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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명


  호수.
  운이 그 시에 와서 처음 한 일은 호수를 보러 가는 일이었다. 거긴 아무것도 없어. 단이 말하곤 했었다. 호수를 둘러싼 모양새로 짓다 만 아파트들이 군데군데 뭉쳐서 벌판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었다. 사실 논밭에 있는 저수지였을 텐데, 호수공원은 무슨.
  그래도 운은 그 말을 들으면서 왠지 흰빛에 가까울 고요하고 너른 수면을 떠올렸고 그래서 그것을 호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실제로 본 호수는 과연 원래는 저수지였겠다, 싶은 느낌이었지만 운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여느 호수공원처럼 물가를 따라 나무들이 둥글게 둘러서 있긴 했으나 나무들 사이의 거리는 멀었고 초겨울이어서 잎도 몇 장 남아있지 않았다. 나무들보다도 띄엄띄엄 벤치들이 놓여 있었고 벤치에 앉으면 호수 건너편의 나뭇가지들 사이로 저 멀리 정말로 공사가 중단된 것 같은 건축물들이 보였는 데, 그래서 호수공원은 전체적으로 약간 기이한 인상을 주었다.
  그래도 이것대로 나쁘지 않네.
  그것이 중요하다. 나쁘지 않다. 지금은 호수다. 어쨌든. 지금은 나쁘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고 운은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호수, 에서 돌아와서 그 시에서 지내는 동안 월세로 살게 될지도 모를 방들을 보러 갔다. 처음에 운은 자신이 그 시에서 지내려는 사정에 대해서와 그 사정이 그럴 듯하고 개연성 있는지에 대해서 부동산 중개인들이 의아하게 심지어는 수상쩍게 여기면 어쩌나 걱정했고 나름대로 열심히 대답을 준비했었다. 생각해본 대답이란 이를테면, 저는 글을 써요, 하는 것이었는데 이건 반쯤 거짓말이었다. 글을 쓰려고요, 라고 하면 거짓의 농도가 삼분의 일 정도로 옅어지겠지만. 이 대답은 운 스스로 기각했는데 거짓말이어서는 아니고 이 시에서 지내게 될 이유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이는 대답이어서였다. 또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몇 년 전에 여기 살았거든요, 저도 한 번 살아보고 싶었어요, 라는 대답도 있었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만 운은 그 대답도 스스로 기각했는데 보통 그렇게 현실과 동떨어진 이유로 이런 동네로 거처를 옮기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더 이상해 보이기만 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진실이라고 해서 항상 설득력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어떤 진실은 오히려 지어낸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래서 결국 운은 어떤 대답도 준비하지 못한 채로 부동산 중개인들을 만나 몇 안 되는 방들을 보러 다녔다. 걱정과 달리 부동산 중개인들은 운에게 그런 것을 묻지는 않았고 운은 그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생각하는 스스로가 약간 어처구니없게 느껴졌지만 그것을 다행 쪽의 신호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일지도 모르지만 운은 그렇게 마음을 먹은 그 순간에 둘러보고 있었던 방을 계약하게 되었다. 좁은 편이었고 좀 오래되긴 했지만 미색 벽지로 새로 도배한 벽 한쪽에 붙박이장이 있는 네모반듯한 원룸이었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와 세탁기와 꼬마 냉장고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층이고 남서향이어서 볕이 꽤 잘 들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운은 다시 생각했다. 서울에서 비슷한 조건들의 방이었다면 꿈도 못 꾸었을 만큼 상대적으로 낮은 월세여서 틈틈이 받을 외주 작업비로도 무리 없이 지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오전 호숫가로 가서 산책을 해야지. 운은 생각했다. 단도 매일 호수를 봤을까.
  아.
  단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하고 운은 다시 생각했다가, 그래도 단은 적어도 한번쯤은 호수를 지나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호수를 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단이 본 것을 나도 본다는 것은 좋다, 고 다시 덧붙여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좋은 일인가?
그게 정말 너에게 좋은 일이야? 서울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주를 만났을 때 주가 운에게 물었었다. 주는 이어서 말했다. 물론 직장 그만두고 바로 이직하지 않고 좀 쉴 수도 있지. 네 계획처럼 일 년쯤 쉴 수도 있어. 그건 괜찮아. 그런데 쉬는 동안 왜 꼭 그곳에서 지내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너는 서울 밖에서 살아본 적도 없고 더군다나 거긴 너랑 아무 연고도 없고 뭐 너에게 특별한 감흥을 줄 만한 동네도 아니잖아.
  주는 그곳이 한때 단이 지냈던 곳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러니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그런 사정을 모른다면 전혀 맥락이 없게 느껴질 정도로, 단이 예전에 살았던 곳이자 지금 운이 지내려고 하는 곳은 별다른 이미지를 연상시키지 않는 곳이었다. 운은 처음에는 약간 머뭇거리면서, 그러나 점점 스스로의 말에 확신을 느껴 끝으로 갈수록 유창하게 대답했다. 왜냐면 나는 꼭 물 근처이면서 사람이 많지 않은 동네에 살아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서울에서 그런 입지를 가진 방에 살려면 백수인 채로는 어려우니까. 운이 말하면서 스스로의 말에 확신을 가지게 된 건 그 말이 그럴듯해서였다.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만. 운이 정말로 그 시에 가려는 이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사실이기도 하니까. 운은 정말로 그런 곳에서 살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운과 만나기 이전의 단, 단의 어떤 시간이 그 시에서 흘러갔다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운은 그 바람을 실현하려 하지 않았거나, 조금 다른 순간에 혹은 조금 다른 형태로 실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운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에게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운은 주에게, 둘이 같은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시절부터 아주 많은 이야기들을 해왔다. 하지만 단에 대한 이야기는 주에게 할 수 없었다. 물론 정말로 아예 안 한 건 아니었다. 주는 운이 만나는, 혹은 만나던 사람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았다. 그 이상으로 단에 대해 말하지 못하겠다고 느끼는 이유는 운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주라면 단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운의 이야기를 가만히 다 듣고 이렇게 되물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이 정말 너에게 좋은 사람이야? 그렇게 물으면 운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비밀이 있다는 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친한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건 운 같은 사람에게는 좀 미안해지는 일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래도 걱정 마, 주.
  왜냐면 나는 이제 단과 만나지 않으니까.
  속으로 이렇게 말해 봐도 미안함은 여전히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운은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너에게 정말 좋은 사람이냐고 물을 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아마 주에게 중요한 것은 운이 더 이상 단과 만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이나 운이 단에 관해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일 테니까. 주가 단에 대해서 잘은 모르더라도. 하지만 운은 단에 관해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아직은 찾지 못했고 그러다가 운을 모르던 시절의 단이 살던 곳에 있어보려고까지 하는 것이다. 운이 그 정도로 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 갑자기 문득 고개를 들면 단에 관한 생각이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은 물론 비밀이었다. 비밀이 있다는 것은 미안하고, 조금 쓸쓸하고, 그렇지만 비밀이 있다는 것은 사랑스러운 일이기도 하다는 걸 운은 단과 만나고 알게 되었고 단과 만나지 않게 되고서는 알고 있던 것이 새삼 더 확실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그건 단과 운 사이에 있었던 어떤 것에 대한 비밀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 이유로 운에게 그 비밀 있음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와 단 사이에 있던 어떤 것, 에 이름을 붙여야 할까, 붙인다면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단과 만나던 기간 내내 그런 고민을 많이 했지만 운은 끝까지 그것에 붙일 이름을 찾지 못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이름이 없는 채로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주는 운을 사랑하고 운은 주를 사랑한다. 운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건 운과 단 사이에 있던 어떤 것보다 끈끈하고 강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의 사랑은 너무 확고해서 어떨 때는 운을 침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를테면 그날, 시로 내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주를 만난 날, 헤어져 돌아가기 직전에도 주는 이렇게 묻고는 운을 오래 바라보았다. 도망치고 싶은 건 아니고?
  그건 정말 아니었다. 도망치려고 했다면 그곳에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거야. 운은 이런 대답을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발음하지는 않았다. 그 결정이 도망이 아닌 설득력 있는 이유를 말하려면 단에 대해서 아주 많이 말해야 했다. 운은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왜 도망이라고 생각해, 주?
  너 회사랑 싸우기 싫은 거잖아. 회사는 꼴도 보기 싫은데, 싸우지 않는 너도 싫은 거잖아. 그래서 너를 구성하던 모든 것과 아예 관련 없는 곳으로 가버리고 싶은 거잖아.
  운은 어쩐지 주의 그 말의 어떤 부분이 운보다 오히려 주를 더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반발심 같은 건 아니었다. 왜냐면 싸우지 않는 자신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멋진 사람일 테니까. 주, 진심이야, 너는 참 멋져, 그리고,
  운은 이 부분부터는 소리 내서 말했다.
  그런 거 아냐. 회사랑은 상관없어.
  그러자 주는 간곡한 부탁처럼 말의 한 글자 한 글자를 꼭꼭 누르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운아, 나는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 정말 너처럼 나쁘지 않은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아마도 그게 너를 나쁘게 만든다고 생각해. 사람들이 너를 함부로 하게 두지 마. 네가 겪은 일은 사실 부당해고나 다름없잖아. 가만히 있지 마, 제발.
   운도 알았다. 자신이 그 시기 회사에서 겪은 일이 부당하다고도 할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운은 자신에게도 과실이 있다고 생각했다. 운만 아는 잘못이. 물론 운은 그 말도 주에게 하지 않았다. 주를 가슴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대신 운은 이렇게 말했다. 조금 느릿느릿. 변명하듯이.
   정말 고마워, 주. 네가 한 말 곰곰이 생각해볼게. 그런데 생각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공간이 필요해.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이, 지금부터 당분간 그곳에서, 이면 좋겠어. 그런 생각이었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운은 주가 또 한 번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가만히 마주 바라보았다. 주가 다시 말문을 열 때까지, 아주 잠시였지만.
   너 괜찮은 거지.
   응. 괜찮아지려고 이러는 거야.
   괜찮겠지?
   응.
   그래. 잘 들어가고, 이사 잘 하고, 가서도 잘 지내고, 연락하고. 꼭.
   당연히 그러지. 연차 낸 날 어디 근교라도 드라이브하고 싶을 때 놀러와.
   그럴게. 조심히 가.
   또 봐.
   주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운은 주에게 둘러댄 말, 그러나 역시 사실인 이야기와 그곳에 가게 된 진짜 이유, 그러니까 운이 어쩐지 가장 사랑스럽게 느끼게 된 시기의 단이 살았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서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이 된 것과 단과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된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었지만 서로 조금 닮아 있다고 운은 생각했다. 게다가 그 두 가지 일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차례대로, 그러나 거의 동시라고 해도 될 만큼 정말 약간만의 시간을 사이에 둔 채 일어났고, 그래서 운에게 그 우연의 일치는 무슨 지어낸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에게 내려지는 계시처럼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정말로 우연의 일치가 아닐지도 몰랐다.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그 둘 모두 운이 운이기 때문일지도. 운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도, 나쁘지 않네, 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운은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답이 나오지 않은 채로 낯선 시, 그러나 단의 이야기 속에 나오던, 그래서 너무 많이 상상해서 마치 오래 전부터 봐오고 알았던 것처럼 느껴지는 풍경의 일부를, 이제 적어도 일 년 동안은 자신이 살게 될 작은 방의 창 너머로 운은 오래 바라보았다. 그 창에서 보이는 옆 건물에서부터 일 점 오 킬로미터쯤 걸어야 호수공원이 나왔다. 운은 오전마다 일 점 오 킬로미터를 성실히 걸어서 호수에 갈 것이다. 그리고 호숫가를 산책할 것이다. 산책에서 돌아와서는 전 직장을 통해서 의뢰받은 외주 작업을 하고 남은 시간에는 글을 쓸 것이다. 쓸 수 있을까 운은 또 스스로에게 물었는데 이번에는 답이 어렵지 않게 나왔다. 뭐라도 쓰면 되지, 이를테면 날마다의 산책 기록이라든지 아니면 아무 이야기나 소설처럼 지어내든지. 소설을 써본 적은 없지만 운은 왠지 자신이 소설이란 걸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원룸에 들여놓을 가구들은 단출했다. 테이블 겸 책상 하나. 침대 하나. 책장으로 쓸 목판 박스 하나. 의자 두 개와 여분의 간이의자 하나. 운은 가구들을 배치하고 그 가구들의 필요한 곳에 여러 살림살이들을 풀고 나서 처음 몇 주 간은 정말로 날마다 호숫가를 걸었고, 그래서 처음 봤을 때 겨울의 진입로에 있었던 호수가 점점 더 깊은 겨울로 들어가며 날마다 미세하게 더 희끄무레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계절감. 단은 이 시에서도 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혹은, 단도 이 시에서 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까. 운은 똑같은 토씨의 위치만 다르게 붙은 두 문장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적절한지 고민하다가 어느 쪽이든, 그랬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되어서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운의 상상 속 그 시절의 단이라면 분명 계절에도 민감했을 것 같았다. 운은 겨울 오전의 물가에 오래 있어도 춥지 않을 만큼 껴입고 나가서 호숫가를 빙 둘러 걷다가 천천히 달려보다가 다시 걷다가 달리다가, 충분하다 싶을 때쯤 호숫가의 벤치 중 아무 하나에나 앉아서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다시 일 점 오 킬로미터쯤 걸어 방에 돌아와서는 외주처에 보낼 작업을 했고 작업이 잘 되지 않을 때나 작업을 마치고 다음 작업을 시작하기까지 한숨 돌릴 만큼의 시간이 남았을 때는 글을 써보려고 했다. 그런데 좀처럼 글이 써지지는 않았다. 한 줄도. 그럴 때는 약간의 미련을 느끼면서 텅 빈 문서 창을 바라보다가 곧 노트북 컴퓨터를 덮었다. 그러면 미색의 벽이 보였다. 빈 문서 창도 그렇게 바라보았던 것처럼 빈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운은 그래도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시에 온 것이 운을 둘러싼, 운을 지금껏 운이게 했던 모든 것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네, 라고 생각하기 위해서였던 것 처럼. 단과 만나지 않게 된 것도, 회사에 다니지 않게 된 것도, 모두. 어쩌면 운은 그건 자신이 이 시에서 마주치고 겪게 되는 모든 일에 대해 그렇게 생각할 준비를 이미 마치고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단이 단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그러나 단 자신은 아마 한 번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을 시기를 이 시에서 보냈기 때문이라고도.
   그때 단은 혼자였다고 했다. 지금의 운처럼.
   태어나서 이십여 년 간 살아온,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역에서 나름대로 유서 깊은 대도시였던 동네와 전혀 동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쯤 막 신도시로 개발한다는 소문이 들려오던 이 시에서 새로 자그마한 사업을 시작한 부모님의 일을 돕기 위해서 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은 다시 원래 살던 도시에서의 일에 더 집중해야 하게 되어서 실제로는 한 달에 한 번이나 이 시에 있는 집으로 와볼까 말까 했다고 했다.
   정말 뚝 떨어진 기분이었어. 이 시에서 지냈던 날들을 운에게 이야기해주면서 단이 말했었다. 어쨌든 나는 그때 학교도 쉬고 있었고 내 생활은 알아서 해야 하니까 그 동네에서 아르바이트했지. 마감 타임 담당이어서 가게 문 닫고 나서면 사방이 깜깜한데 인구밀도도 낮아서 지나다니는 사람 도 적고, 가로등도 몇 개 없고, 가게 지나서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치는 신축 건물들은 거의가 미처 매장이나 사무실도 들어오기 전인 공실들이지, 거기마저도 지나치면 길가 옆으로는 죄다 논밭들이고. 어느 날은 그렇게 어차피 아무도 없을 집에 가는데 문득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 같더라. 그래서 우두커니 서 있었어. 한참 동안.
   외로웠을까. 운은 그 시절의 단이 느꼈을 기분도 여러 번 상상했다. 아마 외로웠을 것이다. 단은 그때 외로웠더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운은 그때마다,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거나 혹은 그럼에 도 혼자서 뚜벅뚜벅 걸어갔을, 스물 몇 살이었을 단의 마른 어깨와 등을 상상했다. 상상했다기보다는 그 이미지가 운에게 떠올랐다. 그러면 가슴 깊은 곳까지 알 수 없는 아주 가볍고 산뜻하고도 뭉툭한 슬픔이 툭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운은 그 슬픔이 좋았다.
   그 슬픔을 따라서 이 시에 왔다. 운은 가능하다면 그 어깨와 등, 운이 알던 단의 것보다 얇겠지만 마찬가지로 단의 것일 어깨와 등을 잠깐 안아주고 싶었다. 더 이상 만질 수 없게 된 것들. 시간이 지나서 그때의 단은 지금의 단, 운이 알던 단이 되었으므로 더 이상 없다는 의미에서도 그렇지만, 이제 단의 이야기를 듣고서 상상으로라도 만질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단의 흔적을 상상하고 찾으려는, 그런 태도를 가지려고 하는 것은 운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즐거움이었다. 단에게 이 사실을 말할 수 있었더라도 말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단이 반가워 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만약 정말 그랬다면 그것은, 오로지 혼자서만 몰래, 비밀 있음의 사랑스러움을 즐기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그 사랑스러움으로 해서 단이 운에게 더욱 사랑스러워지는 기쁨을 조용히 누리고 싶어서. 운은 속으로 단에게 물었다.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날 주에게 했던 말과 똑같이.
   이런 마음이었어.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단?
   단이라면 어떻게 대답할지는 잘 모르겠다고 운은 생각했다. 운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이해의 수많은 결들과 그 결들이 엮여 자아내는 모양새들에 대해서 자주 고민하는 편이었고 고민 끝에 건져낸 몇몇 사소한 결론들 중에 하나는 이해와 오해는 결국 같은 말이라는 것이었고 그래서 오해라고 딱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라고 평소 생각해왔지만, 이를테면 주가 있지만, 주는 운을 가장 깊게 이해하고 그만큼 가장 날카롭게 오해하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그러니까 주는 운을 사랑하는 것이고 운은 주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단은? 그것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 단이라는 사람과 운이라는 사람 사이에 이해, 라는 단어를 놓는 일이 가능할까 단과 나 사이에 있던 어떤 것, 에 이해 같은 성분도 조금은 함유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정말 순수하게 알 수가 없다는 의미에서 까맣게 모르겠다. 모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은가? 하고. 그래도 즐겁다. 즐겁다는 것이 중요하다. 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단을 둘러쌌던 공기들, 나름의 고유한 질감과 밀도를 가지는 것만 같았던 공기들이 어떤 구름 같은 형체를 이룬 채 운의 곁에, 그러나 조금은 떨어져서, 떠다니는 것 같았다. 이 시에다 그 시절의 단이 남겼을 흔적 같은 것들은 지금 와서는 아무래도 잘 찾아지지는 않겠지만. 단이 말했던, 비어 있고 새로 지은 건물들에는 이제 가게며 사무실들이 들어섰고 여전히 논밭들이 있긴 했지만 단이 묘사하곤 했던 것에 비하면 분명 면적이 줄어든 상태인 것 같았다.
   모르는 시간 동안 줄어드는 것. 운과 단 사이에 있던 어떤 것 역시, 아마도.
   나 회사랑 헤어지기로 했어.
   운이 단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메시지로 보냈다. 메시지를 읽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는 채로 답신은 오랫동안 오지 않았다. 평소에도 단은 운의 연락을 자주 확인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너무 많이, 라고 느껴지는 시간만큼 기다렸을 때쯤 운에게 그런 생각이 찾아왔다.
   아. 이제는 왠지 더 이상 단을 만날 수 없게 될 것 같다.
   아니지. 단을 만날 수 없게 된 거구나.
   무언지는 그리고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단과 나 사이에 있던 어떤 것, 에게 무슨 일은 이미 일어나 있었던 거구나.
   답신 없는 메시지가 담긴 휴대전화를 가만히 내려다보면서 운은 자신에게 찾아온 생각이 시키는 대로, 이제 끝, 하고 발음해보았다. 정말로, 생각을 운이 한 것이라기보다는, 생각이 운의 머릿속 문을 열고 들어온 것 같았다. 노크도 없이. 그리고 그 생각은 머릿속에서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운은 단에게 놀라울 만큼 섭섭함이나 서운함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았다. 찾아올 것이 찾아왔다, 는 느낌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마치 단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전날 회사의 이사와 면담할 때, 마치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기로 했지만 예의를 갖추려 노력한 오랜 연인이 할 법한 말처럼, 운 씨가 적당한 시간을 가지고 회사와 정리할 준비를 하면 좋겠어, 라고, 그러면서 실은 이미 모든 것을 먼저 정리한 사람의 침착한 목소리로 이사가 말했을 때 들었던 느낌처럼. 그렇구나. 올 것이 왔구나. 나한테도 잘못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운은 적당한 시간, 이 얼마만큼을 말씀하시는 거냐고 이사에게 물어보고는 싶었다. 운에게 적당한 시간과 회사에게 적당한 시간은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묻지 않았다. 만약에 이게 한 편의 지어낸 이야기라면, 하고 운이 재빨리 상상해보았기 때문이다. 회사에게 적당한 시간, 내에 정리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고 설득력 있고 개연성 높은 전개일 것 같다고 운은 생각했다. 꼭 그 전개만 그런가?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이 운이라면. 운은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운이라는 사람이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
   아주 만약에 제가 정리할 수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면 사실 회사로서는 강제할 순 없는 거지. 그건 불법이니까. 만약 정 그러면 운 씨는 계속 다니는 거지만, 회사 입장에선 운 씨에게 의미 있는 업무를 맡기기는 어렵겠지. 그렇게 되면 회사의 이익이라는 측면에서나 운 씨의 커리어라는 측면에서나 서로 마이너스만 되는 셈이고. 그런 상황이 장기적으로 되면 모두가 불행하게 되지 않겠어?
   그러시군요.
   그런 상황이야. 이해하면 좋겠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번 찬찬히 생각해보고 조만간 다시 이야기 줘.
   실은 말씀 들으면서도 생각을 해보았는데요.
   어떤 생각을?
   지금이 중순이니까 이번 달 내로는 조금 무리일 것 같아요. 다음 달까지나 늦어도 다음다음 달 초순까지는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합시다. 차장 이하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번 달 끝나고 얘기하는 것으로 하고.
   네. 그, 좀 유감이게 되기는 했어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하긴 어떻게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회사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신경을 쓴 거야. 운 씨는 성실한 사람이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렇게 너무 애쓸 것까진 없어요. 그래도 이게 회사나 운 씨를 위해서나 장기적으로는 더 좋은 일일 거야. 모두가 좋은 쪽으로 빠르게 결론 잘 냈어.
   면담이 끝나고 사무실의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운은, 자신이 운이라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를 테면 주라는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되면 어떤 전개가 가장 그럴듯한 전개였을까 생각했다. 정리할 수 없다고 했을까. 아니면 정리하더라도 자신의 마땅한 권리를 멋지게 주장했을까. 혹은, 단이라면? 단이라면 아마 회사의 까마득한 상사와 이런 대화를 나누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단에게 생각이 미치자 운은 단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평소보다도 더 간절하게. 그렇지만 그 간절함이 그다지 좋은 신호로는 느껴지지 않았으므로 운은 하던 일을 마저 했다. 퇴근하기까지 약 한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한 시간쯤 후에 운은 사무실을 나섰다. 다음날에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간에 출근해서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집중도로 일을 하고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로 동료들과 가끔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다시 퇴근하다가, 단과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라는 마음이 또 다시 운에게 들었고 그래서 하루가 지난 뒤에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운의 생각에 단은 평소처럼 조금 느리게 메시지를 확인할 거였고, 늦더라도 답장은 꼭 할 거였고, 아마도 그 답장이란, 그렇구나, 일 거였다. 운에게는 메시지에도 단의 목소리가 묻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구나. 운은 단이 운에게 그렇게 말해줄 때의 발음이나 그 순간 특유의 목소리 톤이 좋았다. 운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 지금껏 운을 운으로 있게 했던 그 모든 일들, 그것들이 일어난 것, 일어나서 그런 채로 있는 것, 그런 것, 이라고 하는 느낌이어서. 그러면 무언가가 그냥 가만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렇구나.
   답을 기다리는 내내 운은 반복해서 생각했다. 나는 받아들이고 싶다 모든 것을. 정말정말로 받아들이고 싶다. 그러니까 단이 그렇구나, 하고 답장을 보냈으면 좋겠다. 그렇구나, 라는 한 마디가 운에게 단이 하는 마지막 말이더라도. 그러자 운은 자꾸 상상을 하게 되었다. 단으로부터 말이 없는 이 상황조차 단에게 말하는 상상을 하는 스스로가 조금 어처구니없게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무엇인가를 확인한다는 기분으로 이런 대화를.
   단, 단이 나를 그만뒀어.
   그렇구나.
   응. 그렇구나.
   여기까지 상상하고 나니 운은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운 마음속의 어떤 제자리로 차곡차곡 걸어 들어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조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작게 소리 내어 이런 말을 덧붙여보았다. 뭐 나쁘지 않네. 운은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나쁘지 않아. 나쁘게 된 일은 나쁘게 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를테면 회사와 헤어지게 된 것이 그렇지만 나쁘게 된 일의 나쁨을 받아들이는 일은 나쁘지만은 않다, 하고. 단과 만나지 않게 된 것도, 이상하다, 나쁘지 않다고. 분명히 운은 단을 오래오래 그리워하게 될 것인데 안심하고 그리워하기만 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다고. 왜냐면 운은 만약 주가, 단이 운에게 좋은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대답을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운은 주에게 말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없는 말을 지어내서 해버리면 많은 것들이 무색해지니까 그래도 운에게 좋은 것과 운이 스스로 좋은 것은 아주 많이 다른 일이니까. 서로 다른 일을, 운에게 좋은 일과 운이 좋은 일을 따로따로 할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운은 회사와의 정리 기간을 보냈고 퇴사일이 이 주 정도 남았을 때쯤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는 것을 확인하려면 운 자신이 가장 자주 생각하곤 했던 단의 모습, 어디에도 없어서 오히려 괜찮을, 단이 그 시기에 남기고 온 흰 그림자 같은 것을 확인하러 가야겠다고. 만약 그런 것들이 그곳에 남아 있어서 확인이란 걸 해볼 수 있다면.
   단은 이 시에서 지낼 때 그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단이 알았을 수도 몰랐을 수도 있었겠지만 운은 알 수 있었다. 단이 그렇게나 이 시에 관해 많이 말했던 것은 단이 그만큼이나 자주 그 사람에 관해 많이 말했기, 혹은 적어도 말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단은 밤 열한 시에 매장의 마감을 마치고 약간의 으스스함과 불안감과 그것들 때문에 느껴지는 초조함 그리고 쓸쓸함과 공허감이 뒤섞인 기분으로 외진 밤길을 걸어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서 아무도 없기 때문에 사실상 어느 방에나 들어가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자기 방, 으로 되어 있는 방에 들어가고는 방에서 그 사람과 새벽에 가까운 시각이 될 때까지 대화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말들을 나눴다고 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왜 그렇게 할 말이 많았을까 몰라 다 바보 같은 말이었는데. 바보 같다니 왜 그렇게 생각해. 실제로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이랑 그렇게까지 친해져서 하는 말들이 다 바보 같지 그럼. 단이 그렇게 말했고 그 말에 운이 다시 말했었다. 왜, 좋았을 거 같은데, 원래 그런 것들이 사랑스럽잖아.
   온라인에서 만났고 얼굴은 사진으로만 봤던 사이. 가끔 통화를 하고. 운은 그 사람이 어떤 분위기의 얼굴이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물었다. 좋은 사람이었어? 운이 물은 적이 있었다.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지. 진짜 얼굴은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어. 실제로 만나면 무슨 일 당할 수도 있는 거고. 나한테 무슨 일을 하려고 가까워진 건지도 모르고. 그럼 이런 건 어땠어. 뭐가. 단은 그 사람이 좋았어? 단은 잠시 생각에 잠기느라 침묵하다가 대답했었다. 아마 그럴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는 단이 약간은 낯설고 무척 골똘해 보인다고 운은 생각했었고 아주 먼 나중에 다른 누군가가 단에게 운을 알면서 모른 채 그렇게 묻는다면 단이 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까 상상했는데 어떤 대답도 그럴듯하게 상상되지 않았다. 단. 그래서 운은 대신 단을 불렀었다.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뭔데? 손 잠깐만 잡고 있자. 그러자 단이 운의 손을 잡아주었다. 운은 단의 손을 잡은 채로 생각했다. 그 사람은 단의 손을 잡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렇지만. 가장 단이 가장 연약했던 시간과 공간은 그 사람이 알고 있다. 혹은 단이 가장 연약해졌던 사람은 그 시간과 공간이 알고 있다. 그중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공간뿐이니까. 그 공간을 좋아할 수 있게 된다면 회사와 헤어진 것도 단이 운을 그만둔 것도 그러니까 그 모든 것에 대해서 정말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운은 생각한 것이었고 그래서 이 시에 온 것이었는데 그냥 놀러온 것도 아니고 일 년은 살 작정으로 원룸 월세 계약까지 한 것이었는데 날마다 일 점 오 킬로미터씩 걸어 호수에 가서 호숫가를 빙 둘러 산책하는 것이었는데 짬짬이 글을 쓰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는데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아도 나쁘지 않네 하고 생각하는 것이었는데
   나쁘지 않지 않게도 생각처럼 잘 되지는 않았다. 나쁘지 않지 않다는 것은 운이 이 시에 와서는 아마도 거의 처음 해보는 생각인 것 같았다. 생각처럼 잘 되지 않는 것도 나쁘지 않네, 라고 생각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운은 호숫가를 달리면서, 평소처럼 걷다시피 천천히 달리는 것이 아니라 숨이 찰 정도로까지 달리면서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기는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이었고 가쁜 숨 사이로 주가 했던 말을 떠올리게 되었다. 정말 너처럼 나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아마도 그게 너를 나쁘게 만든다고 생각해. 나쁘지 않은 것은 나쁘지 않기 때문에 나쁘게 된다는 주의 말. 운은 운을 나쁘게 만들고 있나? 운은 점점 더 나빠지나? 운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운일 수밖에 없는데 운인 나는 내가 운인 채로도 뭔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그게 나쁘지 않아서 나를 나쁘게 만드는 거라면 그러면 어떻게 하나? 생각은 점점 더 가빠졌고 운은 이제 생각에 겨워서 달리는 속도가 점점 더 천천해지다가 자세만 달리기 자세일 뿐 오히려 걷는 것보다도 느려지다가 결국 거의 멈췄다가
   그때
   잔잔했던 호수의 수면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운은 방금 자신이 감지한 것을 되새겨 보느라 정말로 멈춰섰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역시 멈춘 호수의 하늘 위로 새가 날았고 점점 작아졌다. 어떤 새가 물에 거의 닿을락 말락 하게 낮게 호수 위로 날아가다가 새의 발끝이 물을 스친 것 같았다. 그렇구나. 이 호수 위로도 새들이 날아다니는구나. 운이 방금 보기 전까지 새가 한 마리도 호수 위를 날아다니지 않았을 리는 없었는데, 운은, 나 여기서 새를 본 게 처음이야, 라고, 호수가 움직이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매일매일 호숫가를 산책했는데도. 수면에 늦겨울의 햇빛이 부서졌고 그래서 수면은 처음에 운이 상상했던 것처럼 흰빛이었고 고요했다. 그러나 방금 전까지는 고요하지 않았다.
운에게 두 가지의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다.
   방금 일어난 어떤 일, 에 대해 이름을 붙여야 할까 붙여야 한다면 이름을 붙여야 할까 이름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단과 나 사이에 있던 어떤 것, 처럼. 하지만 이름이 없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리고
   오늘은 방에 돌아가서 산책 기록을 쓸 수 있겠다 호수 위로 새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써야겠다 새가 날아가서 물에 파문이 그려졌다고 써야지 그러나 너무나 길게 쓰지는 말아야지 그걸 다 쓰면 주에게 편지를 써야지 이런 말로 시작하는 편지를. 사랑하는 친구 주에게. 주. 주는 나에게 나처럼 나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했지. 하지만 주. 고백할 게 있어. 나는 사실은 나쁠 수 있고 나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야. 싸우기 싫은 거 아니냐고 했지. 싸웠으면 좋겠다고 했지. 하지만 사랑하는 주, 주에게는 주의 싸움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싸움이 있어 이미 있어 아주 작고 미세하고 알아보기 힘들더라도 말이야 그렇더라도 주도 싸우는 것이고 나도 싸우는 것이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주를 사랑할 수 있고 주는 나를 사랑할 수 있지. 사랑해 주. 아주 많이. 그리고 네가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는 것을 믿어. 놀러와. 사랑하는 친구 운으로부터.
   그리고 편지도 다 쓰고 나서도 뭔가를 쓸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진짜로 소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어낸 이야기,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 믿지 않아도 상관없는 이야기, 그래서 순도 백 퍼센트 거짓말이어도 되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서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그 어떤 일, 안에 진실이 들어 있는 이야기. 작고 작은, 눈으로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진실. 고요하고 넓고 희게 빛나는.






실명/이한솔
1992년 인천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출판편집노동자다. 창작노동자도 되고 싶다.
iciens9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