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래된 옷장처럼 너를 사랑하고

팔도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이하 『오래된 거리』)에는 유독 실패하고 부숴지는 사랑을 증언하는 화자가 자주 등장한다. 이 사람은 다만 증언할 뿐 그 사랑의 죽음을 지연할 수도 막을 수도 없다. 이 낡은 사랑꾼은 어째서 안정적인 사랑(이라는 게 있다면)을 마다하고 자꾸 이러는 것일까? 왜 “그런” 여자만 만나는 것일까? (나는 화자와 그의 연인이 모두 퀴어 여성이라고 마음대로 전제하고 있다.) 진은영의 사랑은 그야말로 "저항, 치유, 예술과 하나"라는 해설[1]은 이런 질문들에 속 시원한 대답을 주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전제 위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잘 알려진대로 진은영은 이때껏 출간한 시집 전체에 걸쳐 꾸준히 사랑을 말해왔다. 『오래된 거리』에는 대놓고 “사랑”이 제목에 등장하고 시집 첫 장부터가 「청혼」이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도 싶다. 하지만 진은영이 '위대한 사랑의 시인'이라고 할 때 진실로 나에게, 그리고 아마 수많은 진은영의 퀴어 독자들에게(왜 레즈비언들은 그렇게나 진은영의 시에 매료될까? 적어도 내 주위는 그런다.) 중요한 것은 비단 일관된 주제 자체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은, 그 자체로 과잉하고 “노골적”이라고 여겨져 온 퀴어 존재 양식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이 뻔뻔히 주장한다. 진은영의 많은 시는 어쩌면 "직접적으로 크게"[2] 사랑을 그린다고, 특히나 『오래된 거리』의 어떤 구체적인 사랑은 오래된 '벽장 퀴어closeted queer'의 것처럼 읽힐 수 있다고 말이다.


옷장 속에서 사랑을 했네
하늘의 흰 무릎이 내려와
땅의 더러운 무릎에 닿았네
간지러워 나무들은 재채기했네
가슴이 부끄러워 두 개의 언덕으로 솟아났네
놀라서 구름은 달아나고
아름다워서 웃음이 흩어졌네
아아 너무 웃어 비가 내리네
하얗고 더럽고 무서운
알몸으로 나는 쏟아졌네
흐르는 별처럼
밤의 깨진 술병 속으로

얼굴 위로
텅 빈 옷걸이들 흔들리네

— 「우주의 옷장 속에서」 전문


『오래된 거리』에서 '옷장'이라는 시어가 등장하는 건 비단 「우주의 옷장 속에서」 만이 아니다. 「당신의 고향집에 와서」의 화자는 "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나를 꺼내 데려가주세요"라고도 말한다. 주지하듯 옷장 혹은 벽장은 퀴어가 천착해 온 유구한 은유이며 오랜 시간 '벽장'을 나오지 않는(혹은 나오지 못한) 퀴어의 세계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으로 자주 상상된다.

그러나 「우주의 옷장 속에서」가 그리는 옷장은 환희에 겨워 "너무 웃"는 바람에 비가 쏟아질 정도의 놀라운 사랑이 가능한 공간, 그야말로 하나의 우주가, 세계가 창발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동시에 이 시는 "옷장 속에서 사랑을 했”다는 존재가 대체 누구인지 밝힐 의지가 없다. “하얗고 더럽고 무서운 알몸”으로 쏟아진 화자가 사랑의 ‘주체’인 걸까? 덩그러니 남은 "나"의 육체는 오히려 아름다움에 속수무책으로 흩어지고 내리는 "비", "흐르는 별", "텅 빈 옷걸이들"과 그 성질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이라는 현상에 휘말린 “나"는 다만 수동태로서 쏟아진다.

이 극도의 수동성, 주체성의 불분명함이야말로 시의 퀴어한 독해를 작동시킨다. "하늘의 흰 무릎"이 "땅의 더러운 무릎"에 닿으며 천지가 뒤바뀌는 오염 속에 주인 없는 신체의 "가슴이 부끄러워 두 개의 언덕으로 솟아"난다.('봉긋한 두 개의 가슴'이라는 여성적인 이미지만큼은 이렇게나 분명히 새겨진다는 점에 어쩔 수 없이 눈길이 간다...) 그리고 얼굴 없는 "웃음"은 비를 내리게 만든다. 이 사태 어딘가에 위치했을 “나”라는 존재의 행위주체성은 모호하게 남겨진다.

황홀경(ecstasy)은 '자기의 상태(stasy)에서 밖으로 벗어난(ec-)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섹슈얼한 열정, 분노 또는 비탄과 같은 격렬한 느낌에 의해 이성을 잃은(beside oneself)상태인 것이다.[3] 사랑의 카오스 속에서 “나”라는 1인칭 주어를 탈구시키는 「우주의 옷장 속에서」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황홀경을 묘사한다. 진은영의 시에 미(rhyme)와 논리(reason)가 팽팽하고도 감미롭게 경쟁한다지만,[4] 「우주의 옷장 속에서」를 포함한 『오래된 거리』의 사랑 시에서 어쩌면 초과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얗고 더럽고 무서운 알몸"인 “나”를 "쏟아"지게 강제하는 황홀한 폭력, 이성적인 "나"를 기꺼이 상실하게 만드는 사랑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도 '너'도 없는 황홀경의 말미에 화자는 술병이 깨지듯 돌연 어떤 "얼굴 위로/텅 빈 옷걸이들"만이 흔들리는 모습을 목격한다. 이 때 감지되는 "텅 빈" 공허함은, 옷장이 하나의 우주를 창조하는 잠재성으로 무궁무진하면서도 돌연한 붕괴에 취약한 장소임을 암시한다. 격렬히 생성되다가도 거짓말처럼 부서질 수 있는 장소. 그것은 '나'의 육체인 동시에 은밀한 우리의 벽장이다.

'나'는 여전히 옷장 속에서 흔들리는 “텅 빈 옷걸이들”과도 같은 사랑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옷장의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 것일까? 어떤 쪽이든 화자는 남아있다. 닳아 헤진 몸으로 황홀경을 증언하고 사랑의 역사를 소환하면서. 하얗고 더러운 몸으로 쏟아진 '나'에 대한 묘사 위로 문득 『실낙원』의 구절이 겹쳐진다. 천국에서 떨어진, 즉 타락한fallen 사탄은 감히 회개도 않고 동료 타락 천사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Space may produce new worlds
우주가 새로운 세계를 낳을 수도 있으니

— 존 밀턴, 『실낙원』 1.650


우주가 생성할 새로운 세계는 지상 세계, 즉 에덴 동산이다. 사탄은 마침내 그곳에서 이브를 만나고 그녀의 욕망을 건드린다. 우주의 옷장에서 황홀경을 느끼자마자, 즉 욕망과 사랑, 폭력에 기꺼이 자신을 내맡기자마자 "하얗고 더럽고 무서운 알몸"인 채로 추방된 '나'를 사탄으로, 또 이브로 읽어볼까. 여기에 더해 이브가 베어 문 열매가 실은 사과가 아니라 기괴하기 짝이 없는 꽃이자 과일인 무화과라는 가설[5]까지 떠올려볼까...

어떤 식으로든 남아서 사랑의 역사를 소환하는 건 지나간 시절을 불러들이는 「청혼」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를 찾던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라는 약속은 기실 “나” 자신을 찾던 시간마저도(이를 보다 “직접적으로 크게,” 퀴어 정체성 탐색의 여정으로 읽기를 제안할 수도 있겠다) 실은 이미 “너”에게 귀속되어있었음을, 그러니 내내 “나”는 “너”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한에서 “나”였음을 밝히는 고백이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의 손을 잡고/어린 시절이 숨어 있던 은유의 커다란 옷장에서/나를 꺼내 데려가”달라고(「당신의 고향집에 와서」) “너”에게 청하는 “나”의 모습은 또 어떤가. 그렇게 불러들여진 “당신”과 함께, 작고 흉진 존재들의 “모든 울음들", “낙서”, “심장”, “마을 전체"에 기꺼이 “나”를 이양하겠다는 화자는 그 스스로도 한없이 보잘 것 없다. 그러나 “너"를 따라 나간 “나"는 이제 “차력사인 봄"이 땅을 들어올리고, “붉은 담쟁이 잎"이 피어나고, “장화 속이 축축해지도록 눈" 내리는 광경을 모두 경이롭게 감각할 수 있다. 그렇게 “너"와 계절을 살아낼 수 있다. "너"와 "나"의 앞에 “별과 알콜을 태운 젖은 재들이 휘날"린다. 마침내, “내가 고백할 수 있도록”.

시에서 화자가 겨우 할 수 있고 하려는 일은 그러니 겨우 이런 것이다. 너에게 “나를 꺼내 데려가"달라고 청하는 것, 너에게 “고백"하는 것. 또 “너”의 등 위로, 어쩌면 “다리 잘린 그들의/기다란 목과/두 팔과/눈 내리는 언덕처럼 새하얀 등”과 다르지 않을 “너"의 하얀 등 위로 “사랑의 민달팽이들을 풀어놓”겠다고 약속하는 것. 이 세 가지 일은 서로 다르지 않다. 이제 “우주의 옷장"도, 껍데기도 없이 등을 훤히 내놓은 “하얗고 더럽고 무서운"(「우주의 옷장 속에서」) “민달팽이들”(「당신의 고향집에 와서」)처럼 “나"는 쏟아진다. “너"의 창백한 등 위로 끈적이며 미끄러진다. 이것이 귀하고도 퀴어한, 오래된 사랑의 모양이 아니라면 달리 무엇일까?





팔도
가장 최근에 쓴 글은 극단 음이온의 "연극 안 하기 1 - 단단히 경고하기"의 리뷰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 [1] 신형철, “해설/사랑과 하나인 것들: 저항, 치유, 예술”,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진은영, 문학과지성사, 2022, pp.110-139. 
  • [2] 신형철, 위의 글, p.137. 
  • [3] Judith Butler, “Violence, Mourning, Politics”, Precarious Life, Verso, 2004, p.24. 
  • [4] 신형철, 위의 글, pp.113-116.  
  • [5] 존 밀턴은 영국인이라 그런지 선악과가 사과라고 본 모양인데 성경에서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나서 자신의 알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렸다. 무화과의 생김새가 궁금한 사람들은 찾아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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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11월, 진송이 기획, 진행한 '시에 대한 단 한편의 짧은 글 쓰기 워크샵'에서 쓰였음.
    대상 시집: 진은영『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