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일기토 애장판 삽니다

이추휴
[나는 어릴 적 좋아하던 만화책이 애장판으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외출한다. 외출 일정엔 게임 친구와 처음으로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는 게임 친구에게 낯선 제안을 받는다. 그리곤 고민하며 만화책 애장판을 사러간다.]
나는 전기장판의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온기가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핸드폰엔 메신저 앱에서 온 알람이 계속해서 떠있었다. 자주 게임을 같이 하던 친구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마지막 대화는 40일 전이었다. 그의 얼굴이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데 그는 곧잘 닉네임을 변경하곤 해서 여러 이들에게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나는 그와 메신저를 통해 자주 게임상으로 모임을 가졌다. 여러 장르의 게임들을 오갔다. 마지막으로 했던 게임은 플레이어 둘이 사막을 거닐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퍼즐 게임이었다. 그리곤 매주 같은 게임을 계속하다 며칠 전에 게임상으로도 연락을 그만두었다. 서로 일정이 있던 탓이었다. 방금 전에 수신된 메시지에는 만나자는 연락이 와있었다. 온라인 상으로 알던 사이를 실제로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를 비롯해서 몇 명이 게임 모임에는 더 있었다. 우리 모임은 모두 무직이라는 공통점 아래 모인 사람들로, 서로 착잡한 농담을 자주 던졌다. 농담의 뒷면엔 우리들은 그냥 무직이 아니라 무직으로 나타난 온갖 무능한 인간상들의 집합체라는 합의가 있었다. 거기에는 어느정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탓에 게임 모임은 언제든지 동반자살계획모임으로 변신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미래를 생각하면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죽어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당장 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음이 언제나 내 뒤를 따라온다. 아마 만화책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화책을 사야했고 그날 외출하면 그와 만날 수 있었다. 어릴 적에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읽었던 만화책이 있다. 그 기이한 만화는 어린이용 학습만화도 아니었고 게다가 역사 분류 칸에 끼어있었다. 그 책을 읽는 이는 나 뿐인 듯 했다. 커서는 완전히 잊다가 어느날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절판된 지 한참되었고 중고는 한 권에 십 만원 가까이 들었었다. 그렇게 몇 년을 그 책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헌책방에도 없었고 다른 중고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었다. 간혹 4권이나 7권이 낱개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으나 도서관에 있었기에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 책이 얼마 전 애장판으로 새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서 박람회에서 사전구매를 할 수 있다고 들었기에 나는 외출을 계획했다. 나는 약속 당일 오전에 밖을 나섰다. 핸드폰으로 계속해서 지도를 찾았다. 한일만화교류도서박람회. 인터넷에도 만화 북페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니 길을 나서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핸드폰에 띄워진 책 정보 화면을 보며 괜히 손을 더 움켜쥐었다. 달팽이 일기토는 훌륭한 만화다. 찾아볼 수 있는 평가는 거의 없고 당황한 사람들이 절반이지만. 달팽이 일기토는 유럽의 중세 시대에 사는 어느 인간 기사의 기행 이야기를 다룬다. 기사 페데리코는 갓 기사가 된 몸으로 여행을 하다 어느 낯선 달팽이와 겨루어 패배한다. 달팽이는 페데리코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그 일로 감사와 흥미를 느낀 페데리코는 달팽이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모험담과 문명 사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결투에도 함께 한다. 페데리코는 결국 인간임에도 훌륭한 달팽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만화책은 온통 달팽이의 싸움과 사랑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이상한 내용을 어릴 적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보려했는지는 모르겠다. 재밌었다는 감상만이 강렬하게 있을 뿐이다. 다시 보게 됐을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갖게되는 것만으로도 내겐 의미가 있었다. 어릴 땐 몰랐지만 그 책엔 나름 맥락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필사하는 문서들에 갖가지 낙서를 해놓았는데, 그 낙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달팽이였다. 그냥 달팽이가 아니라 아주 센 달팽이. 인간 기사와 싸우고, 이기고, 칼을 쥐고 덤비는 달팽이들. 그 농담같은 낙서에 대해선 여러 가설이 있다. 죽음을 상징한다거나, 유대인이나 롬바르드 족을 상징한다거나, 아니면 진짜로 단순한 농담이거나. 그 사실에서 따온 만화는 커다란 달팽이가 돌아다니며 인간 마을을 침공하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자비를 구걸하는 인간 기사들을 비웃거나 기꺼이 살려주었다. 그 세계에 어린 나는 완전히 미혹되었다. 비가 온 날 다음이면 길가에 나온 달팽이들을 보며 그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꿈에서도 왕자나 용을 죽이는 영웅 대신 달팽이 기사가 나를 지켰다. 약속시간에 엇비슷하게 카페에 도착한 나는 그가 먼저 와있는지를 확인했다. 전화를 거니 근처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이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존댓말로 인사했으나 곧 긴장이 풀어져 반말로 돌아왔다. 그는 예상보다 더 훤칠한 외모를 가졌었다. 나처럼 평범한 인상을 가질 줄 알았다고 말을 건넸더니 그는 빈말하지 말라며 웃었다. 우리는 밀크티와 조각케이크를 주문했다. 우리는 근황 얘기와 예전에 했던 게임 얘기를 조금 나누었다. 서로의 외관에 관한 얘기도 나누었다. 그리곤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조금의 침묵을 견디다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거냐고. 우리는 특별히 가까웠으나 실제 만남을 가지길 원하진 않았었다. 그래서 보자고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무언가 용건이 따로 있을 거라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온라인 상에서만 보는 게임 친구에게 무슨 용건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지만 어쨌든 직접 물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업을 갖게되었다고 말했다. 이럴수가. 인생 망한 멍청이들로만 이뤄진 모임인 줄 알았더니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 이가 나온 것이다. 나는 놀라며 그를 축하했다. 그러자 어색한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평범한 직업이 아니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버튜버가 되었다고 했다. 버츄얼 유튜버. 그러니까 움직이는 캐릭터 일러스트를 갖고 방송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단 얘기였다. 그의 버튜버로서의 이름은 ‘아폴로 사우로크토노스Apollo Sauroktonos’였다. 검색해보니 태양신을 연상케하는 디자인의 금발 캐릭터가 그의 목소리를 한 채 말하는 동영상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나는 반신반의했으나 몇 개의 동영상 클립을 보고난 후엔 그가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태양신의 화신이라는 컨셉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구독자들도 꽤나 모았으며 방송도 매주하고 있었다. 그는 시청자들을 ‘퓌티아’라고 불렀고 후원금을 ‘헤카톰베’라 부르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9시마다 인터넷에서 태양신이 델포이 신탁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희랍 신화와 서브 컬쳐에 관심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어찌됐든 그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수익을 유지한다면 나로선 기쁜 일이었다. 그러자 대뜸 그가 내게 제안을 해왔다. 자신의 매니저가 되어주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상적인 활동에 대한 관리도 더불어서 말이다. 너무 오래 백수로 지내왔더니 규칙적인 삶과 직업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해주기엔 어려웠다. 버튜버라는 사실을 방금 밝혔는데 거기서 매니저를 권한다는 게. 몰론 시간이야 넘쳐났다. 내가 그 일을 맡는다고 해도 제대로 해낼 수가 있을지. 버튜버 업계에 대해 나보다는 더 잘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이 나을 거라든지. 그런 겁먹음 뒤에는 역시 뭔가 해야한다는 압박도 따라왔다. 당장 죽지 않는다면 돈을 버는 것이 낫다는 것은 분명했다. 갑작스럽고 수긍하기 어렵지만 내 상황에서 거절할만한 얘기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먼저 꺼내고 권유했던 그에게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결국 생각해보겠다는 어정쩡한 대답만을 남겼다. 당장 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잘 생각해보라는 얘기를 끝으로 우리는 카페에서 나왔다. 그는 이후에 어디로 갈거냐고 물었고 나는 만화 북페어에 간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구경하고 싶다며 동행을 요청했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괜히 인생을 허투로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떤 선택이 잘한 일이고 잘하지 않은 일인지 분별할 힘이 더이상 없다. 친한 친구의 매니저가 된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엔 가장 괜찮은 것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선택 앞에선 언제나 주저하게 된다. 관계도 없을 지난 과거의 실패들과 무능력함이 머리 속을 메운다. 내 과거들에 대해 줄줄히 설명하는 일만큼 수치스럽고 한심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굳이 입에 올리진 않겠다. 다만 모든 행동의 결론이 실패로 치환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지난 26년 생애가 그러했고 앞으로도 어느 정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실패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일이 내게 그런 영향을 주는 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택한 일과 선택하지 않은 일과 그저 가만히 있는 일 조차 모두 언젠가 실패로 치환된다. 실패가 집의 방문을 열고 처들어온다. 그게 내가 대학도 나오지 않은 채 백수로 인생을 연명하는 이유였다. 거기에 자기합리화가 얼마나 섞여있고 자기연민이 얼마나 섞여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겨울이 도시를 에워쌌고 기다렸다는 듯이 기침을 달고 살게 됐다. 도로를 걷고 횡단보도를 넘어 박람회장으로 나아갔다. 괜히 그와 거리를 더 좁혔다. 그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돌아다니는 태양신은 무슨 책을 사러가는 거냐며 내게 물었다. 나는 어릴 적 책의 얘기를 다시 한번 읊었다. 작가의 이름은 카규 오기소토였다. 蝸牛 おぎそと. 가명이 분명했고 뒷부분의 오기소토는 아마 오귀스트Auguste에서 따왔을 것이었다. 만화 내내 오귀스트라는 가상의 학자가 쓴 구절을 인용했기 때문이었다. 오기소토는 <달팽이 일기토>를 완결낸 이후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다른 가명이나 본명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인터넷을 온종일 뒤지는 일을 몇번이나 했지만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면 <달팽이 일기토>가 잘되면 사람을 잡아가 노예로 부리는 토끼들에 대해 그리고 싶다는 코멘트를 읽었던 것도 같은데 이제 와선 그것이 내가 스스로의 기억을 왜곡해 만든 내용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만화의 주인공인 기사 페데리코는 여행 내내 달팽이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돕거나 그들의 모험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 주를 이룬다. 그는 사소한 정도의 도움만 주거나 때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어떤 광전사 달팽이를 따라 기사들을 살해하는 일 앞에서도 그는 약간의 동정만 표시할 뿐 달팽이를 설득하지도 막지도 않는다. 인간 기사들의 목이 달팽이가 쥔 칼에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할 뿐이다. 페데리코는 인간들에 대한 이유없는 자비보다 달팽이들에 대한 존경을 선택했다. 인간은 먹고 뺏고 정복하기 위해 싸우지만 달팽이들에겐 전투는 좀 더 신성하고 고귀한 행위에 가까웠다. 가장 원시적인 결투는 짝짓기에서 비롯됐다. 달팽이들은 짝짓기 과정에서 알을 품는 쪽과 품지 않는 쪽을 정해야 한다. 그들은 자웅동체이기 때문이다. 서로간의 행동을 지켜보다 빈틈이 보이면 다가가 서로 몸을 비빈다. 긴박한 몸짓이 공기를 가른다. 생식공에 서로의 생식기관을 밀어넣고 나면 각자의 몸에서 창과 같은 돌기를 꺼내 서로를 찌르려 한다. 찔린 쪽은 알을 품게 된다. 모든 세대의 달팽이들이 세대를 이어갈 때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전투는 숙명이다. 강탈이나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닌 전투들. 달팽이들의 전투는 모두 이 일들에서 비롯됐다. 그들에게 전투란 세대를 잇는 신성한 일이며 중대사를 결정할 때 하는 엄숙한 과정이다. 이런 사고관이 가장 드러나는 장면은 3권 중반부터 비롯되는 결투재판이다. 결투재판은 본디 달팽이들의 문화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중세에 이르자 유럽에선 인간들 사이에서도 결투 재판이 유행했다. 두 달팽이는 또 다른 한 달팽이를 두고 누가 그와 짝을 이룰지 대결한다. 끝없는 논쟁 후에 결투로 짝을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양쪽은 미늘창을 들고 서로를 빙빙 돈다. 계속되는 정적 속에서 한 쪽이 먼저 창을 내지른다. 상대는 피하고 창을 쳐낸다. 결국 한쪽의 패각이 부서지고 나서야 승부가 끝이 난다. 혼자 만화에 대해 장황한 감상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란 걸 깨닫고 수치심이 들었을 무렵엔 이미 박람회장에 거의 도착해있었다. 커다란 건물에 현수막이 늘어져있었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하얀 벽면과 여러 색깔의 부스들이 대조되어 보였다. 사람들의 가방엔 캐릭터 키링이 줄줄이 달려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큰 포스터 두루마리와 무거운 짐이 든 에코백을 들고 다녔다. 대기 줄이 긴 부스를 지나치기도 했었고 사람이 적은 부스에 가서 구경을 하기도 했었다. 코스프레를 한 이들도 몇몇 보이는 듯 했다. 우리는 <달팽이 일기토> 부스가 있는 곳을 향했다. 구석 쪽에 부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른 만화 부스와 마찬가지로 캐릭터 일러스트와 굿즈가 부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 페데리코와 물감으로 패각을 장식하고 검과 창을 든 달팽이들. 왼편엔 장 드 크하포의 결투가 그려져있었다. 그는 성숙하고 강하기로 칭송받는 달팽이로 2권에서 어느 달팽이와 싸우게 된다. 어느 마을에서 그는 달팽이 하나와 창을 겨룬다. 그는 당당히 승리한다. 그런데 그 결투는 좀 더 특별했다. 그것은 번식을 위한 결투였다. 장 드 크하포는 풀숲에 쓰러진 상대 달팽이를 보며 말한다. 내가 알을 품겠다고. 내게 가시를 찌르라고. 페데리코는 2권 내내 장을 따라다니며 어째서 그러했는지를 물으려한다. 그 후 다시 만났을 때엔 몇 마리의 새끼와 함께 페데리코를 맞이한다. 그 아래엔 자크 르 샹피뇽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마을에서 달팽이 중 가장 존경받는 이였던 자크는 자신의 마을이 인간의 세력과 부딫혔을 때 패배의 대가로 자신의 몸을 내놓았다. 인간의 왕은 코클레아리움Cochlearium으로 잔혹하게 죽은 자크의 몸을 패각에서 파내어 산 채로 씹어먹었다. 왕은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더니 곧 쓰러졌다. 자크가 전날 독초를 먹었던 것이다. 왕은 달팽이가 이겨낸 독초를 소화하지 못해 죽었고 인간의 세력은 물러갔다. 부스엔 여러 굿즈가 있었지만 정작 애장판만은 보이지 않았다. 부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오늘치 재고가 생각보다 일찍 소진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기있을 줄은 몰랐는데. 담당자도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제라고 생각하며 옆에 있는 달팽이 인형을 샀다. 한 팔로 안아야 할만큼의 크기고 가격도 꽤 나가 아직까지 팔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내일 오면 다시 구할 수 있냐고 물었고 따로 내 것을 준비해놓겠다는 약속 아닌 약속을 받아놓고선 자리를 떠났다. <달팽이 일기토>가 컬트적인 인기 아래 인터넷을 떠도는 생각을 하며 잠시 기대에 부풀었지만 찾아보니 그렇게 많은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건물을 나왔다. 내 한쪽 팔에 든 달팽이 인형을 보며 그가 <달팽이 일기토>를 그렇게 좋아했었냐고 물었다. 나는 어릴 적엔 무척 좋아했고 크고 나서도 평소에는 생각이 없다가 어느 날부터 간헐적으로 그 만화에 천착하게 됐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난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모든 일을 하기 힘겨워했다. 그래서인진 몰라도 못된 짓을 좀 하고 다녔다. 그 중 하나는 인터넷 위키에서 중세 유럽 위인들의 문서마다 말미에 ‘그리고 어느 달팽이를 만나 참패했다.’라는 구절을 덧붙였었다. 누군가의 숙제에 그 구절이 몰래 들어가 있을 것을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며칠 안가서 대부분의 문서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나는 차단당했지만 몇몇 문서엔 여전히 그 구절이 남아있었다. 몰론 커선 일일히 수정 요청을 하여 돌려놨다. 그 얘기를 그에게, 태양신에게 비밀이라며 들려주니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 내 어깨를 세게 두드리며 웃었다. 돌아가는 길에 호두과자를 팔고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천막 안에 들어가 호두과자를 주문하며 기다렸다. 따뜻한 온기가 주위를 감쌌다. 사람들과 차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어쩐지 감상적으로 느껴졌다. 호두과자 봉투를 받은 후 우리는 다시 밖을 향해 걸었다. 나는 그에게 호두과자 하나를 건네달라 말했다. 그는 입에 호두과자 하나를 입에 물며 오물거리더니 봉지를 부스럭거렸다. 그러다가 멈칫 손을 빼더니 주위에 있던 화단에서 조약돌 하나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이걸 호두과자라고 생각해봐.”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는 조금 또다시 조금 웃더니 내게 제대로 된 호두과자를 꺼내주었다. 나는 호두과자를 깨물어먹으며 거리를 걸어나갔다. 나는 호두로 호두과자를 만들 수 있다면 다른 식물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예컨대 무화과라든가.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돌아가다보니 햇빛이 눈을 찔렀다. 햇빛이 가는 방향을 비추니 한결 덜 추워졌다. 얘기는 다시 그에 관한 화제로 돌아왔다. 그는 백수였고, 인생 망한 멍청이였으며, 태양신이고, 인터넷 방송인이고, 내 게임 친구였다. 그는 내게 아까의 요구에 대해 잘 생각해보라고, 당장은 답을 주지 않아도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지만 그가 내 실패와 무능을 알면서도 어째서 그런 요구를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냥 모든 것이 그의 농담이라 믿고싶었지만 그러기엔 말투가 사뭇 진지한 투였다. 그는 정말 희랍 신화의 신처럼 한낱 인간을 희롱하는 듯 했다. 나는 그의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태양의 끝으로 옮겼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는 것을 끝으로 갈라서야 했다. 우린 가만히 다리를 건넜다.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너는 곧 죽어야할 것 같다고. 자신도 죽어야할 것 같다고. 예전에 전화로 했던 얘기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이라면, 우리는 왜 당장 죽지 않을까? 만화책 때문에? 농담들 때문에? 게임 약속 때문에? 입을 열어 무언가 대답하려 했으나 계속해서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왜 당장 죽지 않지? 나는 왜 당장 이 다리 위에 올라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있지 않는 거지? 내가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는 물음을 알고있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왜 우린 이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건데?” 한번 뛰어내려봐. 내가 당황하자 그는 이기죽거리듯 웃다 농담이라며 말을 끝냈다. 나는 삶에는 사는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처럼 굴었다. 그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사는 이유를 찾은 건지. 아님 죽기 전까지의 날들을 세며 기다리고 있는 건지. 우린 그저 다리를 걷고 있는데 자살에 관한 농담을 나눌 때처럼 위태로운 것 같았다. 나는 한순간 그가 태양신보다는 악마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뜻 그의 요구에 응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안겨줄 것만 같은 불안에 나 또한 조금 이죽일 수 밖에 없었다. 다리를 다 건널 쯤에 그는 마지막으로 말을 이었다. 백수도 탈출하고 좋은 일 아니냐고. 너도 버츄얼 유튜버에 흥미있었지 않았냐고. 너무 부담갖지 말고 생각해보라고. 나는 네 채널과 네 생활 모두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말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은 듯 결정하면 알려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거절할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 때문에. 우리에겐 여전히 자명한 사실들이 있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그랬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줄 수 있다고.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그의 삶은 내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단 한순간도 한 부분도 내 것이어선 안됐다고. 그렇지만 우린 서로의 시간을 이미 너무 많이 뺏었고, 난 내가 그의 삶의 일부를 앗아갔다는 사실을 가끔씩 상기한다. 내가 거절하면 삶은 자연히 그의 것이 된다. 자신의 삶은 영원히 자신의 것이다. 삶을 남에게 줄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 구원되리라 믿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삶이 자신의 것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문처럼 외웠다. 그런 집착만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러니 그는 내가 거절할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에 돌아왔다. 몸에 힘이 빠져 옷가지를 아무대나 던져놓고는 그대로 몸을 침대에 맡겼다. 한참을 누워있다 일어나 옷가지를 정리하곤 정신을 추스렸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다 공책을 폈다. 글을 써야 했다. 나는 매일 글을 쓰곤 했다. 소설도 일기도 아닌 것을 썼다. 내가 주인공이고 나는 오늘 했던 일을 정리하고는 내일 할 일을 이어서 썼다. 소설의 내용은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완전한 허구였지만 나는 다음날 일어나서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했다. 공책의 글은 전부 그런 방식으로 쓰여있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너무 실패를 많이 한 나머지 실패한 원인을 찾으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모두가 말하듯 일기를 쓰는 일은 좋은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엔 일기를 써오라는 요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매일매일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학교를 갖고 집에 오면 텔레비전을 보며 멍을 때리다, 아니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책을 읽다가 잤고 매일이 똑같았다. 그런데 일기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나 무슨 TV 프로그램을 봤는지 쓰라고 하진 않기 때문에 정말 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이해할 수 있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 위해 일기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에 있었을 일을 만들기 위해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일기를 돌아보며 하루 하루를 글로 나타낼 수 있는 만큼 의미있는 하루로 만들기 위해 일기를 쓰라고 선생님은 요구한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매일 일기도 소설도 아닌 글을 써낸다. 실현장치로서의 일기를 발명한 것이다. 몇몇 예기치 않은 오류를 제외하면 나는 실현장치를 잘 이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있는 일을 만들기에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잘모르겠으나 정신을 차린 뒤엔 이미 습관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글을 적을 땐 언제나 낙서를 한다. 오늘도 실현장치를 쓰며 달팽이를 몇 마리 그렸다. <달팽이 일기토>의 배경엔 수도사들이 필사하던 문서에 그려진 달팽이들과 낙서들이 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까지 수많은 글들엔 그런 낙서 문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나는 <달팽이 일기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글에 달팽이를 그려넣는다. 그들의 의지와 문화를 잇기 위해. 중세 유럽의 의지를 잇는 작가라면 무릇 글에 달팽이 낙서를 집어넣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이 나만의 신조였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이부자리를 정돈한 뒤 침대에 누웠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계속 생각에 남았다. 인터넷에 그의 방송용 이름을 검색했다. 아폴로. 금발의 태양신이 웃으며 시청자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이 일을 감당할 자신이 나지 않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고 평생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것만으로 그가 나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나는 결정을 해야했다. 실현장치에 적은 것처럼. 할 말을 미리 입으로 외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이번엔 책을 사고 그와 만나기로 했다. 이런 일을 질질 끌고 싶진 않았다. 빨리 대답을 듣는 것이 그도 편할 테였다.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급히 준비하여 박람회장으로 갔다. 눈이 내리고 어제보다 더 쌀쌀해졌다. 부스 담당자와 만나 간단한 인사치레를 하고 책을 받아냈다. <달팽이 일기토 애장판>. 리메이크한 표지에 써진 제목 주변이 금박으로 빛났다. 밑으로는 달팽이들 가운데로 기사 페데리코가 그려져있었다. 13권이나 되다보니 무게가 있었다. 큰 가방을 갖고온 덕에 운반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걸을 수록 어깨가 아파왔다. 나는 어제 본 카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가 웃는 표정으로 날 보았다. 어딘가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음료를 주문한 뒤엔 어색한 공기가 계속해서 감돌았다. 어쨌든 나는 대답을 들려줘야 했다. 나는 입을 열기로 했다. 밀크티를 마시며 적당한 얘기를 꺼냈다. 몇 마디가 오갔다. 얘깃거리 삼아 실현장치가 쓰여진 노트를 보여줬었다. 달팽이 낙서에 대한 얘기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쓴 페이지에는 대답이 적혀있었다. 나는 거절할 준비를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런 말을 해야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네가 아닌데?” 그가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 소설-실현장치-의 주인공은 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해왔던 일만 비슷하지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나와 다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소설에는 내 버릇이나 성격이나 농담이 담겨있지 않다고. 그리고 무언가 여러가지를 짚어주었는데, 나는, 나는 노트의 페이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내 오늘 일과를 적어나간 글발 가장자리엔 달팽이가 그려져 있었다. 달팽이. 토끼. 정체를 모르는 괴물. 식물들. 기사들. 그리고 다시 달팽이. 실현장치는 계속 가동되었다. 실현장치의 그는 내가 거절할 줄을 앎에도 내게 매니저가 되달라며 권했고 나는 오늘까지 하루를 꼬박 생각하다 결국 거절했었다. 그런데 그는 실현장치 속이 아닌 이 카페에선 다른 말을 했고 그래서 나도 다른 대답을 했다. 그는 내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안겨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는 거절 끝에 있는 세계를 알고서도 기어이 말했고 나는 죽지 않는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언제든 우리 둘은 죽어버리는 게 분명하다. 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 그는 나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세계에 모든 것을 내줄 것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을. 나는 나의 최선으로 그의 최선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실현장치는 역시 말이 안되는 발명품이다. 나는 달팽이 낙서를 응시했다. 그리고 분명하게 다시 말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겨울의 햇살이 창가를 비추며 마름모들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녹아가는 바깥의 눈들을 바라보며 태양신의 계절이 오리라고 믿었다. 조각케이크 하나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넘겼다. 며칠 후 그에게 채널의 몇가지 주의사항과 매주 일과에 대한 내용을 건네받았다. 나는 그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매니저가 되었다. 나는 핸드폰을 잠깐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거실에는 태양신이 전기장판 위에 누워있다. 나는 전기장판 가장자리에 있던 달팽이 인형을 안아들고 손에 책을 집어든다. 나는 만화책을 읽는다. 달팽이는 일기토를 벌인다. 나는 아폴로 사우로크토노스를 위해 찬미하는 시를 바친다.
이추휴
나는 전기장판의 한가운데서 일어났다. 온기가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핸드폰엔 메신저 앱에서 온 알람이 계속해서 떠있었다. 자주 게임을 같이 하던 친구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마지막 대화는 40일 전이었다. 그의 얼굴이나 이름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닉네임으로 서로를 부르는데 그는 곧잘 닉네임을 변경하곤 해서 여러 이들에게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나는 그와 메신저를 통해 자주 게임상으로 모임을 가졌다. 여러 장르의 게임들을 오갔다. 마지막으로 했던 게임은 플레이어 둘이 사막을 거닐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퍼즐 게임이었다. 그리곤 매주 같은 게임을 계속하다 며칠 전에 게임상으로도 연락을 그만두었다. 서로 일정이 있던 탓이었다. 방금 전에 수신된 메시지에는 만나자는 연락이 와있었다. 온라인 상으로 알던 사이를 실제로 만나자는 연락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를 비롯해서 몇 명이 게임 모임에는 더 있었다. 우리 모임은 모두 무직이라는 공통점 아래 모인 사람들로, 서로 착잡한 농담을 자주 던졌다. 농담의 뒷면엔 우리들은 그냥 무직이 아니라 무직으로 나타난 온갖 무능한 인간상들의 집합체라는 합의가 있었다. 거기에는 어느정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탓에 게임 모임은 언제든지 동반자살계획모임으로 변신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나 또한 미래를 생각하면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죽어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당장 죽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음이 언제나 내 뒤를 따라온다. 아마 만화책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만화책을 사야했고 그날 외출하면 그와 만날 수 있었다. 어릴 적에 학교 도서관에서 자주 읽었던 만화책이 있다. 그 기이한 만화는 어린이용 학습만화도 아니었고 게다가 역사 분류 칸에 끼어있었다. 그 책을 읽는 이는 나 뿐인 듯 했다. 커서는 완전히 잊다가 어느날 기억이 나서 찾아보니 절판된 지 한참되었고 중고는 한 권에 십 만원 가까이 들었었다. 그렇게 몇 년을 그 책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헌책방에도 없었고 다른 중고서점이나 도서관에서도 볼 수 없었다. 간혹 4권이나 7권이 낱개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으나 도서관에 있었기에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 책이 얼마 전 애장판으로 새로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서 박람회에서 사전구매를 할 수 있다고 들었기에 나는 외출을 계획했다. 나는 약속 당일 오전에 밖을 나섰다. 핸드폰으로 계속해서 지도를 찾았다. 한일만화교류도서박람회. 인터넷에도 만화 북페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니 길을 나서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핸드폰에 띄워진 책 정보 화면을 보며 괜히 손을 더 움켜쥐었다. 달팽이 일기토는 훌륭한 만화다. 찾아볼 수 있는 평가는 거의 없고 당황한 사람들이 절반이지만. 달팽이 일기토는 유럽의 중세 시대에 사는 어느 인간 기사의 기행 이야기를 다룬다. 기사 페데리코는 갓 기사가 된 몸으로 여행을 하다 어느 낯선 달팽이와 겨루어 패배한다. 달팽이는 페데리코에게 자비를 베풀어주고, 그 일로 감사와 흥미를 느낀 페데리코는 달팽이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모험담과 문명 사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결투에도 함께 한다. 페데리코는 결국 인간임에도 훌륭한 달팽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만화책은 온통 달팽이의 싸움과 사랑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 이상한 내용을 어릴 적의 내가 무슨 생각으로 보려했는지는 모르겠다. 재밌었다는 감상만이 강렬하게 있을 뿐이다. 다시 보게 됐을 땐 어떨지 모르겠지만 갖게되는 것만으로도 내겐 의미가 있었다. 어릴 땐 몰랐지만 그 책엔 나름 맥락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수도사들은 자신들이 필사하는 문서들에 갖가지 낙서를 해놓았는데, 그 낙서에 자주 등장하는 것이 달팽이였다. 그냥 달팽이가 아니라 아주 센 달팽이. 인간 기사와 싸우고, 이기고, 칼을 쥐고 덤비는 달팽이들. 그 농담같은 낙서에 대해선 여러 가설이 있다. 죽음을 상징한다거나, 유대인이나 롬바르드 족을 상징한다거나, 아니면 진짜로 단순한 농담이거나. 그 사실에서 따온 만화는 커다란 달팽이가 돌아다니며 인간 마을을 침공하는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며 자비를 구걸하는 인간 기사들을 비웃거나 기꺼이 살려주었다. 그 세계에 어린 나는 완전히 미혹되었다. 비가 온 날 다음이면 길가에 나온 달팽이들을 보며 그들을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꿈에서도 왕자나 용을 죽이는 영웅 대신 달팽이 기사가 나를 지켰다. 약속시간에 엇비슷하게 카페에 도착한 나는 그가 먼저 와있는지를 확인했다. 전화를 거니 근처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이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존댓말로 인사했으나 곧 긴장이 풀어져 반말로 돌아왔다. 그는 예상보다 더 훤칠한 외모를 가졌었다. 나처럼 평범한 인상을 가질 줄 알았다고 말을 건넸더니 그는 빈말하지 말라며 웃었다. 우리는 밀크티와 조각케이크를 주문했다. 우리는 근황 얘기와 예전에 했던 게임 얘기를 조금 나누었다. 서로의 외관에 관한 얘기도 나누었다. 그리곤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나는 조금의 침묵을 견디다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왜 보자고 한거냐고. 우리는 특별히 가까웠으나 실제 만남을 가지길 원하진 않았었다. 그래서 보자고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무언가 용건이 따로 있을 거라 짐작할 수 밖에 없었다. 온라인 상에서만 보는 게임 친구에게 무슨 용건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지만 어쨌든 직접 물어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업을 갖게되었다고 말했다. 이럴수가. 인생 망한 멍청이들로만 이뤄진 모임인 줄 알았더니 드디어 탈출에 성공한 이가 나온 것이다. 나는 놀라며 그를 축하했다. 그러자 어색한 웃음으로 말을 이었다. 평범한 직업이 아니란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버튜버가 되었다고 했다. 버츄얼 유튜버. 그러니까 움직이는 캐릭터 일러스트를 갖고 방송을 하며 돈을 벌고 있단 얘기였다. 그의 버튜버로서의 이름은 ‘아폴로 사우로크토노스Apollo Sauroktonos’였다. 검색해보니 태양신을 연상케하는 디자인의 금발 캐릭터가 그의 목소리를 한 채 말하는 동영상이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었다. 나는 반신반의했으나 몇 개의 동영상 클립을 보고난 후엔 그가 맞다는 것을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태양신의 화신이라는 컨셉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구독자들도 꽤나 모았으며 방송도 매주하고 있었다. 그는 시청자들을 ‘퓌티아’라고 불렀고 후원금을 ‘헤카톰베’라 부르고 있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9시마다 인터넷에서 태양신이 델포이 신탁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가 희랍 신화와 서브 컬쳐에 관심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며 감탄사를 늘어놓았다. 어찌됐든 그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수익을 유지한다면 나로선 기쁜 일이었다. 그러자 대뜸 그가 내게 제안을 해왔다. 자신의 매니저가 되어주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상적인 활동에 대한 관리도 더불어서 말이다. 너무 오래 백수로 지내왔더니 규칙적인 삶과 직업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힘들다는 것이었다. 나는 선뜻 대답을 해주기엔 어려웠다. 버튜버라는 사실을 방금 밝혔는데 거기서 매니저를 권한다는 게. 몰론 시간이야 넘쳐났다. 내가 그 일을 맡는다고 해도 제대로 해낼 수가 있을지. 버튜버 업계에 대해 나보다는 더 잘 아는 사람이 하는 것이 나을 거라든지. 그런 겁먹음 뒤에는 역시 뭔가 해야한다는 압박도 따라왔다. 당장 죽지 않는다면 돈을 버는 것이 낫다는 것은 분명했다. 갑작스럽고 수긍하기 어렵지만 내 상황에서 거절할만한 얘기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런 사실을 먼저 꺼내고 권유했던 그에게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쉬운 일도 아니었다. 나는 결국 생각해보겠다는 어정쩡한 대답만을 남겼다. 당장 거절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다며 잘 생각해보라는 얘기를 끝으로 우리는 카페에서 나왔다. 그는 이후에 어디로 갈거냐고 물었고 나는 만화 북페어에 간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도 구경하고 싶다며 동행을 요청했다.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괜히 인생을 허투로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떤 선택이 잘한 일이고 잘하지 않은 일인지 분별할 힘이 더이상 없다. 친한 친구의 매니저가 된다는 것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엔 가장 괜찮은 것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선택 앞에선 언제나 주저하게 된다. 관계도 없을 지난 과거의 실패들과 무능력함이 머리 속을 메운다. 내 과거들에 대해 줄줄히 설명하는 일만큼 수치스럽고 한심한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굳이 입에 올리진 않겠다. 다만 모든 행동의 결론이 실패로 치환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지난 26년 생애가 그러했고 앞으로도 어느 정도 그러할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실패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일이 내게 그런 영향을 주는 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선택한 일과 선택하지 않은 일과 그저 가만히 있는 일 조차 모두 언젠가 실패로 치환된다. 실패가 집의 방문을 열고 처들어온다. 그게 내가 대학도 나오지 않은 채 백수로 인생을 연명하는 이유였다. 거기에 자기합리화가 얼마나 섞여있고 자기연민이 얼마나 섞여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겨울이 도시를 에워쌌고 기다렸다는 듯이 기침을 달고 살게 됐다. 도로를 걷고 횡단보도를 넘어 박람회장으로 나아갔다. 괜히 그와 거리를 더 좁혔다. 그는, 사이버스페이스를 돌아다니는 태양신은 무슨 책을 사러가는 거냐며 내게 물었다. 나는 어릴 적 책의 얘기를 다시 한번 읊었다. 작가의 이름은 카규 오기소토였다. 蝸牛 おぎそと. 가명이 분명했고 뒷부분의 오기소토는 아마 오귀스트Auguste에서 따왔을 것이었다. 만화 내내 오귀스트라는 가상의 학자가 쓴 구절을 인용했기 때문이었다. 오기소토는 <달팽이 일기토>를 완결낸 이후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았다. 다른 가명이나 본명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인터넷을 온종일 뒤지는 일을 몇번이나 했지만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릴 적 기억을 더듬으면 <달팽이 일기토>가 잘되면 사람을 잡아가 노예로 부리는 토끼들에 대해 그리고 싶다는 코멘트를 읽었던 것도 같은데 이제 와선 그것이 내가 스스로의 기억을 왜곡해 만든 내용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만화의 주인공인 기사 페데리코는 여행 내내 달팽이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이야기를 돕거나 그들의 모험을 곁에서 지켜보는 일이 주를 이룬다. 그는 사소한 정도의 도움만 주거나 때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어떤 광전사 달팽이를 따라 기사들을 살해하는 일 앞에서도 그는 약간의 동정만 표시할 뿐 달팽이를 설득하지도 막지도 않는다. 인간 기사들의 목이 달팽이가 쥔 칼에 떨어져나가는 모습을 상세하게 묘사할 뿐이다. 페데리코는 인간들에 대한 이유없는 자비보다 달팽이들에 대한 존경을 선택했다. 인간은 먹고 뺏고 정복하기 위해 싸우지만 달팽이들에겐 전투는 좀 더 신성하고 고귀한 행위에 가까웠다. 가장 원시적인 결투는 짝짓기에서 비롯됐다. 달팽이들은 짝짓기 과정에서 알을 품는 쪽과 품지 않는 쪽을 정해야 한다. 그들은 자웅동체이기 때문이다. 서로간의 행동을 지켜보다 빈틈이 보이면 다가가 서로 몸을 비빈다. 긴박한 몸짓이 공기를 가른다. 생식공에 서로의 생식기관을 밀어넣고 나면 각자의 몸에서 창과 같은 돌기를 꺼내 서로를 찌르려 한다. 찔린 쪽은 알을 품게 된다. 모든 세대의 달팽이들이 세대를 이어갈 때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전투는 숙명이다. 강탈이나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닌 전투들. 달팽이들의 전투는 모두 이 일들에서 비롯됐다. 그들에게 전투란 세대를 잇는 신성한 일이며 중대사를 결정할 때 하는 엄숙한 과정이다. 이런 사고관이 가장 드러나는 장면은 3권 중반부터 비롯되는 결투재판이다. 결투재판은 본디 달팽이들의 문화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중세에 이르자 유럽에선 인간들 사이에서도 결투 재판이 유행했다. 두 달팽이는 또 다른 한 달팽이를 두고 누가 그와 짝을 이룰지 대결한다. 끝없는 논쟁 후에 결투로 짝을 결정하기로 한 것이다. 양쪽은 미늘창을 들고 서로를 빙빙 돈다. 계속되는 정적 속에서 한 쪽이 먼저 창을 내지른다. 상대는 피하고 창을 쳐낸다. 결국 한쪽의 패각이 부서지고 나서야 승부가 끝이 난다. 혼자 만화에 대해 장황한 감상을 늘어놓고 있는 중이란 걸 깨닫고 수치심이 들었을 무렵엔 이미 박람회장에 거의 도착해있었다. 커다란 건물에 현수막이 늘어져있었고 오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하얀 벽면과 여러 색깔의 부스들이 대조되어 보였다. 사람들의 가방엔 캐릭터 키링이 줄줄이 달려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큰 포스터 두루마리와 무거운 짐이 든 에코백을 들고 다녔다. 대기 줄이 긴 부스를 지나치기도 했었고 사람이 적은 부스에 가서 구경을 하기도 했었다. 코스프레를 한 이들도 몇몇 보이는 듯 했다. 우리는 <달팽이 일기토> 부스가 있는 곳을 향했다. 구석 쪽에 부스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른 만화 부스와 마찬가지로 캐릭터 일러스트와 굿즈가 부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기사 페데리코와 물감으로 패각을 장식하고 검과 창을 든 달팽이들. 왼편엔 장 드 크하포의 결투가 그려져있었다. 그는 성숙하고 강하기로 칭송받는 달팽이로 2권에서 어느 달팽이와 싸우게 된다. 어느 마을에서 그는 달팽이 하나와 창을 겨룬다. 그는 당당히 승리한다. 그런데 그 결투는 좀 더 특별했다. 그것은 번식을 위한 결투였다. 장 드 크하포는 풀숲에 쓰러진 상대 달팽이를 보며 말한다. 내가 알을 품겠다고. 내게 가시를 찌르라고. 페데리코는 2권 내내 장을 따라다니며 어째서 그러했는지를 물으려한다. 그 후 다시 만났을 때엔 몇 마리의 새끼와 함께 페데리코를 맞이한다. 그 아래엔 자크 르 샹피뇽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마을에서 달팽이 중 가장 존경받는 이였던 자크는 자신의 마을이 인간의 세력과 부딫혔을 때 패배의 대가로 자신의 몸을 내놓았다. 인간의 왕은 코클레아리움Cochlearium으로 잔혹하게 죽은 자크의 몸을 패각에서 파내어 산 채로 씹어먹었다. 왕은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하다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더니 곧 쓰러졌다. 자크가 전날 독초를 먹었던 것이다. 왕은 달팽이가 이겨낸 독초를 소화하지 못해 죽었고 인간의 세력은 물러갔다. 부스엔 여러 굿즈가 있었지만 정작 애장판만은 보이지 않았다. 부스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오늘치 재고가 생각보다 일찍 소진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인기있을 줄은 몰랐는데. 담당자도 같은 생각이었나보다. 미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대체제라고 생각하며 옆에 있는 달팽이 인형을 샀다. 한 팔로 안아야 할만큼의 크기고 가격도 꽤 나가 아직까지 팔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내일 오면 다시 구할 수 있냐고 물었고 따로 내 것을 준비해놓겠다는 약속 아닌 약속을 받아놓고선 자리를 떠났다. <달팽이 일기토>가 컬트적인 인기 아래 인터넷을 떠도는 생각을 하며 잠시 기대에 부풀었지만 찾아보니 그렇게 많은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건물을 나왔다. 내 한쪽 팔에 든 달팽이 인형을 보며 그가 <달팽이 일기토>를 그렇게 좋아했었냐고 물었다. 나는 어릴 적엔 무척 좋아했고 크고 나서도 평소에는 생각이 없다가 어느 날부터 간헐적으로 그 만화에 천착하게 됐었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시절에도 난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모든 일을 하기 힘겨워했다. 그래서인진 몰라도 못된 짓을 좀 하고 다녔다. 그 중 하나는 인터넷 위키에서 중세 유럽 위인들의 문서마다 말미에 ‘그리고 어느 달팽이를 만나 참패했다.’라는 구절을 덧붙였었다. 누군가의 숙제에 그 구절이 몰래 들어가 있을 것을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좋았다. 며칠 안가서 대부분의 문서가 원래대로 돌아오고 나는 차단당했지만 몇몇 문서엔 여전히 그 구절이 남아있었다. 몰론 커선 일일히 수정 요청을 하여 돌려놨다. 그 얘기를 그에게, 태양신에게 비밀이라며 들려주니 그는 미묘한 표정을 짓다 내 어깨를 세게 두드리며 웃었다. 돌아가는 길에 호두과자를 팔고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천막 안에 들어가 호두과자를 주문하며 기다렸다. 따뜻한 온기가 주위를 감쌌다. 사람들과 차들이 지나다니는 것이 어쩐지 감상적으로 느껴졌다. 호두과자 봉투를 받은 후 우리는 다시 밖을 향해 걸었다. 나는 그에게 호두과자 하나를 건네달라 말했다. 그는 입에 호두과자 하나를 입에 물며 오물거리더니 봉지를 부스럭거렸다. 그러다가 멈칫 손을 빼더니 주위에 있던 화단에서 조약돌 하나를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이걸 호두과자라고 생각해봐.” 나는 당연히 거절했다. 그는 조금 또다시 조금 웃더니 내게 제대로 된 호두과자를 꺼내주었다. 나는 호두과자를 깨물어먹으며 거리를 걸어나갔다. 나는 호두로 호두과자를 만들 수 있다면 다른 식물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예컨대 무화과라든가.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돌아가다보니 햇빛이 눈을 찔렀다. 햇빛이 가는 방향을 비추니 한결 덜 추워졌다. 얘기는 다시 그에 관한 화제로 돌아왔다. 그는 백수였고, 인생 망한 멍청이였으며, 태양신이고, 인터넷 방송인이고, 내 게임 친구였다. 그는 내게 아까의 요구에 대해 잘 생각해보라고, 당장은 답을 주지 않아도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렇지만 그가 내 실패와 무능을 알면서도 어째서 그런 요구를 하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냥 모든 것이 그의 농담이라 믿고싶었지만 그러기엔 말투가 사뭇 진지한 투였다. 그는 정말 희랍 신화의 신처럼 한낱 인간을 희롱하는 듯 했다. 나는 그의 머리칼을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태양의 끝으로 옮겼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는 것을 끝으로 갈라서야 했다. 우린 가만히 다리를 건넜다.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너는 곧 죽어야할 것 같다고. 자신도 죽어야할 것 같다고. 예전에 전화로 했던 얘기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이라면, 우리는 왜 당장 죽지 않을까? 만화책 때문에? 농담들 때문에? 게임 약속 때문에? 입을 열어 무언가 대답하려 했으나 계속해서 머뭇거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왜 당장 죽지 않지? 나는 왜 당장 이 다리 위에 올라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있지 않는 거지? 내가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는 물음을 알고있다는 듯이 그는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왜 우린 이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지 않는 건데?” 한번 뛰어내려봐. 내가 당황하자 그는 이기죽거리듯 웃다 농담이라며 말을 끝냈다. 나는 삶에는 사는 이유가 있어야만 할 것처럼 굴었다. 그도 그랬는지 모르겠다. 사는 이유를 찾은 건지. 아님 죽기 전까지의 날들을 세며 기다리고 있는 건지. 우린 그저 다리를 걷고 있는데 자살에 관한 농담을 나눌 때처럼 위태로운 것 같았다. 나는 한순간 그가 태양신보다는 악마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뜻 그의 요구에 응하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안겨줄 것만 같은 불안에 나 또한 조금 이죽일 수 밖에 없었다. 다리를 다 건널 쯤에 그는 마지막으로 말을 이었다. 백수도 탈출하고 좋은 일 아니냐고. 너도 버츄얼 유튜버에 흥미있었지 않았냐고. 너무 부담갖지 말고 생각해보라고. 나는 네 채널과 네 생활 모두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말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은 듯 결정하면 알려달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거절할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기 때문에. 우리에겐 여전히 자명한 사실들이 있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언젠가 그가 그랬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 자신의 모든 것을 내게 줄 수 있다고.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그의 삶은 내 것이 아니라 그의 것이어야만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단 한순간도 한 부분도 내 것이어선 안됐다고. 그렇지만 우린 서로의 시간을 이미 너무 많이 뺏었고, 난 내가 그의 삶의 일부를 앗아갔다는 사실을 가끔씩 상기한다. 내가 거절하면 삶은 자연히 그의 것이 된다. 자신의 삶은 영원히 자신의 것이다. 삶을 남에게 줄 수야 있겠지만, 그래서 구원되리라 믿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삶이 자신의 것으로 남아야 한다고 주문처럼 외웠다. 그런 집착만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러니 그는 내가 거절할 것을 짐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에 돌아왔다. 몸에 힘이 빠져 옷가지를 아무대나 던져놓고는 그대로 몸을 침대에 맡겼다. 한참을 누워있다 일어나 옷가지를 정리하곤 정신을 추스렸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시간을 보내다 공책을 폈다. 글을 써야 했다. 나는 매일 글을 쓰곤 했다. 소설도 일기도 아닌 것을 썼다. 내가 주인공이고 나는 오늘 했던 일을 정리하고는 내일 할 일을 이어서 썼다. 소설의 내용은 과거에서 미래로 넘어가는 순간부터 완전한 허구였지만 나는 다음날 일어나서 소설의 내용을 그대로 따라했다. 공책의 글은 전부 그런 방식으로 쓰여있었다. 어쩌다가 이런 일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너무 실패를 많이 한 나머지 실패한 원인을 찾으려 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모두가 말하듯 일기를 쓰는 일은 좋은 것이다. 초등학생 시절엔 일기를 써오라는 요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매일매일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학교를 갖고 집에 오면 텔레비전을 보며 멍을 때리다, 아니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책을 읽다가 잤고 매일이 똑같았다. 그런데 일기에 무슨 책을 읽었는지나 무슨 TV 프로그램을 봤는지 쓰라고 하진 않기 때문에 정말 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젠 이해할 수 있다. 하루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 위해 일기를 쓰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에 있었을 일을 만들기 위해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일기를 돌아보며 하루 하루를 글로 나타낼 수 있는 만큼 의미있는 하루로 만들기 위해 일기를 쓰라고 선생님은 요구한 것이었다. 나는 그래서 매일 일기도 소설도 아닌 글을 써낸다. 실현장치로서의 일기를 발명한 것이다. 몇몇 예기치 않은 오류를 제외하면 나는 실현장치를 잘 이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있는 일을 만들기에 얼마나 성공적인지는 잘모르겠으나 정신을 차린 뒤엔 이미 습관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글을 적을 땐 언제나 낙서를 한다. 오늘도 실현장치를 쓰며 달팽이를 몇 마리 그렸다. <달팽이 일기토>의 배경엔 수도사들이 필사하던 문서에 그려진 달팽이들과 낙서들이 있다. 인쇄술이 발달하기 이전까지 수많은 글들엔 그런 낙서 문화가 존재했던 것이다. 나는 <달팽이 일기토>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글에 달팽이를 그려넣는다. 그들의 의지와 문화를 잇기 위해. 중세 유럽의 의지를 잇는 작가라면 무릇 글에 달팽이 낙서를 집어넣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이 나만의 신조였다. 모든 일과를 마치고 이부자리를 정돈한 뒤 침대에 누웠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계속 생각에 남았다. 인터넷에 그의 방송용 이름을 검색했다. 아폴로. 금발의 태양신이 웃으며 시청자들과 얘기하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이 일을 감당할 자신이 나지 않았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고 평생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는 그와 함께하는 것만으로 그가 나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나는 결정을 해야했다. 실현장치에 적은 것처럼. 할 말을 미리 입으로 외며 천천히 잠에 들었다. 이번엔 책을 사고 그와 만나기로 했다. 이런 일을 질질 끌고 싶진 않았다. 빨리 대답을 듣는 것이 그도 편할 테였다.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급히 준비하여 박람회장으로 갔다. 눈이 내리고 어제보다 더 쌀쌀해졌다. 부스 담당자와 만나 간단한 인사치레를 하고 책을 받아냈다. <달팽이 일기토 애장판>. 리메이크한 표지에 써진 제목 주변이 금박으로 빛났다. 밑으로는 달팽이들 가운데로 기사 페데리코가 그려져있었다. 13권이나 되다보니 무게가 있었다. 큰 가방을 갖고온 덕에 운반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걸을 수록 어깨가 아파왔다. 나는 어제 본 카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가 웃는 표정으로 날 보았다. 어딘가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음료를 주문한 뒤엔 어색한 공기가 계속해서 감돌았다. 어쨌든 나는 대답을 들려줘야 했다. 나는 입을 열기로 했다. 밀크티를 마시며 적당한 얘기를 꺼냈다. 몇 마디가 오갔다. 얘깃거리 삼아 실현장치가 쓰여진 노트를 보여줬었다. 달팽이 낙서에 대한 얘기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쓴 페이지에는 대답이 적혀있었다. 나는 거절할 준비를 했다. 미안하지만 나는 해낼 수가 없을 것 같아. 그런 말을 해야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네가 아닌데?” 그가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이 소설-실현장치-의 주인공은 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해왔던 일만 비슷하지 그 외에는 모든 것이 나와 다른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소설에는 내 버릇이나 성격이나 농담이 담겨있지 않다고. 그리고 무언가 여러가지를 짚어주었는데, 나는, 나는 노트의 페이지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내 오늘 일과를 적어나간 글발 가장자리엔 달팽이가 그려져 있었다. 달팽이. 토끼. 정체를 모르는 괴물. 식물들. 기사들. 그리고 다시 달팽이. 실현장치는 계속 가동되었다. 실현장치의 그는 내가 거절할 줄을 앎에도 내게 매니저가 되달라며 권했고 나는 오늘까지 하루를 꼬박 생각하다 결국 거절했었다. 그런데 그는 실현장치 속이 아닌 이 카페에선 다른 말을 했고 그래서 나도 다른 대답을 했다. 그는 내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안겨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는 거절 끝에 있는 세계를 알고서도 기어이 말했고 나는 죽지 않는 이유를 알아야만 했다. 언제든 우리 둘은 죽어버리는 게 분명하다. 나는 반드시 실패할 것이고 그는 나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작은 세계에 모든 것을 내줄 것이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을. 나는 나의 최선으로 그의 최선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실현장치는 역시 말이 안되는 발명품이다. 나는 달팽이 낙서를 응시했다. 그리고 분명하게 다시 말했다.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웃었다. 겨울의 햇살이 창가를 비추며 마름모들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녹아가는 바깥의 눈들을 바라보며 태양신의 계절이 오리라고 믿었다. 조각케이크 하나를 포크로 집어 입에 넘겼다. 며칠 후 그에게 채널의 몇가지 주의사항과 매주 일과에 대한 내용을 건네받았다. 나는 그의 권유를 받아들이고 매니저가 되었다. 나는 핸드폰을 잠깐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거실에는 태양신이 전기장판 위에 누워있다. 나는 전기장판 가장자리에 있던 달팽이 인형을 안아들고 손에 책을 집어든다. 나는 만화책을 읽는다. 달팽이는 일기토를 벌인다. 나는 아폴로 사우로크토노스를 위해 찬미하는 시를 바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