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혀 당황스러울 일이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그간 모두 수고했고 이제 한 학년이 무사히 끝났으니 사물함을 비우자고 하셨을 뿐이다. 사물함으로 가서 안에 있는 걸 다 챙긴 다음 가방에 옮겨 담으면 된다. 하지만 당황스러움은 갑자기 투명망토를 벗은 양 나타나 손을 흔들고 있었다. 자물쇠가 참 크고 무겁다. 원래 이랬던가?
문을 여니 다른 질감의 공기. 그리고 정중앙에 놓여있는 흐물텅하게 모양이 뭉개진 우유갑. 터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꺼내자 교실에는 약간의 주목과 소란. 시선과 깊어가는 수수께끼. 범인은 나. 누구한테 피해준 것 없으니 사건은 아니다. 탐정이 없으니 자백은 하지 않을 거다.
운동장에 몰래 핀 들꽃들. 공놀이하며 지르는 거친 소리. 창가 쪽 복도와 계단 구석에도 사람들이 모여있다. 재밌게 본 무언가에 관해 떠들며 키들대는 소리. 지금 행복한 저들도 어쩌면 언젠가 슬퍼질 것이다. 나처럼. 지금 들리는 건 소리뿐. 풍경을 묘사한다고 해서 곧바로 머릿속에서 떠오르진 않는다. 눈 앞에 펼쳐지는 뿌연 세계. 소매로 눈을 비비고 있다.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것 같다. 실제로는 그런 계절은 아니다. 우윳빛 흐린 세계에는 눈 결정 같은 것이 잔뜩 맺혀있다. 안경을 벗고 본 세계와 닮았다. 미술 시간에 몇 번 그려보려고 했던 앙상한 풍경. 실패한 이후의 세계. 하지만 무엇을 실패했단 말인가? 눈물에는 색이 없다던데. 눈앞은 쨍하게 하얗다.
2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깨로 턱을 닦는다.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두 번.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몰랐나? 숙제를 미루는 감각과 비슷하나 더 허망하다. 숙제를 미룰 때는 분명히, 모든 걸 해결해줄 버프가 걸린 미래의 내가 있는데. ‘어떻게 잘 되겠지’와 '망했다'에서 줄다리기하며 속도와 집중력이 엄청나게 상승한 나.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예약 주문한 눈물이 지금 배송되었을 뿐이야. 배송사고가 없어서 다행이네요. 리뷰 적어드릴게요. 사진도 첨부하면 적립금을 더 주시는 거죠. 수령 확인했고 구매 결정 버튼도 눌렀습니다. 아주 잘 나오네요. 양도 많이 주셨다. 와! 이 감정은 정말 맛이 있어요. 모두가 좋아하겠어요.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재구매 의사는 없습니다.
인형 뽑기 장인처럼 고리를 만들어 꼭 쥔 손가락은 흐물흐물한 우유갑을 들고 있다. 용케 터지지 않는다. 화장실로 향하는 길이 참 멀다. 쭉 걸어가서 살짝 어두워지는 곳, 양치질하는 수도를 지나치면 되는데 멀다. 모르는 사이에 경사가 생겼나? 학교가 기울었나? 숨이 차고 힘이 드네. 멀어. 학교가 참 넓다. 주변에 소리가 참 많다. 다른 손으로 눈을 훔친다. 잠깐씩 맑아진다. 양 볼이 쓰라리다. 빨리 거울을 보고 싶은데 거울을 보면 거울을 보는 내가 보이겠지. 웃기면 어쩌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입이 찢어지라 웃는 자신을 상상한다.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우유를 조심스럽게 뜯는다. 미끄덩하고 열린다. 주둥이는 눅눅하고 보푸라기가 일어났다. 고약한 냄새가 처음으로 후각을 일깨운다. 한때 우유였던 액체의 냄새. 우유갑 한 귀퉁이가 출렁거리며 노랗게 물들어있다. 슈크림 같다고 생각했지만 만지면 폭발할 것 같아서 겁이 난다.
이제 교실로 돌아가자. 별일 없을 것이다. 학교는 늘 사건으로 가득하다. 상한 우유가 등장하는 건 작은 소동이다. 이런 일로 누군가 혼나는 건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어진 종업식을 참고 집에 늦게 갈 만큼은 아니다. 운이 좋다면 자연스럽게 하교로 이어질 것이다. 어서 돌아가자. 사물함을 비우는 건 마음을 정리하는 것의 은유가 아니다. 매사를 다른 의미와 엮지 않아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또한 억세게 엮이고 싶다. 이 일은 잊힐 것이다. 미래의 용맹한 고고학자가 과거를 쫓지 않는 이상 잊히는 일. 미래의 나에게 쪽지. 진로를 고고학으로 잡지 않기를. 지금 경고했으니 잊지 마라.
결국 어떤 것도 완성할 수 없었다. 이 생각은 과장이지만 여전히 진실이다. 생각을 미뤄라. 다음으로 미루어라. 사랑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때까지. 강렬한 냄새가 아직 몸을 감싸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을 들고 가는 시간은 괴로웠다. 마음이라고 부르지 마. 그건 우유일 뿐이야. 걸어가는 발걸음이야말로 마음이야. 우유는 또 받을 수 있어. 바닥에 쓰인 숫자는 달라지겠지만.
정말 그렇게 말하고 넘어갈 생각인가. 혼란한 와중에도 보였다. 목격했다! 반짝반짝 반짝반짝 반짝반짝하는 그 애의 눈을. 그 시선은 여기 화장실까지 따라붙어 있는 것 같다. 헨젤과 그레텔이 흘린 과자를 숲속 동물이 추적하듯, 길을 찾은 시선은 교실에서 화장실까지 이어지는 은하수를 생성한다. 아름다운 상황이었다면 좋았을걸. 이제 상상에서 돌아와야 한다. 걸쭉한 우유를 가만히 흘려보낸다. 탁하고 끈끈하다. 은하수와 조금도 닮지 않았다. 우유갑은 쓰레기통 깊은 곳에 버렸다. 이 모든 게 하나의 의식인 양 복잡한 인을 맺듯이 손 모양을 바꾸어가면서 손을 씻었다. 배수구로 흘러가는 노란빛의 초록 걸쭉한 덩어리진 우유는 고무찰흙 같아서. 그 순간에도 다만 그 애가 기쁘고 즐거웠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좋은 사람인 척하는 거야. 너 결국 거울 앞에서 조금 웃었지? 스스로 우는 얼굴을 보고.
3
처음을 기억한다.
타피오카 밀크티 좋아해? 타로는 너무 고소해. 근데 요즘은 많이 없어졌더라. 엄청나게 좋아하는 가게가 있었는데 옷가게로 변했어. / 나는 먹긴 하는데 좀 징그럽지 않아? 그래서 뚜껑만 보면서 먹어. 밑에 개구리 알 같잖아. 그런 공포증이 있대. / 환공포증? 그거 사실 누가 만들어낸 거라고 하긴 하는데 진짜 징그러운 걸 어떡해. / 그거 햄버거 패티 아랫부분이 더 심한 거 알아? 구멍을 여러 개 뚫어놓거든. 그리고 개구리 알 아니야. 카사바 녹말로 만드는 거야. 가루로 만들어서 만드는 거랬는데. 소주도 카사바로 발효시켜서 만든대! / 카사바가 뭔데? / 고구마 같은 거. / 너 위키에서 읽었지. 완전 위키 읽고 말하는 거 같아. / 근데 중요한 정보도 많이 있어. / 요즘은 슈크림 라떼랑 수박 주스가 맛있어. / 그거 크림 섞어 먹어야 해? 나는 아직도 어떻게 먹는지 모르겠어. 따로 주면 안 되나? / 만들어 주시는 분께서 진상이라고 그런다? / 수박은 갈아서 만드는 것보다 착즙이 씨가 없어서 좋아. / 나는 씨 먹어도 괜찮아. 삼키면 돼. / 수박 줄무늬를 따라 자르면 씨를 골라내기 쉽대. / 갑자기 딴 얘긴데, 미안. 아보카도는 우리나라에서는 열매 안 맺는 거 알아? 1년 정도 길러봤는데 계속 시들시들하길래 찾아보니까 그렇대. / 아 진짜? 아쉽다야. 맛있는데 아보카도. / 너 영혼 어딨어? / 잠깐 집에서 쉰대. 지금 아바타 상태야. / 영혼으로 잠깐 빠져나갈 수 있으면 콘서트 그냥 갈 수 있는데. / 요즘 걔네 투어 안 하잖아. / 그러니까 영혼만 모아서 하는 거지 / 그럼 나는 1열보다 더 앞으로 갈 거야 / 걔 저번에 우유 광고하던데. / 걔라니 니가 뭔데. / 나는 그냥 흰 우유가 좋아. / 나는 너무 차갑게 먹다가 배탈 나서 그 뒤로 잘 못 먹어. / 소화 안 되는 거 아니야? / 그건 아니던데. 저번에 놀러 갔을 때 마셨잖아. / 근데 오래 놔두면 어떻게 될까? 흰 우유. / 썩겠지? / 양파 저번에 기르던 거 있잖아. 너네가 기르던 거에 곰팡이 피었잖아. / 곰팡이가 꽃이야? 피게. / 피었다고 하는 거 맞거든. / 우유 오래 두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보고 싶다. / 청소하면서 어디 숨겨두면 안 되나? / 누가 해주면 진짜 좋을 텐데. 마니또처럼 / 마니또는 뭐야? / 이모가 알려줬어. 너 몰라? / 나 교회에서 들었어. 바자회 할 때 돈 대신 쓰는 거지? / 그건 달란트야. / 흰 우유에 곰팡이 피면 그냥 하얗게 되는 건가? / 냄새날 거 같아 / 부패하는 걸 보는 것도 재미있잖아 / 흉하잖아 / 하지만 양파도 잘 기른다고 해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영원히 책임질 수는 없으니까. / 외국의 청어 요리가 냄새 엄청 심하대. / 그것도 위키에서 읽었어? / 아니 밤에 티비에서 봤어.
문제) 다음은 우리가 교실에서 하염없이 떠들 때의 기억이다. 다음 중 내가 좋아하는 애가 한 말을 고르시오. (5점)
해설) 시험 문제가 아니니까 비슷해도 맞다고 해줄게. 내가 한 말은 찾지 않아도 괜찮아.
따뜻한 교실에서 우리는 편안하게 수다를 떤다. 수다는 단체 줄넘기 같아서 친한 정도와 상관없이 누군가 들어갔다가 나갔다가 하며 대화를 나눈다. 한 번 걸리면 잠깐 놀려주고 다시 이어간다. 그래서, 누가 어떤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네.
물론 거짓말이다. 나는 그 애가 한 말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드벤처 게임에서 상호작용할 수 있는 아이템만 하이라이트로 빛나게 하는 기능처럼 훤히 보였다. 게임보다 더 예쁜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네가 없다면 학교는 너무 불편했을 거야. 나는 인터페이스가 불친절한 게임은 잘 못 하거든. 학교는 편안하지 않아. 솔직하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들의 사회에 질렸어. 사실 편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집에는 침대라도 있으니까. 왜인지는 모르지만 너는 눕는 것 다음으로 나를 편안하게 해. 네가 빛나는 길잡이가 돼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한시름 놓았어.
어느 수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모두 나가는 틈을 타서 사물함을 열고 안에 있던 물건을 전부 꺼내 가방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 우유 한 팩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방금까지 사물함은 나의 영토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깨끗하게 존재하는 가장 마음 편한 곳. 휴대용 방이었다. 이제 나는 성유물을 모시는 작은 성전을 지키는 임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신앙을 위해서는 냄새를 가려야 했다. 그래서 청소 시간마다 탈취제를 듬뿍 뿌렸다. 치즈도 아니고 위스키도 아니다. 참나무통에서 숙성시키는 것도 아니다. 사물함은 진짜 나무로 만들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넷플릭스에서 보았는데 우유를 많이 저어서 만드는 인도 요리가 있다고 한다. 조금씩 저어두고 싶지만 가능하면 미개봉 상태로 보여주고 싶다. 기다림은 속 썩이는 과정이었고 이 말은 너무나 안일하다. 우유가 여기 있고 마음도 고이기 시작했다. 매일 좋아하는 사람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하는 생각이 아닐지 모른다. 언제나 빛나고 있어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라고 표시되는 걸지도 모른다.
4
우유 관찰일기 1일째. 날씨 맑음 : 오늘부터 관찰일기를 적으려고 한다. 우유는 유통기한이 지나도 꽤 오래 간다고 하니까 우선은 보름 정도 두면 되겠지? 상태가 괜찮으면 한 달쯤 두면 되고. 요즘 날씨는 나쁘지 않다. 밖에서 관측할 수 없으니 모르겠지만 아직 싱싱할 것이다. 상자 안의 고양이 실험이 생각나지만 그 얘기를 구체적으로 들먹이고 싶지는 않다. 어떤 고양이도 슬프지 않아야 한다. 마피아 게임의 사회자가 된 기분이다. 자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사회자만 하고 싶어 하는 애도 있긴 하겠지만. 아니. 이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우선은 그 애한테 비밀로 해야 한다. 만났을 때 뭐라도 말하기 시작하면 결국 다 말해버리니까 그러면 안 된다. 그 애가 힌트를 달라고 하면 당연히 그 이상을 주고 싶어질 것이므로. '~이므로'를 처음 써 본 것 같다.
관찰일기 2일째. 약간 흐림 : 아무래도 냉장고에 두는 것보다 싱싱하진 않겠지. 잠깐 불안해졌다. 안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내부의 우유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그런 걸 믿는 건 아니지만 혹시 모른다. 나쁜 마음을 먹는 거로 우유 성분에 뭔가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 수 없다. 강한 믿음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무언가를 믿는 건 쉬운 일이 아니고, 그래서 옛날부터 잘 믿어낸 사람이 칭송받는 것이겠지. 괜찮을 거야. 적당한 때에 꺼내봐야 하는데. 하지만 이상하다. 어차피 사라질 운명이라면 좋은 마음을 먹고 건강한 감정을 주어 조금 더 오래 살게 하는 것에 어떤 의미가? 아니, 밤에 쓰고 있어서 마음이 들뜨고 이상한 말을 하게 된다. 내일 아침에 찢어버려야지. 그래서 거실과 내 방 휴지통에 나눠버려야겠다.
관찰일기 3일째 :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보았다. 내가 강하게 믿거나 믿지 않는 것에 의미는 없을 거다. 내가 아무리 무언가를 빌어봤자 그 애가 원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상하든지 말든지. 그냥 기다려야지. 그러니까 우유는 자신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애가 희망하는 어떤 모습이 있다면 그게 우유의 변화와 겹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이건 이거대로 믿어 볼 수 있는 문제다!
관찰일기 4: 지난 며칠 열어보지 않아서 관찰은 없다. 그리고 이 기록은 어디 보여주지 않을 거니까 필요한가 고민이 된다. 그 애랑 얘기하면 드문드문 내 비밀 계획을 말하고 싶어진다. 종종 말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다. 그럴 리 없는데. 내 마음이 보여주는 착각일 것이다. 뛰어난 스파이는 30년 넘게 신분을 숨기기도 한다는데 나는 안 될 것 같다.
관찰 5: 결국은 사물함이 아니라 내 마음을 살피게 된다. 그게 제일 잘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착각이라면 나는 평생 영문을 모르고 살 것이다. 누가 내게 무언가를 물어볼 때마다 어리둥절할 걸 상상하니 좀 웃기네. ‘예? 잘 모르겠는 것 같아요. 특별히 좋아하는 거 없어요. 그냥 두루두루 다 괜찮은 것 같아요.’
찰6: 괜찮을까? 의욕이 떨어지는 게 약간 빠르네. 그래도 일주일은 채워야 하지 않을까? 한 줄이라도 좋으니 매일 쓰기.
7: 오늘은 사실 보름 정도 지났다. 보여줄 거야? 아직. 아무리 좋아해도 매일 일기를 쓸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사람이라도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다!
5
학교 뒤뜰의 사루비아꽃을 보면서 그 애 생각을 했다. 아주 어릴 때는 사루비아꽃의 꿀을 맛보곤 했는데 별로 깨끗하지 않은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화단 뒤에 찻길이 바로 지나고 있으니까. 그리고 저번에 어머니께 받은 스테비아 화분이 있으니까 괜찮다. 그건 설탕 대신으로도 쓸 만큼 달콤하다고 했으니까. 많이 길러서 빵이나 과자를 구우면 어떨까? 흰 우유랑 잘 어울리는 거로. 어차피 초콜릿 선물도 녹였다가 다시 굳히는 건데. 차별화가 되면 좋다. 돋보이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아닌가? 사랑이 모두 운명적으로 이루어질 거라면 자연스럽게 사람은 빛나 보이는 거 아닐까? 그래도 잘 보이려고 노력은 해볼 수 있지. 의외로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은 적은 것 같다.
가만히 생각하면서 뒤돌아 서 있었는데 한 커플이 피시식 웃으면서 지나쳤다. 운동장을 천천히 크게 돌고 있는 모양이지. 그렇다는 건 쟤네 반 애들이 창문을 빤히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둘이 지나가는 궤적이 궁금해서 말이야. 그냥 타원인데. 쟤는 왜 쟤랑 만나는 걸까? 쟤는 어릴 때 같이 놀았는데 별로 즐겁지 않았다. 내가 만든 놀이를 자기가 만들었다고 우겼기 때문이다. 표절이라니! 뉴스에서나 보던 일을 직접 겪으니까 너무 놀랐는데, 쟤가 사귄다고? 다른 흐릿한 애도 아니고 쟤가 쟤랑? 아니지. 누구를 흐릿하다고 생각하는 건 나빠. 근데 또렷한 게 마냥 좋은 건 아니잖아? 우리는 어쩌면 아주 오래 살 건데. 누군가는 흐린 기억으로 남겨두어야 할 테니까.
언제나 모든 걸 기억하고 있으면 얼마나 괴로울까? 마음이 아프다는 감각은 소름이 끼치는 것과 닮았다. 털이 곤두서는 느낌이야. 뭐가 저리 좋을까? 작년에 한 친구는 누군가와 헤어져서 상담도 받고 그랬는데. 엄청나게 크게 말하고 다녀서 모두 알았다. 나도 매점에서 사탕을 하나 사서 주었고…. 성적도 갑자기 떨어져서 너무 마음을 다쳤구나 싶었다. 한번 짝이 되었었는데 책상에 둘의 이름을 살짝 새겨둔 낙서가 있었다. 헤어지고 나서는 긁어서 지웠고. 근데 미술 시간에 다 같이 만든 작품에 몰래 압정으로 이름 새기는 것도 우연히 봤다. 그건 결국 못 지웠겠지. 선생님이 코팅해서 1층 벽시계 옆에 전시해놨으니까. 이따 한 번 보러 가야겠다. 기록이 남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 그래도 알 것 같아. 몰래 자랑하면 뭔가 개운하잖아. 분식집 벽의 낙서처럼. 나는 볼 때마다 슬퍼지지만, 쓰는 사람은 개운했겠지.
사람은 만나면 헤어지는 거야~ 우리는 상처를 주는 것을 사랑하는 거야~ 시작하지 못하는 게 행복한 거야~라고 생각은 늘 하는데, 마음 같지는 않지. 헤어지면 다시 만나면 되는 거야~ 가 안되니까. 좀 더 나이가 들면 이런 생각을 안 하고 살 수 있나? 아! 우유는 잘 있겠지? 언제든 열어봐도 상관없는데 괜히 나중으로 미루고 싶단 말이야. 자다가 깼을 때 바로 화장실 가면 좋은데 안 가고 버티는 것처럼. 으 진짜 비유 별로다. 어디 가서 말하지 말아야겠다. 오늘 밤은 양치질하고 나서 물 마시지 말아야지.
6
사물함에 넣어둔 우유를 깜빡하고 완전히 잊어버리게 된 건 흔한 이유였다. 지금 뭔가 떠올랐다면 정답! 더 근사한 사연이 떠올랐다면 언젠가 알려주길 바란다. 예전에는 라디오나 잡지에서 사연을 뽑아서 항공권을 주기도 했다는데. 정말 여행 가고 싶다. 하여간 비행기를 타고 싶다. 덜컹거리면서 무사히 착륙하면 완전히 다른 환경. 날씨와 문화. 신나겠지.
요 며칠간 매일 그 애 책상에 놓여있던 요구르트, 그거랑 종종 밀키스가 놓여있었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양을 떨고 있군. 반 애들은 뒤에서 몰래 휘파람을 불어댔지만, 교실은 좁으니까 다 들렸지. 휘유~ 휴~ 흥…. 나는 속으로 엄청 궁시렁댔다. 그래서 쟤는 도대체 누구야…. 몇 반이야? 정말 방해가 되네. 거기 햇빛이 가려지니까 좀 비켜주지 않을래? 내가 좋아하는 애 책상에서 시시한 음료수를 거둬가라고. 윽 시시해. 어이가 없네. 싫어 죽겠는데 멱살 잡을 빌미도 없고.
꼬투리를 무시무시하게 잡고 싶었다. 그 애의 책상은 허브공항이 되었다. 무역이 활발해지고 거래 가능 물품이 늘었다. 일방적으로 두고 가는 거지만. 일주일쯤 지나자 음료수를 실어나르던 낯선 손바닥이 그 애의 책상에 무사히 착지했다. 어떨 때는 팔꿈치도 착지했다. 매일 매일 무역이 활발해졌다. 종종 한 쪽 엉덩이가 착륙하기도 했다. 어쩌지. 조마조마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힐끔거리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낯선 손바닥에 그 애의 손바닥이 조용히 착륙하는 걸 보았다. 두 비행기는 꼬옥 포개어지며 우주선이 되었다. 우주 시대의 개막이다. 이제 포개어진 우주선은 더 넓은 공간을 날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눈에서 피가 난다. 아, 아니구나. 놀래라. 눈앞의 이상기후로 중계는 이만 마칩니다. 언제 흘렀는지 모르는 눈물의 커튼콜. 고개 숙여 인사, 암전. 암전이라고 연극처럼 막이 내려가는 것은 아니고 눈을 감았을 뿐이다. 댐을 좀 막아야겠거든. 나 자신을 너무 가엽게 여기면 자기 연민한다고 놀림당하니까 명상하는 척해야지. 자기 연민이란 거 생각보다 뻔한 거라면서? 남들도 다 하는 거래. 자, 불가사리를 생각하세요. 멍게도 괜찮습니다. 이것은 수세미가 됩니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난데! 왜 내가! 또 나만!'하고 떠오르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하지만 꼼꼼히 지웁니다. 참나원참나.
주말에 도서관에 가면 더 괴로울 거 같아서 카페에 갔다. 잘 모르는 난해한 음료를 먹고 싶었다. 터메릭 골든 라떼를 주문했더니 천원을 더 내면
1) 소이○○, 아몬드○○, 오트○○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종류가 참 많네. 그렇지. 경험에 돈을 쓰는 게 값진 일이지. 하며 아몬드○○로 바꾸었다. 노랗고 걸쭉한 음료가 나왔다. 건강한 맛이었다. 하지만 맛은 건강과 예로부터 별로 친하지 않다. 그런데 강황 맛은 카레 맛이랑은 또 다르네. 좀 앉아있다가 친구네 부모님이 하시는 편의점에 들러서 음료를 샀다.
2) 딸기○○, 초코○○, 민트○○, 민트초코○○, 커피○○, 멜론○○, 캔디바○○, 달고나○○, 호박고구마○○, 바나나○○, 단밤○○, 아주 드물게 수박○○도 있었다.
3) ○○부단한 성격은 고치기가 힘들다. 다른 진열장에 있는 레모네이드를 샀다. 더울 때는 상큼한 게 입맛을 살리는 데 좋다. 그러고보니 집에 땅콩버터가 들어간 시리얼이 있었지.
5) ○○에 타마시는 것보다 한 줌씩 털어먹는 게 맛있다. 미숫가루는 조금 미지근한 물에 타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좋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단어를 새로 배운 꼬마가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버내너! 터메이러!
6) 미읅! 이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미역? 미억인가. 최면에 걸리면 이런 상태일까? 엄청나게 잊어버린 것 같은데 그건 달리 말하자면 굉장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몰라, 모른다고. 모든 걸 완전히 잊어버렸다. 모든 기억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그 애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 애로 이루어진 구름이 걷히고 난 머릿속은 빠르게 잡동사니로 채워졌다. 그건 의지와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과거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자는 그저 지금, 아주 조금 더 안정된 마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문제) 1~6번에 대체로 필요한 단어는 무엇일까요? 영어와 한글 모두 정답입니다. (2점)
해설) '주스'는 오답이에요. 답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됩니다. 무언가를 억지로 잊어버리려면 꽤 집중해서 생각해야 한단 말이에요.
7
이것은 내 기준으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좋아하는 드라마의 후속편이 몇 년 만에 나온다고 해서 오랜만에 정주행을 했다. 예전에는 재밌었는데. 다시 보니 심드렁했다. 배우들의 조금 더 젊은 모습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생각했다. 그때처럼 재미가 없었던 건 그 이후의 내 삶이 풍족했기 때문이리라. 놀랍고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좋다. 어떤 추억은, 티백을 넣어 오래 냉침한 사이다처럼 향이 옅어지는 것으로 좋다. 하지만 다른 부분이 나를 놀라게 했다. 드라마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던 것이다. 유명한 대사는 잘 기억이 났는데 전혀 모르는 인물이 꽤 비중 있게 등장하기도 했다. 가장 큰 숙적이 큰 굴욕을 맛보는 그 장면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종업식 때가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은 그럼 얼마나 남아있는 것일까? 그때의 나는 얼마만큼 여기 스며들어있는 것일까.
요란을 떨며 우주 시대를 열었던 그들은 오래 가지 못하고 방학 조금 지나서 헤어졌다. 기껏해야 공물로 연명하는 수준이었던 거지. 그때는 슬펐으니까 조금 거칠게 말하는 걸 용서해주길. 금방 헤어지고 결국은 나와 만나고 있다. 예? 와~ 억지다. 날로 먹네. 이거 다 망상인 거죠? 소설 쓰지 마세요. 아니, 사귀기 전이 달달한 것 아닌가요? 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하지만 진실이다. 내가 남들한테 거짓말을 왜 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우유가 우리 사이를 더 견고하게 엮어준 건 아니지만 농담거리는 됐다. 밥을 먹고 나면 우리는 운동장에 큰 원을 그리며 걷는다. 우리 반 창문을 힐끗 보니까 아무도 창밖을 바라보지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남의 일에 관심이 없는 친구들이라 다행스럽다. 내 옆에 함께 걷는 애는 뒤뜰에서 내 어깨에 머리를 갖다 댔는데, 거의 들이받는 것에 가까웠다. 아파라. "기댄 거야." "나 완전 사각 어깨라서 네가 더 아프지? " "재밌었어, 우유" 무슨 얘기인지 떠올리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짐짓 모른 척 연기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궁금했는데 잘 됐어." 사실은 하나도 안 궁금했다. 사물함 없이 생활한 덕분에 나는 모든 짐을 몸 가까이 챙겨 다니는 버릇이 생겼다. 쿰쿰한 냄새는 다 잊어버렸다. "우리는 산책을 합니다." "그러고 있습니다." "이따가 매운 거도 먹읍시다." "그럽시다." "매운 음식에는 쿨피스보다 지방이 많은 아이스크림과 흰 우유가 좋대." "저도 아는 정보이지만 감사합니다." “다음에 스테비아잎 씹어볼래?” “진짜 달아?” “즐거움은 남겨둡시다.” “너무 좋아.” “나도 좋은 것 같아.” “반응이 아주 신중하십니다.”
기억을 더듬어 교실 한쪽. 고요히 공기청정기가 돌아가고 있다. 고요한 소리를 내고 있다. 그 소리를 덮는 것은 다른 청량한 공기다. 공기의 흐름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순간. 그 목소리는 무척 그립고 좋아하는 게 된다. 왜 다르게 들릴까? 왜 아름다울까? 나는 정말 아무도 내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심지어 나조차도 늦게 알아챈다. 그러면 험난한 길을 굳이 걸으며 마음을 전하고 싶어질 것이다. 이전 세대 사람들은 자기 전에 양을 세며 잠을 청했다고 한다. 울타리를 뛰어넘기도 한다. 한밤중의 머릿속 양 목장. 어떤 양들은 오로지 사람에게 세어지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모습이 없다. 이미지만 남아있거나 울음소리만 들릴지도 몰라. 낮이 되면 꼭 닫히는 목장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갑자기 깜빡하지 않는, 깜빡할 수 없는 사람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많이 잊히고, 잊어버리는 사람이 될까? 어떤 기억을 도려내도 시간은 계속 흐르니까 우리는 모른 채 떠내려간다. 어떤 마음은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우유에 왕관 마크가 생기는 건 잠시뿐이니까. 하지만 있었다. 렌지에 돌리면 얇은 막이 생긴다. 한 모금 마시면 잠깐 수염이 생긴다. 곁들이면 풍부해진다. 잠시의 기쁨과 웃음이 된다. 우리의 시간은, 삶의 가운데 혹은 왼쪽과 오른쪽에서, 한시름 놓게 한다. 고소하고 진한 향을 풍기며.
김은한
1인 극장 매머드머메이드 / 불가 버티고 명의로 연극을 만듭니다. 동인 행사에 짧은 소설을 발표했고 아주 적은 사람이 분명히 읽었습니다. 만나서 조금 좋았다면 다행입니다.bastionti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