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큘라의 성 외 2편

토피넛




드라큘라의 성
우리는 밤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살짝 벌어진 창틈으로 언젠가 한번 몰아 쉬었던 한숨이 되돌아옵니다
애틋한 체온이 미치도록 시린 그런 날입니다
시체에는 저마다의 온도가 있어 죽는 건 같아도 사람은 다르니까 그러니 이름을 붙여주자 삶에 있을 때와는 다른 이름을
그리고 나는 '그'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그를 바꿔 입고 그의 하나뿐인 모직 코트를 이리저리 만져봅니다
겨울이라기엔 얇아요 얇아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아요 두 번만 뛰면 튀어나오겠군요 나의 심장이 핏줄에 휘감겨진 체온 전부가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아픈 것이, 죽음을 사랑하게 된 걸까 싶었습니다

타인을 먹고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나를 좀먹는 일
오염된 곰팡이를 집어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는 일
재가 되기를 기다려도 피가 솟구치고 만다
우물처럼 모아둘 수도 없는데 계속 피어나버리는 겨울 장미가 된다
낮을 쓸고 다니는 유령이 되어도 낮의 인간과 사귈 수 없는 것이 외로움보다 증오에 가까워져도 멈출 수 없는
월식이 다가온다

관 속에 들어가는 것도 연습할 수 있을까
대답 없는 어둠이 나의 어디까지를 잘라 먹었을지 나는 보지 못합니다
목소리조차 잃고마는 나의 사랑은 여기 저기에 흩뿌려지고 나서야 가닿습니다
나의 마지막 세포는 유언을 남겼으나 끝내 잊혀질 것입니다
안녕.




평행


꼭 한 마디만 잘라야 해
다듬을 때마다 네가 가진 중력이 사라지는 게 느껴진다
얼마나 다듬어야 너는 사라지지 않고 너의 무게만이 사라질 수 있나
고민하며 한 마디보다 더 자른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삐뚤게 그어진 적도에 그만 아, 하고 만다
너는 뒤돌아보지 못하고 왜, 하고 묻는다
오고가는 이야기 속에서는 침묵이 더 비대한 이야기를 갖는다
예를 들면 ……같은, 그리고 ……같은
어제 신문에는 이미 낡아버린 사람들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너의 머리카락은 그 위에 몸을 포개어 세상이 꺼지는 소리를 낸다
종말이 속삭인다
살아있는데도 이렇게 잘라 버리는 건 안타깝지 않아?
둘 중 하나가 물었고 그래도 아프지는 않으니까
둘 중 하나는 생각했다
키 작은 화장대 거울은 모서리로 내 얼굴을 잘라먹었다
그래도 살아있었지만 죽은 것보다 애매했다
너의 머리와 내 손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엿보다가 손가락을 베였다
너의 머리가 내 손과 한몸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네가 머리를 스스로 자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일까,
쓰라림은 후에 찾아왔다
너는 거울 속 나를 보며 괜찮냐고 묻는다
나는 어느 쪽의 너에게도 대답하지 못했다




개인적인 것이 개인적이지 않아서


이사를 가기로 했습니다
3층에 사는 꼬마가 벽에 붙은 전단지를 전부 떼어버려서가 아닙니다
옆집 사는 남자가 단 한 번도 문을 열고 나온 적이 없기에 실은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기 때문도 아닙니다
8층에는 주인 없이 개와 고양이가 같이 살고 있고, 어제는 소란스럽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받았습니다
11층에는 서로의 심장을 움켜쥔 채 보험비가 얼마나 나올지 정산하는 부부가, 실은 부부가 아닌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맨 위층에는 안부인사가 살았습니다 이제는 살지 않지만 언제나 그곳에 살고 있는 인사가 반찬을 두고 갔습니다
잘 살고 있지? 그렇게 묻고 떠났습니다
그래서 나도 떠납니다
먼지가 쌓인 것과 아닌 것이 같은 집에 들어가서 살 생각을 하니 마음이 복잡합니다 뒤엉킵니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가도 웃음이 먼저 나옵니다
젖은 손으로 만지자 먹물이 되어 흘러내립니다
새 집 창문에도 그런 자국이 많습니다 흘러내려서 고여버린, 그러다가 끊긴 철길들…….
이미 더 나아갈 곳이 없는데도 자갈을 밟으며 걸어나갔던 지난 겨울을 기억합니다
계절이 지났는데도 나를 찾아오던 플라타너스와 서로의 손을 잡으며 바스라져 갔던 지난 날은
벌써 지나쳐버렸군요
손톱깎이가 부러질 때까지 죽은 것을 모조리 잘라내어 바닥을 기어다니는 그림자에게 먹여 주었습니다
끝까지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이 자라납니다
오늘을 부수면 내일이 뿌리내리고, 다시 오늘이 되면 잘게 부수어집니다
아무리 쫓아가도 개인적인 것이 개인적이지 않아서 자꾸 늪 위에 나를 심습니다
계속 오늘을 심습니다





토피넛
저는 항상 주저하면서 계획만 짜는 사람이었는데, 이제부턴 그러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몽땅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