 도식을 통해서밖에 언어화가 안 되고 있다고 생각을 해요.
구림에 대한 언어화의 가능성, 풍부한 언어화의 가능성을 고민하면서 지금 이 시점에서 떠올랐던 것은 유머입니다. 구림을 향유하고, 이걸로 깔깔대는 것에서부터 구림의 기능을 다양하게 상상해 보자, 그런 거였는데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우리가 이미 구림을 즐기고 있는 하나의 방식이 유머라고 생각했어요. 다른 말로, 소수자적 관점에서 생각했을 때, 혐오적인 문화를 좀 재사회화 재문화화를 할 수 있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진송: 구림의 예시, 구림을 향유하는 감각이 곧 소수자의 감각일 수도 있다는 그러한 예시로 레즈비언적인 컨텍스트들을 가져왔는데요. 레즈비언 혹은 부치의 미학이 촌스럽다 이런 얘기가 또 널리 퍼져 있죠. 모르는 분들은 모르시겠지만. 가운데 아래에 보시면 저렇게 원색으로, 이 사진이 원색적이라는 게 아니라. 원색의 색감으로 저렇게 채색이 되어 있고, 주먹에 어떤 무지개가 그려져 있어요. 자신이 동성애자라고 표현을 하는 것일까요? 뭐 이렇게 일반적으로 좀 별론데, 라고 판단할 만한 요소들이 있죠. 그리고 위에 보면……. 에휴, 아닙니다……. 여튼 이런 게 있는데 이게 사실, 이런 걸 보고 이 컨텍스트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아 촌스러워서 구리다!’ 이러고 끝나 버리나요? 그게 아니죠. 이걸 가지고 한참을 얘기할 수 있어요. 공통적인 감각, 문화적인 소통과 공유를 통해서 이걸 가지고도 한참을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림에 대해서도 다양한 언어가 가능한, 그런 가능성을 본 거죠.
이런 맥락들을 활용해서 계속 문화가 재생산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고도 생각을 해요. 이게 구림을, 구림에 대한 언어를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하나의 예시가 되지 않을까 해서 가져와 봤습니다. 저희가 이제 1시간 안에 끝내기 위해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말씀을 드렸는데 질문 시간에 질문 주시면 자세한 거 더 말씀드리려고 하고, 일단 발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