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교 사냥

유승재


간판도 없는 기사식당으로 들어서자 테라조 바닥을 짓누르는 권태로움이 느껴졌다. 식사를 끝낸 어느 기사들은 이쑤시개를 질겅질겅 씹었다. 뱉기도 귀찮은지 잘게 부순 다음 꿀꺽 삼켰다. 나는 잔치국수 곱빼기와 김치만두를 주문하고 TV가 올려다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았다. 가만히 기다리다 보면 또렷한 발음들이 식욕을 깨웠다. 언제나 이곳은 뉴스 채널을 틀었다. 건설회사 이사가 나신으로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이 탐조 동호회 사람들에게 목격된 모양이었다. 나를 알아본 사장님은 접시에 양파절임을 한가득 담아 음식과 함께 내왔다. 육수 한 모금이 열기를 퍼뜨렸다. 바깥은 서늘한 새벽이었다. 땀방울이 컵으로 빠졌다. 그때 식당 문이 딸랑이며 2인조가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었는데,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하늘은 잠잠했다. 흡수되지 않은 물기는 아래로, 아래로 흐르기만 했다. 이상하리만치 꾀죄죄한 그들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음식을 주문했다. 주방에서 잘만 알아듣는 사장님조차 한 번 더 되물어야 했다. 그들 몫도 금방 나왔다. 면발에 세뇌된 것처럼 그들은 먹었다. 부산스러웠다. 식탐을 빼앗겼다가 막 돌려받은 것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주문을 추가했을 때 이미 사장님은 면발을 건져내고 있었다. 리젠트 머리를 한 남자가 사레가 들러 꽥꽥거리자 스킨헤드의 남자가 물컵을 건넸다. 그들은 두런두런, 비밀스럽게 이야기했다. 그 모습에 시선을 두지 않을 점잖은 이는 없을 것이었다. 텅 빈 그릇을 홀짝이는 척하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흥미가 생겼다. 그저 불쌍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했다. 국물만 더 달라는 나의 부탁에, 사장님은 육수에 면발 약간을 띄워 가져다주었다. 잠청(潛聽)하는 나를 당혹게 한 것은 그들의 무릎 사이로 떨어진 어느 물건 때문이었다. 챙그랑, 금속성의 소리가 들렸다. 나는 권총 한 정을 보았다. 야간 운행의 피로는 시원하게 날아갔다. 그 직후 일어난 일은 무척 우스꽝스러웠다. 좌우로 팔을 휘두르며 바닥으로 넘어진 스킨헤드는 온몸으로 책상다리를 감쌌다. 접시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마구 그는 기침했다. 리젠트도 덩달아 기침했다. 크고 요란하게. 사장님은 대걸레를 챙겼다. 부축을 받으며 스킨헤드가 몸을 일으켰고, 권총은 사라졌다. 그제야 나는 계산서를 들고 자리를 나섰다. 박하사탕은 알싸했다. 영수증을 찢으며 방금 일을 곱씹었다. 트럭으로 돌아온 나는 글러브박스를 열어 15발이 장전된 USP1)를 확인한 다음에야 시동을 걸었다. 지방으로 운행하는 모든 운전수는 지정된 업체에서 무기류 하나 이상을 구매하라는 것이 회사의 새 방침이었다. 예감이 썩 좋지 않았다.



*



폐기물처리장으로 진입한 트럭은 곧 주황 조끼를 입은, 복면을 쓴 이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내가 저항하지 않기를 원했고, 나는 순순히 응했다. 누군가는 포승줄을 가져왔고 누군가는 트럭을 데려갔으며 누군가는 무전을 쳤다. 수도의 마지막 육교인 만큼 신중히 운반해야 한다고 지겹도록 주의받은 참인데 보기 좋게 틀어졌다. 나는 포박된 채로, 한 무리의 공장 직원들과 함께 꿇어앉았다. 공장의 관리자는 귀에서 피가 흘렀는데, 닦아주는 이가 없어 두툼한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를 보며 사장은 오들오들 떨었다. 복면들은 정사각형으로 압축된 쓰레기 큐브들로 올라섰다. 한 명이 확성기를 들고 꼬깃꼬깃한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복면을 쓴 그들은 테러리스트가 아니었다. 테러리스트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청 업체 직원들의 정식 채용, 임금 인상, 오염물질 처리를 요구했다. 공장 사람들은 격노했다. 사장이 담담해 보일 정도였다. 이곳에 모인 이래로 사람들은 복면 너머를 차츰 알아보았으며, 첫 마디를 듣자마자 확신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느슨한 정으로 유지되던 마을의 생활도 폐기물의 독성을 이겨낼 순 없는 모양이었다. 줄을 대려고 안달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받아주는 것으로도 감사하라며 그들은 역정을 냈다. 몇몇 행동대원이 연장 끝으로 그 주둥이를 내리쳐, 효과적이지만 치명적이지는 않게 그들을 닥치게 만들었다. 사장은 말했다. “알겠어, 알겠다고, 알겠다니깐. 다들 진정하십시오. 그런데 여러분들도 아시지요? 우리 다 같이 먹고살려면 돈이 있어야 합니다, 돈이. 그런데 지금 돈줄을 쥐고 귀한 분이 오셨는데 언제까지 방치할 셈입니까!” 그러더니 그는 힘껏 고개를 꺾어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씨익 웃었다. 육교가 자신감을 되찾아주기라도 한 마냥. 얼추 예상한 듯 복면들은 전제를 덧붙였다. 육교의 6할은 기존 계약에 할당하고, 그 수익은 요구 사항 이행을 위해 투자한다. 나머지 4할은 자신들의 몫으로 인도한다. 입가를 파르르 떨며 온화한 표정을 짜맞추던 사장도 끝내 격노했다. 그만큼 가져가면 본래의 계약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역 미술관이 육교를 원한다는 것이 소문만은 아닌 것이었다. “염치없는 줄은 모르고, 생떼 부릴 줄만 알지. 부끄럽지도 않느냐? 이 갸냘픈 공장에서 뭘 더 뺏어가려고! 못 들어오는 데엔 다 이유가 있는 게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망치가 그의 손을 내리쳤다.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는 사장은 언덕을 굴러떨어지는 돼지의 비명을 냈다. 망치가 말했다. “그건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게 당신 특기잖아.”

하차 작업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합의안을 서류로 정식화하기 위해 자리를 떠나기 전, 사장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시키는 대로 하지 말게나. 절대로. 육교를 온전히 가져오면 돈을 두 배로 쳐주겠네.” “계약에는 없는 일입니다.” “자네 말고 있나? 나는 믿겠네.” 결정적인 서명을 위해 그는 다른 방으로 끌려갔다. 나는 트럭으로 돌아왔다. 간부급의 남자가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맑은 눈 옆으로 주름이 자글자글했으나, 이목구비가 뚜렷해 훨씬 젊어 보였고 인상을 남기기 용이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간부로 인정되었으리라, 나는 짐작했다. 다만 내가 올라타자마자 손에 들린 권총을 그가 슬쩍 보여준 탓에, 상상도 잠시뿐이었다. “피차 비슷한 사정이니까, 서로 다치는 일은 없게 하자고.” 그가 말했다. 나는 글러브박스 속에 고이 잠든 USP를 떠올렸다. 떠올리기만 했다. 목적지는 포항이었다.

나의 졸음을 달아나도록 하는 것이 임무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말이 많았다. 끝나지 않는 고속도로의 가로등처럼 계속 떠들었다. 전방을 주시해야 하는 운전자의 입장을 지독하게 써먹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슬쩍슬쩍 라디오를 높여보았으나 그것을 도로 줄이고서는 목소리를 키웠다. 내게도 말을 걸어왔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개의치 않아 했다. 그는 고양되어 있었고, 그저 듣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 두서없던 이야기가 한때 수도에서 장벽 공사를 했다는 대목에 이르자 빌어먹게도 나는 흥미를 빼앗겼다. 달싹이는 입술을 발견한 그는 놓치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단념하고 맞춰주는 편이 좋을 듯했다. “트럭을 주로 몰았지요. 대형이면 뭐든. 지게차나 레미콘은 물론.” “역시 그랬구만? 잔뼈 굵은 게 티가 나.” “예전 일입니다. 장벽 초창기에 합류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을 떠났습니다.” “당신은 왜 떠났지?” “조합 간의 충돌이 있었습니다. 그 좁은 판에서도 파벌이 생겨서.” “아하, 그 일 말이지. 조금 더 빨랐다면 만났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내가 아직 장벽에 합류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지. 기억이 새록새록 나. 장벽 안팎으로 피바람이 불었잖아. 무력 충돌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안에서도 의견 충돌이 있었고, 노선에 따라 조직이 반으로 찢어졌어. 현장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을 줄곧 지켰지. 하지만 지부장이 나를 지역으로 내려보냈어. 반발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신중히 판단한 게지. 지방에서 힘을 키워야 한다는 걸 그들은 내다본 거야, 장벽이 생긴다 해도 수도가 지방을 등한시할 순 없다는 걸.

이번 공장 투쟁은 우리가 구상한 미래가 옳았다는 걸 증명해주었어. 이 이상 눈감아주기엔 죄가 너무 많네. 겉으로는 재활용이다 뭐다 하면서 친환경 딱지 내밀지만, 고작 한다는 게 불법 철거한 육교를 매입해서 중개료를 챙기고 미술 작품으로 재가공? 역겹기 짝이 없는 소리야. 아, 당연히 당신네 패거리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지. 멋대로 육교를 들고 나르는 걸로도 모자라 조각이나 부적으로 다듬어서 판다니…….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사냥 운운하면서 이름을 붙이나. 멀쩡히 사용하던 것을 기습 철거로 팔아넘기고, 어차피 유지비가 더 들어갔으니 대신 해결해준 거라고 말하는 그 본새하고는. 그 덕에 전국의 육교가 남아나질 않는 데다가 철강 시세까지 덩달아 치솟는 거 아냐. 여하간, 미술관 얘기를 들으면 치가 떨려. 자기네들끼리 천문학적 금액을 고상하게 굴리면서 그 정당성은 고민하지 않아. 물론 나름대로 내린 정의가 있을 테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도.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 미술이 결국 사람의 삶과 유리되어 있다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만큼 허무한 것도 없어. 당신 생각은 어때?”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17분 전부터 자동차 하나가 후사경에 줄곧 머물렀다. “30쪽 분량의 백지 사업계획서로 도(道)의 예산을 받아먹는 공장의 작태에 분노하는 거라면 차라리 사정은 단순해. 이건 그 이상이야. 여기는 공장이 없으면 생계에 타격을 입는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공장이 그런 그림을 원했어. 이 일대를 바싹 굶겨놓고는 구원자 역할을 자임하지. 그런데다 수도의 쓰레기까지 도맡으면서 당국 뒷바라지까지 받으니 기세등등할 만도 해. 정말 안타까운 건 공장에서 일하는 정직한 사람들도 사장의 욕심에 전부 물들었단 거야. 착취라는 말이 어울리는 건 우리보다도 그치들이라고. 설득하려고도 했어. 듣지도 않더군. 밥그릇 뺏으려 한다고 역정만 내지.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고, 도우면서 살자고. 우리는 다른 길을 고민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불가피했지. 그들을 설득하는 것보다 결단을 망설이는 잠재적인 동지들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 당면 과제였으니까. 공통의 목표는 명백하고, 불만과 분노는 가득했으므로 그 강도만 설정하면 끝나는 일이었어. 자신이 처한 조건을 바꾸기 위해 사람은 투쟁하지. 아니, 그를 선택하는 것만이 유일해. 민중의 손으로 만들어낼 필연적인 변화를 우리는 살짝 격려했을 뿐이야. 이번 성공은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게 되겠지, 투쟁을 향한 활력을……. 다른 지부들과도 소식을 공유했다네. 열렬히 축하해주더군. 투쟁이 더욱 각박해지는 지금 같은 시대, 자그마한 성공이야말로 크나큰 한 걸음이지.” 과장된 손짓과 함께 그의 이야기는 더욱 덩치를 더해갔다. 4km쯤 가서 국도로 빠지는 것이 더 빠르다고 하자 그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뒤편의 차량이 속도를 높이는 게 보였다. 아직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우리의 요구 사항은 관철될 거야. 즉각적인 조치가 어렵다고 해도 순차적으로, 투쟁에 참여한 전원이 공장에 채용되지. 우선은 조직위 사람들이 먼저. 우리가 진입해서 판을 닦아야지.” “한 번에 모두를 들이는 게 아니란 말입니까?” 문득 내가 되물었다. “미래를 위한 전략적인 후퇴지. 예상한 바야. 그 이상은 허락하지 않네. 지금쯤 사장이 서명을 마쳤겠군. 그래, 마땅히 그래야지. 탐욕스럽기 짝이 없는 놈.” 검은 SUV로 판명된 그 차는 트럭 옆으로 바짝 붙어, 루프에 달린 사이렌을 요란하게 울렸다. 귀가 아플 정도였다. “세웁니까?” “억지 단속으로 용돈이나 뜯으려는 불량 짭새겠지. 일단 천천히 세우자고.” 그는 권총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거의 수평이었던 조수석 시트를 꼿꼿이 돌려놓았다. 갓길로 차를 몰았다. 트럭이 멈추자, SUV는 갓길로 들어서다 말고 과격하게 후진했다. 냅다 부딪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차는 멈추었다. 나는 상향등을 켰다. 짙게 칠한 차창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석과 조수석 양쪽이 동시에 열렸다. 어둠을 가르는 빛줄기에 무언가 반짝였다. 총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선명한 인상은 절반이 날아갔다. 그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안전띠가 그를, 아니 그였던 것을 붙잡았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깊게 뻗친 손이 시신을 데려갔다. 누군가 창문을 두들겼다. 창문을 내리자 길쭉한 것이 불쑥 들어왔다. 총구였다. “옆으로 비키시지.” 국숫집에서와는 달리, 그들의 행동은 망설임이 없었다. 얼굴에 두건이 씌워지고 스프레이가 마구 뿌려졌다. 숨이 헛돌수록 약 기운은 깊게 파고들었다. 속절없이 잠들었다.



*



소년 시절 내가 살던 동네를 살짝만 벗어나면 갈대밭이 나왔다. 바람에 나부끼던 금빛이 기억난다. 도시 외곽에 아파트 다섯 채가 외롭게 서 있는 곳이 바로 우리 동네였고, 그것이 최초의 개발이었다. 역에서 동네까지의 도로를 따라 상권과 주거지가 형성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내가 갈대밭, 그를 가로지르는 물길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곳을 지키는 철교 때문이다. 감속을 위해 철근 여럿을 바닥에 용접한 다음 검정과 노랑을 번갈아 칠해놓은, 그야말로 조잡한 철교였다. 난간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흘러가는 냇물을 한참 바라보곤 했다. 그를 통과해 깊숙이 들어가면, 저녁마다 연기를 내뿜는 작은 마을과 거대한 초록 그물을 덮은 실외 골프연습장뿐이었다. 인적은 없다시피 했다. 이따금 지나가는 차들은 나를 무시하거나 사납게 경적을 울리며 쌩 지나쳤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하고 뒷좌석 문을 열거나 입을 앙다물고 팔부터 잡아끄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을 내려다보다가도 몸을 비틀어 갈대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 금세 길을 잃었다. 나보다 이곳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 노는 걸 제치고 이곳으로 달려가는 아이가 나였다. 사람에는 관심이 없었다. 하염없이 자라나, 부풀어 오른 짐승의 털처럼 부드러운 갈대의 천국에서 나는 능숙했다. 배후에 흔적을 남기며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이 나의 특기였다. 사람들은 포기했고, 사라졌다. 그들이 떠나갈 때까지 다리 아래서 곰곰히 기다리다 보면, 자동차가 그르렁거리며 몸을 떨며 떠나갔고, 다리도 덩달아 울어댔다. 그것은 흉악한 괴물의 분풀이처럼 느껴졌다. 모래는 후두둑, 내게로, 냇물로, 공평히 떨어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면 철교 위로 올라가 온몸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다. 나만의 의식이었다. 정수리로 꽂히던 울음들은 철교 아래로 사그라들었다. 모래들은 내게서 떨어져 철교로 돌아갔다.

이미 그 자리엔 4,300가구를 수용하는 대단지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 철교의 꿈을 꾼다. 세부를 지워버리면, 철교가 보인다. 드넓은 금빛 일렁임은 어째서인지 되돌아오지 않는다. 꿈의 용량은 모든 것을 재현하지 못한다. 휑뎅그렁 남은 철교는 자리를 지킨다. 그곳에 더 이상 이어붙일 것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칠한 듯 선명한 줄무늬 위로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찌르는 철교에 눕는다. 그렇게 한참 있으면, 피가 흐르지 않는 철교가 약동하는 것을 느낀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다. 불어난 시냇물은 찰박거리며 옷자락을 적신다. 꿈의 마지막은 늘 동일하다. 무역회사 소유의 적색 트레일러를 매단 트럭이 머리와 발목을 밟는다. 삶의 조각은 과격한 방식으로 영영 회수된다. 그리고, 철교는 주저앉는다.


숨을 거칠게 들이마시며 머리와 발목을 매만져보려 해도 노끈으로 묶인 손발은 자유롭지 못했다. 좌우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오른쪽이 더 비대했다. 리젠트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운전은 스킨헤드였다. 기어를 변속할 때마다 그의 팔꿈치가 배를 쿡쿡 찔렀다.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극적인 상황도 거듭되다 보면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여유로움까지 느끼며 말했다. “힘을 빼는 게 좋을 텐데.” “말하라고 한 적 없을 텐데.” 그가 으름장을 놓았다. 엔진이 그르렁거렸다. 리젠트가 뺨을 쳤다. 안면을 다 덮는 그의 손은 두툼하고 얼얼했다. 조용히 닥치기로 했다. 침침한 의식으로 돌아가 최악의 최악을 갱신하는 이 현상을 파악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리되는 것은 없었다. 복잡한 감상들이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더위를 호소하던 리젠트가 창문을 내려도 되느냐고 스킨헤드에게 물었다. 땀으로 축축한 그의 옆구리는 열탕에 담근 두부처럼 뜨뜻했다. 스르륵, 창문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잎사귀가 차체를 스쳐 지나갔다. 포장되지 않은 도로 위에서 트럭은 좌우로 경쾌하게 흔들렸다. 운전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검은 천을 뚫고 때때로 도달하는 햇빛을 나는 가만히 받아들였다. 그것으로 바깥을 미루었다. 그곳은 분명 숲이었고, 소금 섞인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질질 끌려와 의자에 묶였다. 두건이 사라지고, 시야가 트였다. 산 중턱으로 보이는 이곳은 컨테이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컨테이너조차 옅은 녹이 훤했다. 황동색으로 일어나는 걸 보아하니 이름 모를 바다에서 숨이 죽어버린 폐품이었다. 공터는 11톤 트럭 다섯 대가 도열할 수 있을 법한 크기였다. 이 기묘한 공간을 나무들이 둥글게 에워쌌다. 일부분은 나무가 없었다. 그곳에 바다가 훤한 낭떠러지가 있음을 모를 수는 없었다. 플라스틱 의자는 꼬질꼬질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한쪽 다리가 구불텅하게 휘어, 힘을 주지 않으면 능선을 따라 데굴데굴 엎어져 바다의 제물로 전락할 운명이었다. 스킨헤드는 의자를 끌고 앉더니 괜히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저씨는, 약속을 잘 지키나?” “그러니 육교 운반을 하지. 눈독 들이던 치들은 조용히 갔다.” 저 멀리서 리젠트가 오더니 내 통행허가증을 스킨헤드에게 건넸다. 쓰윽 훑어보더니 스킨헤드는 그것을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 의외네, 당신 회사는 약속을 잘 안 지키는데.” 그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거짓말하지 마라.” “정말로.” “이유가 없다.” “당신네 회사는 공장이 소요로 엎어질 걸 알고 있었어. 이만큼 말해줘도 안 믿나? 순진한 거야, 멍청한 거야?” “일어날지도 몰랐던 것 때문에 순진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나? 싸가지없는 새끼가.” 스킨헤드가 권총을 장전했다. “말조심해, 씨발. 추적 따라붙으면 나나 아저씨나 다 뒤지는 거야.” 조금씩 정보를 얻고 있으나 불리한 건 마찬가지였다. “기동타격대나 부르는 게 어떠냐. 공익 신고로 포상금도 주겠는데.” “닥치고 내 말 들어.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우리를 도와주든지, 아님 거절하든지. 거절할 경우엔 저기 저 낭떠러지로 내려가면 돼. 피가 묻든 살점이 튀든, 바람과 비가 다 청소해주는 편리한 곳이지.” 그는 발을 뻗어 내 의자에 무게를 살짝 실었다. 온몸이 휘청였다. “어쩌시려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종아리가 점점 시큰거렸다. 스킨헤드가 말했다. “하겠지. 아니, 할 거야. 내가 잘 알아. 이 앞에 앉혀놓은 사람만 몇 명이겠어. 굳이 내가 모질게 안 해도 할 사람은 승낙하거든. 당신은 무언갈 대놓고 욕망하진 않아도 아무것도 없는 투명한 사람이기를 원하지는 않아. 주체못할 탐욕을 흩뿌리는 사람들보다도 그런 쪽이 더 무섭지. 평온한 얼굴 뒤에 추접스러운 게 똬리를 튼 부류. 양이나 음이 되고자 하는 것보다 차라리 0을 피하려는 게 훨씬 더 끈질기고 지독해. 왜냐하면 그렇게 저항 안 하면 0으로 끌려 들어가는 건 순식간이니까.” 내부를 헤집고 구성요소를 모조리 이해했다는 듯 명료하게 말하는 그 오만함이 묘하게 성질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었다. “원하는 게 뭐냐?” “그래, 그래야지. 간단해. 내가 뭔가를 좀 만들고 있거든. 그걸 장벽 안으로 옮겨주면 돼. 우리도 동행할 거야. 원래 하던 일이랑 다를 바 없어. 아, 허드렛일도 해주면 좋고.” 생각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조건을 덧붙였다. 결박을 풀고, 어떻게 되먹은 상황인지 설명해달라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알아야 제대로 도울 수 있다고 설득했다. 그는 나를 풀어주었지만, 낭떠러지 앞에서 벗어나게 해주지는 않았다. 풀려나자마자 주먹을 갈기고 싶었으나 풀썩 쓰러지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양반다리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앉아 그의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의뢰받은 건 트럭에 탄 사람을 제거하고, 내용물을 되돌려주는 거였어. 애초부터 당신네는 육교를 넘길 생각이 없었어. 미술관이 최고가 입찰을 한 건 맞지만 그걸로도 성이 안 찼나 보더군. 사람이 사람을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데엔 온갖 이유가 있으니 딱히 신경 쓰진 않았지. 애초에 트럭에 실린 게 육교라고도 알려주질 않았어. 수도에서 대대적으로 기동타격대를 출동시킨 것에서부터 낌새가 이상했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국수를 먹으러 온 건 문제가 아니었나?” “벌써 조롱까지 하나? 아무튼 그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 근 며칠간 우리는 공장 근처를 순회했어. 당일까지도 분위기를 살폈지. 그래서 며칠 내로 육교가 온다는 걸 알았고 경찰 무선 채널로 자치단체들은 기동타격대에 협력하라는 말까지 돌았지. 모든 게 딱딱 맞아 떨어졌지만, 입금은 그렇지가 않더군. 그쪽의 채무 불이행이 당신을 살린 거야. 약속한 돈이 들어오질 않으니 우리로서는 보험이 필요했지. 방금까지도 좌표를 보내더니 하루빨리 접선하자고 했어. 아주 몸이 달아 있던데. 돈을 안 주니까 그리 되지. 만나서 준다고는 하지만 뭐, 우리가 간들, 오랜만입니다 인사 나누고, 투박하게 포옹하고, 잔금 계산하고. 이러면 끝날까? 이제 신뢰고 나발이고 남은 게 없지. 일처리가 아주 꼴사나워.” 마지막 남은 신뢰를 말끔히 치워버린 것은, 육교를 상차하는 동안 회사에서 위치추적기를 붙여두었다는 설명과, 리젠트가 보여준 검은색 곰팡이처럼 보이는 물체였다. 자세히 보니 스위치와 LED 램프가 있었다. 차근차근, 현상은 해명되었고 나는 말려들고 있었다. 스킨헤드가 담배를 꺼내 물고 내 입에도 물려주었다. “계획이 꼬였긴 해도 오히려 잘 됐어. 박차를 가하면 일주일 안으로는……. 아주 희망적이네. 크게 한탕, 웅장하게.” 크하하, 하고 웃는 그의 입에서 담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엔진을 삼켜버린 악어 같았다.


최초의 작업은 전부 감전되어 죽기 전에 제멋대로 엉킨 전선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용하게도 전기를 몰래 끌어오고 있었다. 용접기와 소형 발전기를 비롯한 장비들이 제법 있었다. 대부분 구식이었다.

결박을 풀고 적재함 비닐 덮개를 걷어내자 육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미 상당한 양을 자르고 떼어냈으므로 원형이랄 것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잃어버리고 만 규모와 권위를 모조리 압축해 자신의 육신으로 흘려 넣기라도 한 것처럼, 이 강건한 덩이들은 오랜 세월 구둣발에 짓눌린 역사를 생생히 증명해내고 있었다. 우리는 멍하니 육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분업은 확실했다. 내가 육교 조각을 작게 해체하면 리젠트가 작업장으로 옮기고, 스킨헤드가 무언가를 만들었다. 기한을 일주일로 잡은 탓에 식사를 제외하곤 거의 작업만 했다. 그동안 나는 리젠트와 친분을 쌓았다. 처음에 그는 경계도 하고 부러 억세게 굴었으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작업만 하니 그도 얌전해졌다. 조각을 기다리는 동안 그는 나를 가만히 구경했다. 육중한 몸이 풍선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산만한 것을 보다 못해 그를 불러 절단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어쩐지 그는 기뻐 보였고, 곧장 배웠으며, 궁금한 게 생기면 곧잘 물었다. 그것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형이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도통 시키질 않는다며 그는 불평했다. 나는 그들이 형제라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 단순 동업자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래 보여도 일은 잘한단 말입니다. 억울합니다.” 분명, 내가 기억하기에도 고속도로에서 방아쇠를 당긴 것은 리젠트였다. 육교를 노리고 의뢰를 수락했는지 물었더니, 어쨌거나 저쨌거나 육교는 재료가 될 예정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런 식으로 ‘탈취할’ 생각은 없었죠, 하하. 원래라면 이번 벌이로 샀을 겁니다.” 멋쩍은 듯 그가 웃었다.

이윽고 우리는 역할을 바꾸었다. 그가 보호구를 쓰고 육교의 불똥을 견뎌냈다. 그리하여 나는 스킨헤드의 작업을 지켜볼 수 있었다. 두 개의 컨테이너 중 작은 쪽이 작업장이었는데,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나무 합판으로 창문을 가려놓았으므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방도였다. 리젠트 대신 내가 들어오자 그는 조금 놀란 듯했다. “절단법을 가르쳐줬어. 빨리 배우던데.” “쓸데없는 짓을.” 어정쩡한 침묵 속에서 나는 기사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강렬한 첫인상은 능력을 충분히 의심하고도 남았다. 살인을 전문으로 삼는 그들이 그 능력의 바깥, 즉 실제의 삶을 꾸려나가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은 증명하기 곤란하다. 그런 무지한 관계라면 널리고 널렸지만, 곁다리라 하더라도 이 종속과는 무관하게 나는 구체적인 것을 알고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할 말 있어?” 스킨헤드가 그제야 내게 관심을 돌렸다. 나는 물었다. “몇 살이지?” “세상에.” 그는 낄낄 웃었다. 가장 궁금한 부분이었다. 리젠트든 스킨헤드든 겉으로만 봐선 전혀 나이가 가늠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장벽은 세워지고 있었어. 나이를 먹어가고 키가 커지면 장벽도 똑같이 자랐지. 우리에겐 마치 형제가 하나가 더 있는 것 같았어. 동생인가, 아니, 형이겠지. 장벽이 먼저였으니까.” “그렇군, 그럼 출신은?” “이봐, 아저씨. 신상 조사라도 하는 거야?” “싫다면 그만 묻지.” “사람 참, 무안하게 만드네.” 그는 작업대에서 벗어나 벽에 등을 기대고 담배를 빼어 물었다. “언젠가 대이동 이후로 장벽 안으로 정착한 어떤 새끼가 말하는 걸 들은 적 있었어. 장벽 안은 너무 비좁다면서 불평하던 그 사람은 충청북도 언저리까지 넓게 구획했어야 수지가 겨우 맞았을 거라더군.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그 사람을 흠씬 패고 있더라고. 아마 그 사람 이빨 새로 박는 데 깨나 들었을 거야, 절반을 날렸으니. 동생이 말리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처맞았겠지. 왜냐. 거기 있던 사람들 전부 구 지방민들을 대상으로 한 경상북도 투어에 참가한 관광객들이었으니까. 수도의 여행사가 주관하는 거, 당신도 들어봤지?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시절이 있었겠지만, 내가 알 턱이 없지. 편견으로 뒤덮일 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내 얼굴은 사라지지 않겠지. 나는 그런 걸 바랐어. 사람 놀리는 대가에 비하면 싼 편이지. 모든 게 전보다 안 좋아졌고, 수도는 썩었고, 본 적 없는 새로운 세상이 도래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야. 아저씨처럼 과거에 적을 둔 사람들이 유독 많이 하는 말이지. 그런가 싶어. 옛날엔 이것보단 살 만했나 싶지. 하지만 이젠 모르겠어. 그래, 장벽이 이 나라를 안팎으로 위아래로, 아주 갈라놓았지. 그런데 전부터 세상이 아귀가 잘 들어맞았던 건 아니었잖아. 나 같은 사람들은 그 ‘이후’에 태어났으니 그때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어. 하지만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거니와 이제는 뭘 하려고만 해도 사방에서 옥죄는 기분이 든다는 건 잘 알지. 말하자면 장벽은 우리가 처한 모순을 좀 적나라하게 확인해준 건데 그것이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나머지 인두에 데인 마냥 사람들은 펄쩍 뛰는 거지. 확인하기를 원했던 사람들조차!” 다시 말하기 위해 그는 숨을 골라야 했다. 나는 그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웅변가의 자질에 새삼 전율하는 중이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으면서 20년 이상 걸린다는 장벽 건설에 찬성했나? 누군가는 운이 좋아서 장벽 안으로 들어갔다지만, 제발 부탁인데 개소리 말라고 해. 남은 운을 돈으로 몽땅 끌어모은 거겠지. 그러니까 그만한 돈을 들여서 장벽 바깥으로 바람 쐬러 오는 거 아냐. 떠나온 곳을 손쉽게 방문할 수 있지만, ‘현실적인 장벽 때문에’ 그렇게 돌아오지는 못한다는 알량한 죄책감에 취하려고……. 내가 그 남자를 두들긴 그날이었을 거야. 자려고 누웠더니 문득 생각 하나가 솟아오르는 거야. 그것이 점점 커지고 커져서 줄기를 이루고 잎을 피우고 점차 견고해지더군. 마지막쯤 되자 그 생각이란 것은 어찌할 새도 없이 활활 불타더니 새하얀 숯이 되었어.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해. 한 가지만은 명확했어.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다는 거야.” 그는 나를 똑바로 마주하고 이글거리는 눈을 숨기지 않았다. 동공 속에서 나는 일렁이는 이빨을 보았다. 그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어 번 치더니 다시 작업을 준비했다. 그리고 침묵. 내가 작업장을 나서기 전, 그는 등에다 대고 말했다. “장벽은 무너져야 해. 우리가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컨테이너를 빠져나와 낭떠러지 앞에서 한참 동안 담배를 태웠다. 그가 말한 ‘우리’에 얼마나 많은 이름이 포함되어 있을지, 그리고 나 또한 포함되는지를 유추해보았다. 어디선가 쓰레기 태우는 냄새가 났다. 그러나 그것은 내 몸에서 나는 냄새였다.


며칠간의 관찰을 통해 나는 그들이 사제 폭탄을 제작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나 바뀔 것은 없었다. 작업은 계속되었고, 육교는 소진되었다. 남은 것들은 낭떠러지로 버렸다. 파문이 일어나고 사그라질 때까지 나와 형제는 바다를 지켜보았다. 수면이 잠잠해진 이후에도 우리는 바다에 시선을 빼앗겼고, 무언가가 끊어지고 말았음을 나는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일째 되는 날, 우리는 어느 창고로 갔다. 운전대는 내가 잡았다. 스킨헤드가 허락했다. 내게는 처음이자 마지막 외출일 터였다. 간만의 바깥공기에 리젠트는 후련해 보였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창고였는데, 자세히 보니 주유소 주위로 광대한 외벽을 겹겹이 설치한 것이었다. 들어가기 전 방독면을 받았다. 환풍기가 가동되고 있긴 하지만 충분치 않다는 설명이었다. 습격이 워낙 잦아 거금을 들여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의 순환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기름으로 채워진 드럼통들이 적재함에 실렸다. 리젠트는 뒤뚱거리며 주유소 직원들과 함께 땀을 뻘뻘 흘렸다. 스킨헤드는 하나하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다음 비닐로 밀봉한 폭발물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몇 번이고 개수를 확인했다. 도합 61개였다. 깡마른 트럭은 오븐에서 막 꺼낸 빵처럼 부풀었다. 이 유조(油槽)들은 트럭과 한 몸이 되었다. 장엄한 폭파가 트럭을 발판 삼아 이루어진다는 어떤 결말이 점차 실체화하고 있었다. 그들은 운전수의 역할에 대해선 아직 말하지 않았다. 지극히 감내해야 하는, 당연한 것이므로.

돌아오는 길은 땅거미가 내렸다. 소주와 순대를 포장했다. 얼마 남지 않은 길을 못 참고 형제는 차 안에서 병째로 마셨다. 그들이 입에서 흘러내리는 알코올이 자극적이었다. 고단한 몸이 술을 원했다. 스킨헤드가 병을 들이밀면서 속을 긁었으나, 참았다. 대신 가속 페달을 지긋하게 밟았다.

화로로 쓰는 공드럼에 불을 붙이고 주전자를 걸었다. 조금 식어버린 순대를 불에 구워 먹으니 진미였다.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형제는 자뭇 비장해 보였다. 나는 스킨헤드가 고양된 목소리로 연설 비슷한 무언가를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손에서 팔락이는 것은 수기로 쓴 원고였다. 선언문의 초안이었다. “선언문이라니, 세상에.” “멋지지 않습니까?” 리젠트가 분위기를 북돋웠다. “완성은 언제쯤이지?” 내가 물었다. “언론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진척이 있겠지. 한참 남았어. 우선은 이야기가 필요해. 내일 일어날 일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가져다줄 거야. 혁명을 위한 이야기인 거지. 혁명은 이야기고, 이야기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혁명은 끝나지 않지. 그러니 계속되어야 해. 이건 그 재료란 말이야.” 그는 이 말을 들려주기 위해 오랜 밤을 고대한 것으로 보였다. 그야 그 몸짓, 억양, 시선 처리, 손가락이 굽은 각도, 혁명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데 필요한 마찰까지, 정교한 설계의 결과물로서 이념은 제시되고 있었다. 나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혁명, 혁명.” 리젠트는 그런 나를 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그만하십쇼, 진짜 바보 같습니다.” “너는 뭘 웃어, 이 새끼야.” 웃음기를 싹 거두고 스킨헤드는 리젠트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다가도, 눈을 마주치자 왁자지껄 웃었다. 혁명. 혀는 헛돌았다. 그 단어를 발음하는 것은 낯선 일이다. 나는 그 단어와 일절 연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이렌이 울리고, 경찰력이 모자라 동료들이 보호대를 차고 시위를 막으러 가던 와중에도 나는 묵묵히 핸들을 기울이거나 했을 뿐이다. 약간의 실소가 흘렀다. 정말, 그런 말들이 삶과 연결되는 것은 가당키나 한가? 이제 와 나는 자격을 되묻는 것이었다. 머나먼 말들. 단어와 삶은 오래전에 유리되었다. 그런데 지금 이 형제는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착실하게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차 키는 아직 품속에 있다. 쌀쌀한 바람에 몸을 살짝 떨자 열쇠가 찰그랑거렸다. 새벽 일찍 출발해야 했으므로 나는 술을 진즉에 멈추었다. 그러나 스킨헤드가, 덩치만 큰 리젠트의 형 되는 사람이, 이 보잘것없는 공터의 주인이 내게 술을 권했다. 나는 입 닿는 부분이 모두 구겨져 버린 종이컵을 내밀었다. 원기둥에 갇힌 모닥불의 빛은 병에서 흘러내리는 소주를 가로질러 그것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성스러운 피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술기운이 적당하게 올랐는지, 스킨헤드는 내 등짝을 툭툭 치더니 트럭이 참 좋다고 평하더니, 앞으로도 협력적인 태도를 보여준다면 계획에 함께하는 것을 고려해보겠다고 말하면서, 내 몫으로 약간의 돈을 남겨두었는데 그것은 앞으로의 처신에 달려있다고 넌지시 속삭였다. 그 말을 듣자마자 지끈거리는 두통이 확 가시는 걸 느꼈다. 모든 소음은 불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호의를 이해할 수 없었다.


형제가 잠든 것을 확인한 다음, 트럭으로 향했다. 새벽 공기는 겨울이라고 믿어도 될 만큼 뼈를 아리게 했다. 트럭은 컨테이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들은 유류를 다루는 방법까지 생각하지 않은 게 틀림 없었다. 찰나의 정전기가 불러온 몇몇 비극들을 반복적으로 회상하며 조수석 글러브박스를 열었다. USP는 여전히 있었다. 품에 쑤셔 넣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숲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사람의 그림자였다. 나는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보폭에 맞추어 빨라지다 느려지기를 반복하던 그것은 하나였다가 둘로 늘어나고, 이내 셋, 넷으로 불어나다가 더는 세지 못한 만큼 많아졌다. 그때 이상하게도 머릿속으로는 육교를 떠올렸다. 전국으로 잘려 나가 전체의 일부가 되어버렸을 육교. 이제 그 살점들은 장벽을 찢어놓으려 한다. 컨테이너로 돌아왔다. 정체된 온기가 몸을 녹였고, 다시 잠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필요는 없었다.



*



눅진한 모포와 겉면을 말끔하게 문지른 나무 베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몸은 이상한 각도로 뒤틀려 있었다. 부러진 곳은 없었으나, 땅을 짚었더니 일어나기는커녕 등줄기가 쪼개지는 듯한 고통 때문에 다시 엎어졌다. 창문이 아래, 문이 위였다. 트레일러에 뚫린 세밀한 구멍들로부터 쏟아지는 햇빛은 신비로운 흰 막대를 촘촘히 박아두었다. 형제는 보이지 않았다. 엉금엉금 기어가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챙겼다. 트레일러 뒷문은 경첩이 떨어져, 흉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왔다. 검은 불기둥. 불길은 숲으로 옮겨붙고 있었다. 잎에서 잎을 타고, 세력을 넓혀갔다. 트럭의 잔해와 날개처럼 펼쳐진 화마가 내려가는 길을 막아섰다. 무릎을 꿇고 하늘로 고개를 쳐든 스킨헤드가 보였다. 오른팔이 축 처져 있었다. 그 앞엔 검은 막대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리젠트였다. 그러나 명치 위로는 형체가 없었다. 스킨헤드는 서서히 고개를 돌렸고, 나와 눈이 마주쳤으며, 다짜고짜 나를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잔뜩 힘이 실린 나머지 자기 자신만 갉아먹을 뿐인 주먹질이었다. 품속의 권총이 빠져나오지 않도록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무어라고 악다구니를 썼으나 알아들은 것은, 네가 했지, 네놈이 했느냔 말이야, 라는 말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위협적인 드럼통 더미를 터뜨린 게 그들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 곁을 함께 달려가던 새벽의 그림자들을 떠올렸다. 그것들은 형체가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그저 충실하게 배후를 지킨다…… 죽음의 배후까지도. 나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피어싱 대신 육교 조각이 박혀 있었다. 눈을 뜨기 힘들어했다. 눈가가 떨릴 때마다 그는 신음했다. 나의 등에서 느껴지는 고통 또한 그 연원은 같을 것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제풀에 나가떨어졌고, 꺽꺽 울기 시작했다. “왜, 왜.” 폭발물의 성능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그 사실은 이곳에서 증명되어서는 안 되었다. 불은 먹잇감을 둥글게 에워싼 채, 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니다, 나는. 내가 하지 않았어.” 그렇게 말을 하는 나 자신이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의심이 불쑥 피어오를 정도로. 그러나 나야말로 이 계획의 지지자였다. 말하자면 계획과 그 장본인들에 대한 두터운 신뢰가 지지를 불러온 것은 아닐지라도, 계획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세부가 결여된 이 불꽃놀이가 보기 좋게 성사될지도 모른다는 어떤 불안, 혹은 반동적인 기대감이 지지를 추동한 것이다. 그 장엄한 사건이 가도를 달리는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변곡점이다. 정말로 실현된다면, 진실로 눈앞에 나타난다면…… 다른 사건 또한 얼마든지 일어나리라. 만일 존재한다면, 나의 죄는 결의를 거둬들이고 망설임을 또 다른 망설임으로 대체했다는 것뿐이다. “정말 유감이다.” 내가 말했다. 장례식장에서 건넬 법한, 악의 없는 위로. 그러나 그리 말한 사람은 죽음의 대열에서 이탈해서도 자신의 허구를 영영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웃음이 나왔다. 허탈한 마음은 곧 흐느낌 같은 것으로 변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웃음이었다. 스킨헤드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내게 달려들었다. 나의 권총은 기다렸다는 듯이 불을 뿜었다. 그는 얌전히 머리를 처박았다. 엎드리기 위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나는 숲으로 뛰어들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은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오래도록 인적이 닿지 않아 자연은 제자리를 되찾았다. 기둥은 이제 장막처럼 펼쳐져 죽음을 흩뿌렸다. 불꽃이 튀고, 나무들은 그 자신을 재료 삼아 밝게 타올랐다. 어디선가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형태를 보존하던 것들은 열을 이기지 못하고 뒤늦게 폭발하고 있었다.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는 드럼통 하나를 보았다. 이윽고 나는 평면의 허공에서 모든 마찰을 상실했다. 무언가 깊게 박히는 것을 느꼈다. 온몸은 타액들로 눅눅해진 지 오래고, 새로운 피가 등줄기를 적신다. 언제까지 흐를 심산인가? 움직일수록 더 많은 피가 흐른다. 포기한다 해도 다를 바 없다. 움직이는 것은 나를 결코 내버려 두지 않는다. 풍경이 뒤로 잡아당겨지는 게 아니다. 끌려가는 것은 우리다. 누군가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그 장력의 출처는 분명했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잘 알았기에, 나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나는 숫자를 잃고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육교 조각들은 자라난다. 뿌리 박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안으로 뻗어나가 어깨와 갈빗대로 엉겨 붙고 밖으로는 기세 좋게 돋쳐나간다. 앙상한 날개는 퍼덕인다. 저 멀리서 반짝이는, 청록의 단추들을 붙잡기 위해 나는 손을 뻗었다.
그렇게 날갯짓하면, 언젠가는 가닿을는지.






각주
1) H&K USP. 1993년에 제작된 범용성 높은 자동권총.




유승재
https://blog.naver.com/db8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