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리기 위한 꿈
강준하
보통 '마법같이 너에게 첫눈에 반했다', 이런 표현을 쓸 때는 상투적인 낭만을 그린 멜로드라마가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진은영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의 화자들은 사랑을 마법, 마술이란 단어로 표현하는 동시에 하나같이 불행하다. 어떤 이유로든 사랑의 대상이 사라졌는데 사랑의 마법은 풀리지 않은 상태다. 이쯤 되면 사랑을 마법이라 표현한 진은영의 저의가 잔인하게 느껴진다. 신비롭게 황홀한 감각으로서의 마법이 아니라, ‘절대 풀 수 없음’의 마법이라면 저주라고 표현할 법도 한데—물론 저주도 마법의 일종이겠지만—굳이 마법이라 표현한 데는 기어이 이유가 있다.
나는 엉망이야 그렇지만 너는 사랑의 마법을 사랑했지. 나는 돌멩이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건드리자 가장 연한 싹이 돋아났어. 너는 마법을 부리길 좋아해. 나는 식물의 일종이었는데 네가 부러뜨리자 새빨간 피가 땅 위로 하염없이 흘러갔어. 너의 마법을 확신한다. 나는 바다의 일종. 네가 흰 발가락을 담그자 기름처럼 타올랐어. 너는 사랑의 마법사, 그 방면의 전문가. 나는 기름의 일종이었는데, 오 나의 불타오를 준비. 너는 나를 사랑했었다. 폐유로 가득 찬 유조선이 부서지며 침몰할 때, 나는 슬픔과 망각을 섞지 못한다. 푸른 물과 기름처럼. 물 위를 떠돌며 영원히
— 「사랑의 전문가」 전문
어떤 형태로든 엉망인(스스로를 엉망이라 생각하는) 화자에게 ‘너’가 어느날 온다. ‘너’는 건드리고, 부러뜨리고, 불태우는 방식으로 화자를 사랑하는데, 이러한 폭력적인 행위가 반복될수록 화자는 오히려 사랑을 확신한다. 이런 마조히즘적 혐의가 제기되는 아래에서 화자는 고통을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자기파괴적인 행위에 중독을 느끼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근거는 이 시집에서 대부분의 화자가 ‘너’가 떠난 뒤 회상의 시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이런 비유가 있을 수 있겠다. 꿈에서만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있다고 했을 때, 꿈을 꾸기 위해서는 덜 잠들어야만 한다. 이미 덜 잠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자기파괴적이지만, 꿈이라는 형태 자체가 이별이 내재된 방식으로 성립하기 때문에 자기파괴적 양태는 중첩되어 쌓여가고, 반복되는 꿈에서의 만남은 행복을 고통과 동치시키게 만든다. 이런 맥락상에서, 「사랑의 전문가」에서 화자가 ‘너’의 폭력적인 마법으로 인해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변신하는 과정은 화자 스스로 ‘너’를 회상하는 과정 자체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퀴어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권력과 정신적 삶』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성애적 욕망이 이미 성취된 것으로 간주하고,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그러나 결국에 이것은 필연성을 지니지 않은 구분이다)이 이미 이루어졌다고 가정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근친상간의 금지는 동성애의 금지를 이미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욕망의 이성애화(heterosexualization)를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1]
위 인용은 오이디푸스적 근친상간 금지를 통해 이성애를 근본적 욕망으로 가정하는 프로이트의 주장을, 근친상간 금지 이전에 동성애 금지가 있었다는 패러디를 통해 근본적 욕망을 상정하고자 하는 것의 무용함을 드러낸다. 즉, 그것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이도 동성애는 금지되고 있으며 동시에 그 금지의 원리조차 은폐된다. 이러한 이론 아래에서, 꿈의 비유야말로 퀴어적이다. 가장 개인적인(개인밖에 알 수가 없는) 형태인 동시에,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사랑을, 몸을 망가뜨려가며 기약 없이 반복하는 행위.
이렇게 반복되는 행복과 고통의 동치 위에서, 진은영의 화자들은 사랑(에서 기인한 고통)을 저주가 아니라 황홀한 마법으로 전도시켜 버린다. “애도되지 않는 대상, 애도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생각과 동성애적 애착의 상실을 슬퍼하는 데 매우 큰 어려움이 있는 문화 속에서 산다는 것의 어려움”[2]을 안고 있다면, 그 사랑이 지속되는 순간의 황홀함만큼은 오히려 배가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꼭 「사랑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예시는 시집에 많다. 「죽은 마술사」의 다음 시구가 이러한 자기파괴적인 소망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있다. “이봐, 슬픔의 좁쌀을 가득 채우라고 / 이제 내 인생은 구멍 난 주머니야”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별들은 벌들처럼 웅성거리고
여름에는 작은 은색 드럼을 치는 것처럼
네 손바닥을 두드리는 비를 줄게
과거에게 그랬듯 미래에게도 아첨하지 않을게
어린 시절 순결한 비누 거품 속에서 우리가 했던 맹세들을 찾아
너의 팔에 모두 적어줄게
내가 나를 찾는 술래였던 시간을 모두 돌려줄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벌들은 귓속의 별들처럼 웅성거리고
나는 인류가 아닌 단 한 여자를 위해
쓴잔을 죄다 마시겠지
슬픔이 나의 물컵에 담겨 있다 투명 유리 조각처럼
— 「청혼」 전문
자기파괴적인 이미지가 가득한 시집 속에서, 「청혼」의 화자는 이질적이게도 사랑을 약속하겠다 말한다. 하지만 사랑이 곧 고통과 같아지는 과정을 지켜본 우리에게, 마법과 같이 황홀한 고통을 약속하겠다 말하는 화자라면 그다지 이상하지도 않다.
「청혼」의 화자가 약속하는 사랑은 ‘너’를 위해 ‘우리’의 과거를 되찾아오는 것이다. 나는 이곳에서도 퀴어적인 혐의를 제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데,—화자와 시인의 성별을 동일시하는 게으른 추론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다—‘너’에게는 ‘우리’의 과거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과거를 사랑의 형태로 되찾아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하고, 쓴잔과 투명 유리조각만이 남는다. 투명 유리조각은 산란되는 빛을 연상시키는 것과 동시에 깨진 유리조각 또한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우리는 가장 이질적으로 보였던 시인 「청혼」에서조차 자기파괴적인 이미지가 불러오는 황홀한 느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마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쓸 수 있는 화자가 나타나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는 속사포처럼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내뱉는 화자가 등장한다. 그렇게 전능한 화자가 등장하더라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함께 죽는 것밖에 없다(“나는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 / (…) / 죽어가는 내 곁에서 죽어가려고”, “모르는 곳에서 함께 죽어가려고 / 나는 산 사람의 입술을 영원히 살릴 수 있다”). 함께 살기를 희망하지 못하고 함께 죽을 수만 있음에 사랑이 곧 고통의 과정과 같은 퀴어성이 마찬가지로 떠오른다면 이제는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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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진송이 기획, 진행한 '시에 대한 단 한편의 짧은 글 쓰기 워크샵'에서 쓰였음.
대상 시집: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