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크리스마스

조소민


Y를 누르면 아이템을 주머니에 넣을 수 있다. A는 행동 키고, B는 캐릭터의 대사를 빠르게 넘겨준다. 몇 달 만에 닌텐도 스위치를 켜서 게임 속 내가 만든 섬에 사는 동물 주민들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다. 열 명의 주민들 모두 내가 너무 그리웠다고, 어디서 뭘 하느라 몇 개월 동안 코빼기도 안 보였냐고 물었다. 어떤 주민은 자길 잊어버린 줄 알았다고 뿅뿅 거리는 효과음을 내며 눈물을 흩날리기도 했다.

게임을 시작하고 한 시간 동안은 집중이 잘 되었다. 원하지 않는 곳에 잔뜩 번식한 꽃을 이십 분 넘게 삽으로 퍼내고, 그 자리에 각종 책 아이템을 배치하며 야외 도서관으로 꾸몄다. 한창 공간 꾸미기에 열중하고 있을 때, 사슴 주민 하나가 달려와 먼저 말을 걸었다. 우리 둘만의 인사말을 바꿔 달라는 용건이었다. ‘알았어!’를 선택하자 인사말을 입력할 수 있는 키패드가 화면에 떠올랐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인사말. 인사말이라.

불현듯 몇 시간 전 참여했던 회의의 마지막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그동안 고생했다고, ‘뽀큐’로는 함께 하지 않게 되었지만 너의 개인적인 삶을 응원한다는 마지막 ‘인사말’. 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가방을 챙겨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마지막까지 뽀큐는 뽀큐스럽구나.

뽀큐는 For Queer를 줄인 말로, 내가 일 년 반 동안 속해있던 퀴어 활동가 연대체이며, 윤호가 부대표로 있는 곳이었다. 윤호와는 학교 퀴어 동아리에서 몇 번 인사만 한 사이였는데, 어느 날 연락해 와서는 디자인으로 활동을 함께 해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당시에 난 사람을 잘 만나지도 않았고 수익은 거의 외주를 통해 들어오고 있어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었다. 졸업 후 두 달 동안 그렇게 살고 있자니 집이 집 같지가 않고 갑갑했다. 일부러라도 주기적으로 콧구멍에 바람을 쐬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윤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기대대로 뽀큐는 주기적으로 날 집 밖으로 끌어내 주었다.

대학교 퀴어 동아리에 잠깐 속해있던 것 말고는 정치적인 활동이랄 것을 해본 적 없어서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성소수자라면 흔하게 겪을 수 있는 공통된 경험들과 우리끼리만 통하는 농담들이 금방 유대감을 만들어 주었다. 트위터 프로필 소갯말에 ‘뽀큐 소속’이라는 말을 추가했고, 내가 디자인한 각종 행사 웹자보가 천 번 넘게 리트윗되기도 했다. 큰 행사를 준비할 땐 조금 싸우기도 하고 일이 틀어지기도 했지만, 당시의 나에겐 그조차도 스스로 그 단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더욱 일깨워주었다. 그때 난 넘실대는 소속감 속에 풍덩 빠져 그곳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일 년여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동안 뽀큐에는 여러 사람이 빠져나가고, 들어오기도 했다. 탈퇴하는 것도 가입하는 것도 그다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누군가가 새로 들어올 때에는 그가 이전에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 혹시나 퀴어 계에서 범죄를 저지른 적 없는지, 퀴어 당사자성이 있는지 등을 검토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살펴봤다. 그 일은 주로 윤호의 몫이었다.

나는 그중에서도 ‘퀴어 당사자성’이 있는지를 검토하는 방식에 늘 의문을 제기하고는 했다. 처음에는 그걸 검토하는 것 자체에 이의를 제기했다. 검토라고 해봤자 SNS나 활동 행적을 살피는 게 다인데, 그걸로 어떻게 당사자성을 확보할 것이며 또 당사자성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 있냐는 의견을 열심히 전했다. 신규를 받을 때마다 거쳐야 하는 과정치고는 꼭 필요해 보이지 않았다.

활동가들은 거의 윤호의 편을 들었다. 토론을 나눌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 들어 나도 끝내는 동의하는 시늉을 해버렸다. 퀴어 활동가 단체이니 퀴어 당사자에게 가입 기회를 더 많이 주어야 한다는 그럴싸한 결론이 나왔다.

아니. 사실 그건 다른 활동가들에게나 그럴싸했지, 나는 계속 그 결론이 불편했다. 그렇지만 티 내지 않았다. 언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어두워지는 동료들의 낯빛을 보며, 그들과의 관계가 틀어질까 겁났기 때문이다. 나에겐 뽀큐가 전부였다. 뽀큐와 틀어지면 혼자가 될 거고, 그러면 또다시 집에 틀어박히게 될 것이었다. 조금 거슬리는 활동가 모집 절차 따위, 모집 기간 동안 잠깐 불편해하고 말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잠깐동안의 기간도 버티지 못했다. 한창 신규 활동가 지원 신청이 들어오던 어느 날, 윤호가 갑자기 문서 하나를 보내더니 곧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 과 동기였던 박민희라는 애가 이번 활동가 모집에 지원했는데, SNS를 살펴보니 아무래도 남자친구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윤호가 보낸 문서는 민희의 지원서였다. 그 말을 꺼낸 이유는 뻔했다. 남자친구가 있으니 이성애자일 것이고, 그럼 퀴어 당사자가 아닐 텐데 활동가로 받아도 되겠냐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길 들으며 나도 지원서에 기입된 민희의 트위터 계정을 검색해보았다. 프로필을 클릭하자 소갯말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네 제가 바로 그 유명한 AAA 건전지입니다’ 그리고 보라색 우산과 무지개 이모지.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튀어나왔다.

“너 얘 트위터는 안 들어가 봤냐? AAA라잖아.”

“에이에에이?”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 에이젠더 줄인 말이잖아. 보라색 우산이랑 무지개도 달려있네. 퀴어라고 광고를 하는구먼, 뭘.”

“아아. 그거 봤는데. 무성애 쪽은 좀 분간이 어려워서.”

“뭔 소리야?”

“너는 여자 사귀는 거 내가 다 봤잖아. 그런 무성애자는 상관없는데. 이성하고만 사귀는 무성애자들 있잖아. 사실 퀴어로 정체화 했다고 해도 이런 당사자 운동에는 참여시키기가 좀 그렇더라. 다른 게 아니라 활동가들이랑 공감대를 잘 공유할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 되는 거지. 어떻게 생각하니?”

“무슨 공감대?”

“경험의 결이 다르다는 거야. 겉보기에는 이성애자니까. 그러니까, 알잖아? 이성 연애할 때는 혐오자들한테 일상적으로 당할 일이 별로 없지 않아? 가짜 퀴어라는 말도 그래서 듣는 거고.”

“잠깐, 잠깐만 윤호야.”

참지 못하고 윤호의 말을 잘랐지만 막상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아서 잠시 조용해졌다. 설마 설마 했는데 신규 활동가의 퀴어 정체성을 파악하려는 그 모든 시도들이 ‘가짜 퀴어’인지 ‘진짜 퀴어’인지를 판별하기 위함이었나? 가짜 퀴어. 그러니까, 대놓고 동성연애를 하거나 욕망하지 않는, 이성만 사귀어본 양성애자, 아니면 무성애자 같은. 그러니까, 나 같은.

정리되지 않은 말들이 입 속에서 굴러다녔다. 그럼 남자친구 있으면 다 이성애자로 생각하냐고. 그리고 이성애자면 다 비당사자냐고. 뽀큐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하냐고. 그럼 나도 남자친구 사귄 적 있는데 왜 뽀큐에 들어오라고 했냐고. 너는 그럼 나도 가짜라고 생각해왔냐고. 가짜라고 생각하면서 왜. 왜 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의 존재 자체가 서로를 살아있게 할 생존의 연장줄이 되어주는 것처럼 굴었냐고. 왜. 나의 정체성이 너희에게도 귀하고 자랑스러운 자긍심인 것처럼……. 생각할수록 코끝이 욱신거려서 입 속의 이야기를 전부 음성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힘겹게 고른 한마디가 겨우 이거였다.

“무성애자한테는 다른 게 아니라 너 같은 말 하는 애들이 혐오 세력이야.”

혐오 세력, 이라는 단어를 내뱉자 윤호 쪽에서도 버럭 화를 냈다. 윤호 특유의 콧소리가 댕댕 울려서 휴대폰을 쥔 손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얘는 참 쉽게 발끈하는구나. 나는 뒷통수가 얼얼한 질문 세례를 받고도 한참이나 말을 골랐는데.

이후 뽀큐는 몇 번의 토의 자리를 더 가졌다. 토의라기엔 내가 일방적으로 다수를 설득해야 하는 자리였지만. 그러고 나서 몇 주 후에, ‘그 회의’가 잡힌 것이다. 혼자 카페에서 일하다 돌아가던 중 회의 날짜를 통보 받았다. 갑작스럽게 회의 날짜를 공지하는 거야 뽀큐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니 놀랍지 않았다. 내 간담을 서늘하게 한 건 그 안건이었다.

안건1. 활동가 햄희의 뽀큐 활동 지속의 건

햄희는 내 본명 해미를 달리 발음하여 지은 활동명이었다. 햄희도 뽀큐도 귀엽고 우스운 소리를 내는 단어들인데. 그래서 ‘뽀큐 소속 햄희’라고 소개하는 걸 좋아했는데. 단체 대화방 공지글에 안건 내용으로 띄워져 있으니 그렇게 싸늘하고 딱딱해 보일 수가 없었다.

회의에 모인 활동가들 모두 나에게 옅지만 확연한 적대감을 보였다. 겉으로는 평소 회의와 비슷했지만, 내뱉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온도가 유별나게 냉랭했다. 왜? 햄희가 감정적인 언행을 일삼으며 단체 내 건강한 토론 문화를 해하고 있어서. 회의에서는 그간 내가 제기했던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 올랐다. 그 문제들이 문제라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나의 방식이 문제라는 다수의 주장이 펼쳐졌다.

예컨대 동물권 행진에 가자고 했을 때도, 무성애 스터디를 열자고 했을 때도, 양성애 가시화 주간의 활동에 대해 논의했을 때도, 다른 의견을 내비치는 활동가에게 공격적이고 감정적으로 응했다고 한다.

내가 공격적이었냐고 하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감정적이었냐 하면, 당연히 사람이란 감정에 따라 표정을 짓고 말을 하고 글도 쓰고 울고 웃고 하는 거 아닌가? 소수자 인권 활동을 하면서 감정적이지 않은 활동가가 과연 있을까? 회의를 진행할수록 해야 하는 말은 점점 많아졌고, 결국 흥분해서 책상을 손바닥으로 여러 차례 쳐대며 언성을 높였고 탕 소리가 내 말소리에 섞여 들어 울려 퍼졌다. 그야말로 ‘공격적’, ‘감정적’이었다. 그러고나서는 뭐. ‘모두’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잘된 일인지도 몰라. 돈 주는 데서 해고당한 것도 아니고. 게임 속 상점에 아이템들을 갖다팔며 생각했다. 돈이라면, 뽀큐는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었다. 뽀큐에서 게시한 웹자보들, 퀴어퍼레이드에서 선보였던 핀뱃지와 손수건 같은 리워드는 전부 아무런 금전적 대가 없이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다기 보다는 어떤 활동가도 뽀큐 활동으로 수익을 얻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암묵적 무페이 법칙을 받아들였다.

……책상은 내리치지 말 걸. 그들이 뒤에서 그걸 빌미로 날 매도하면 어떡하지. 이미 내부에선 나를 공격적이고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으로 결론 내렸던데. 퀴어 판은 아기 발처럼 좁디좁아서 안 소문을 퍼뜨리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내가 먼저 확 공론화해버려? 아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닐 것 같았다. 어쨌거나 그쪽은 집단이고 난 개인이니까. 외로운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 아주 외로운. 아주 고독한.

다시 닌텐도 스위치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문득 게임 인터페이스가 마지막으로 접속했을 때와 많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겨울 배경이 패치된 것이다. 섬에 하얀 눈이 내렸고 내 캐릭터가 움직일 때마다 뽀독뽀독 눈 밟는 소리가 났다. 이 게임은 11월 말이 되면 겨울 맵으로 바뀐다. 그러고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 시즌 아이템도 만들 수 있게 된다. 크리스마스. 작년과 재작년 이맘때에는 뽀큐 활동 때문에 정신없이 바빴다. 후원 행사를 위한 회의, 동가끼리 모인 연말 파티에서 회의, 활동 톺아보는 회의, 회의가 정말 많았다. 나중에 어떤 직장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연말의 뽀큐만큼 회의가 많은 직장은 없으리라. 회의가 끝나면 대게는 누군가의 집에 자리를 틀고 온갖 음식과 술을 먹고 마셨다. 보통 크리스마스에 만나는 사람 하면 가족 혹은 연인이겠지만, ‘우리’는 그런 정상성을 거부하는 단체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가족도 되고 연인도 되자며 어깨를 얼싸안고 난리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뽀큐 활동가가 아니다. 그렇다는 건, 올해 12월에 예정되어있던 모든 일정이 펑 하고 날아가 버렸다는 얘기였다. 캘린더 어플에 들어가 12월 달력을 살폈다. 색색의 일정 표시가 막대기 모양으로 꽉 차 있어야 할 칸들이 텅 비어있었다. 뽀큐가 알록달록한 나의 막대기들을 다 앗아가 버렸다.

별안간 울화가 치밀었다. 일 년 여 동안 너무 뽀큐에게 놀아나기만 했다. 뽀큐가 없으면 주변에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 나의 재량인 척, 나의 선택인 척하면서 몰아붙인 활동 때문에 다른 커뮤니티에서 다른 친구를 만들거나 취미나 덕질을 함께 할 사람을 사귈 여유가 없었다. 나만 이런가? 다른 활동가들도 이랬나? 인제 와서는 다 소용없는 의문이었다. 똑같이 열심히 활동했는데, 나만 이리도 외로운 지경까지 온 것 같았다.

와중에 손가락은 열심히 A 키를 눌러가며 잠자리채로 눈송이를 잡았다. 지금부터 눈송이를 모아놔야 아이템을 만들 수 있다. 눈송이를 잡으면 캐릭터가 잡은 눈송이를 자랑하는데, 우연히 지나가는 동물 주민이 이걸 보면 옆에서 박수를 치며 축하해준다. 눈송이를 잡는 동안 사슴, 펭귄, 늑대 주민이 나에게-정확히는 게임 속 플레이어 캐릭터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동물 주민의 말과 행동에는 플레이어에 대한 호의가 가득하다. 잠자리채로 세 번 이상 머리를 치면 화를 내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일도 종종 있지만, 기본적인 대사와 반응은 애정이 기저에 깔려있다. 뽀큐도 그런 집단이었는데. 뽀큐가 나에겐 그런 공동체가 되어줄 줄 알았는데.

닌텐도를 내려놓고 침대에 뛰어들었다. 힐링하려고 게임을 켜놓고 온통 뽀큐 생각뿐이다. 창을 통해 방 안으로 누런 노을빛이 들어왔다. 전 애인 생각도 이렇게 종일 해본 적 없다. 뽀큐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이 빈틈없이 고여있는 이 머리통 안에, 강제적인 급수가 필요했다.

필요하면 해야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을 비볐다. 눈물이 퍼져서 촉촉해지는 눈썹과 볼을 느끼며, 크리스마스 전까지 새로운 관계를 쌓겠다고 결심했다. 그게 누구든, 이제 일상의 지평을 넓혀줄 새로운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작년, 재작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따뜻한 성탄절을 보내야 한다. 내게 아무런 부정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멀쩡한 크리스마스를. 뽀큐에서 어떤 소문을 내든 신경 쓰지 않고, 내 편에 서 줄 새 동료들과 행복한 연말을 만드는 거야. 그러면 난, 외롭게 싸우지 않아도 될 거야. 12월 캘린더가 다시 알록달록해질 거야.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박민희였다. 어찌 보면 내가 뽀큐에서 쫓겨난 일등공신이었다. 트위터 검색 기록에 남아있는 그의 계정으로 들어갔다. 2일 전에 올라온 트윗에 하트를 눌렀다. 트위터 친구를 구하는 ‘트친소’ 해시태그가 포함된 글이었다. 머지않아 민희가 날 팔로우했고 잽싸게 나도 그를 팔로우했다.

그리고 며칠 내내 타임라인 속 그의 트윗들을 주시했다. 내 목적은 민희와 트친이 되는 게 아니라, 그를 직접 만나는 거였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과 하고 싶은 말이 한 보따리였다. 뭣보다 만약 민희가 뽀큐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면 적극적으로 말릴 생각이었다. 뽀큐가 우리 무성애 동지 박민희를 또 다른 희생양으로 만들기 전에 얼른 ‘내 쪽’으로 들여야 했다.

민희가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뭘 먹고 싶다는 이야기가 올라오면 빠르게 오프 약속을 잡으려고 했으나 만만치 않았다. 민희는 일상을 공유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인 사유를 트위터에 정리해두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 식으로 올라오는 민희의 글들은 굉장히 길었고, 친근하게 말을 붙이기엔 적절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렇게 12월이 되었다.

12월 6일, 청첩장

애인과 헤어졌다.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괜히 죄스러웠던 내 정체성을 다시 쓰다듬어주기로.

31분 전에 올라온 민희의 트윗에 하트를 남겼다. 헤어졌구나. 아마도 남자일 그 애인과. 위로의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트위터를 껐다.

민희는 여전히 선뜻 말 걸기 어려운 이야기만 트위터에 올린다. 하지만 우리가 대화를 한 번도 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사실 제법 대화를 자주 나누었다. 민희가 종종 내 글에 답변을 남겼기 때문이다. 난 이제 정치나 의견 피력이라면 지긋지긋해서, 트위터에는 거의 게임 스크린샷만 올리고 있는데 민희가 이 게임에 관심이 많은 듯했다.

햄희님 섬은 언제봐도 감탄나오네요…

↘ 민희님~ 붂그럽네요 ㅎㅎ 어디가 어떻게 감탄스러운지 말씀해주세요(?)

↘ ㅋㅋㅋㅋㅋㅋ숲처럼 조성해놓으시고 사이에 성 쌓으신 게 쩔어요 ㅠ 저 성벽도 하나하나 쌓는 건가요?

어제 민희와 나눴던 대화를 다시 읽다가, 이제 일을 시작해야겠다 싶어 노트북을 켰다. 인터넷이 연결되자 밀려있던 카카오톡 알림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엄마에게서 온 게 7개, 클라이언트 두 군데에서 온 게 3개. 그리고, 이희진에게서 2개.

이희진이라니. 희진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 딱 한 번, 본가에 2주 동안 머물렀던 여름에 만나고 딱히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 그 여름에 희진은 남자친구와의 첫 경험 문제로 조금 들떠있었다. 어깨에 볼록한 퍼프 블라우스 때문에 더욱 그래 보였던 것 같다. 나로서는 상대방을 향해 넘쳐대는 성적 끌림을 관전하기가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마음을 다해 공감해 주지도 못하는데 함께 흥겨운 척하고 있자니 희진에게도 미안한 일이었다. 나의 미지근한 반응 때문인지 희진도 이후로 날 딱히 찾지 않았고 우린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그랬던 희진이 알 수 없는 링크 하나와 함께 믿기지 않는 소식을 전했다. 내년에 올릴 결혼 소식이었다. 함께 보낸 링크는 모바일 청첩장이었다. 몇 년 만에 연락하는 거라 저도 민망하지만, 나에게는 꼭 소식을 알리고 싶었고, 꼭 축하받고 싶다고. 고향에 올 일이 있으면 약속을 잡아서 꼭 밥을 먹자고 했다. ‘꼭’이란 말이 하도 많아서 그 소리를 발음하며 오므라드는 희진의 입술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아른거린다는 건 어쩌면 내가 그를 보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약속을 잡았다. 7개의 메시지 내내 집에 좀 와달라고 닦달하는 엄마의 요청에도 응할 겸이었다.

12월 17일, 예비 신부

“요즘에도 막 인권 그거 하나.”

엄마는 그렇게 물어보면서 반으로 가른 귤을 내 입에 넣었다. 귤을 씹고 삼키느라 답하지 못했는데, 딱히 답변을 위한 질문이 아니었는지 바로 뒷말이 붙었다.

“하지 마래이.”

“안 할라고.”

“그래. 하지 마라. 니 살기도 바쁘다.”

귤의 나머지 반이 엄마 입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대학교 때부터 나의 ‘인권 그거’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크게 싫어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뽀큐 활동가의 모친 중에는 대표인 윤호에게 매일 같이 전화해가며 우리 아들 좀 내보내라고 사정했는데, 우리 엄마는 그에 비하면 덤덤한 편이었다.

엄마가 또 귤을 얼굴로 들이대는 걸 밀어내고 바닥에 털썩 누웠다.

“희진이는 뭐 한다고 시집을 그래 빨리 가는데.”

“낸들 알어. 신랑이 좋은가 보지.”

어제 만난 희진은, 정말로 신랑을 끔찍하게 좋아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동네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밥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한사코 거절했다. 청첩장을 주는 자리에서는 상대방이 결혼식에 와 주는 걸 전제로 결혼하는 쪽이 밥을 사주는 거라고 어디서 봤기 때문이다. 나는 희진의 결혼식에 참석할 자신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희진은 살이 빠진 건지 기억했던 것보다 더 어딘가 가늘어 보였다. 흔히 친구가 결혼을 하면 남편 얘기, 시댁 얘기밖에 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희진은 그렇지도 않았다. 우린 고등학교 3년간 벌어졌던 모든 일을 이야기할 기세로 그때의 생활을 탈탈 털어댔다. 나보다는 희진이가 그때를 더 잘 기억하고 있었고, 학교를 졸업한 후 다른 아이들의 행로까지도 말해주었다. 청첩장은 그 이후에나 테이블 위에 올라올 수 있었다.

“좀 미안하네. 몇 년 만에 만나자고 한 게 결혼식 오라는 거여서…….”

“결혼하는 게 뭐가 미안한 일이야. 불러주면 고맙지.”

“안 와도 된다. 그냥 이 핑계로 니 얼굴 오랜만에 볼라고 한 거지.”

희진의 말은, 거짓말로 하려면 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난 정말로 그게 진심이길 바랐다.

“서울에서 바쁘재.”

“바쁠 때도 있고 일 없을 때도 있고 그렇지 뭐.”

“멋지다. 회사 안 들어가고 혼자 하고 그런 거.”

“알바도 하지.”

“그래도. 크리스마스엔 뭐 할 건데? 남자친구 있나?”

“없다. 그날도 일하지. 내가 휴일이 어딨어.”

“와, 대단하다, 진짜.”

희진은 나더러 대단하다고 표현해주었지만, 그건 상냥함이 발휘된 표현일 뿐이고 사실 그는 나의 방식을 신기해하는 것에 가까웠다. 내가 그의 방식을 신기해하듯. 희진은 회사에 가서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을 한다. 나는 온종일 일을 하는데 회사에는 가지 않는다. 희진은 ‘일’이라고 하면 직장 상사와 탕비실과 사무실을 떠올리지만 나에게 ‘일’이란 좁은 책상 위 노트북과의 씨름이었다.

희진은 업무량은 그대로인데 결혼 준비까지 하려니 죽을 맛이라고 했다. 업체에 개인 정보를 넘기는 순간부터 온갖 웨딩 업체로부터 예약 문자가 날아왔고 자연스럽게 결혼식 준비 대다수가 희진의 몫이 되었다. 회사에 있다가도 스튜디오나 예식장에서 뭐를 결정해달라는 문자가 오면 그 순간 희진은 모든 걸 던져 버리고 싶었다. 양가 어머니들도 뭔가 신경 쓰이거나 서운한 일이 있으면 뭐든 간에 희진에게 먼저 따지고 들어서 한 번은 제발 알아서 하게 좀 내버려 두라고 사정하듯 선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희진은 묘하게 흐뭇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나는 웨딩 업계가 예비 신부를 지독하게 혹사 시키는 현실 보다도, 그런 고난을 견디면서도 저런 식으로 웃을 수 있는 희진이 더 생소했다. 몇 년 전 여름, 철 없는 남자친구와의 첫 섹스에 대해 떠들었던 때와는 또 다르게 들떠 보였다. 청첩장을 열어보았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솟아나는 새싹들과 더불어 영원을 약속합니다. 부디 참석해 주시어 자리를 빛내 주시기 바랍니다.’

성소수자 인권이나 현 정부의 문제점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는 대화를 그렇게 길게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희진에게는 희진만의 치열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치열함을 전해 들으면 들을수록 나와 그의 차이점이 점점 짙어졌다. 윤호처럼 뭘 모르는 놈들은 우리를 비슷한 카테고리에 묶어두겠지. 둘 다 남자랑(도) ‘사랑’을 하니까. 희진과 나는 전혀 다른 언어로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인데도.

밥을 얻어먹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랑이 있고 신부가 있고, 그 남과 여의 맺어짐을 모두가 축복하고, 사랑이란 그 둘과 같은 모양으로 완성된다는 약속이 있는 그 장소에서, 나의 친구인 희진이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축하해 줄 자신이 더욱 없어졌다.

엄마에게 희진이 결혼식은 가지 않을 것 같다고 하자 그럼 뭐 하러 여기까지 보러 왔냐고 되물었다.

“안 갈 거니까 얼굴 보러 온 거지.”

“맞나. 난 또 엄마 보고 싶어서 온 줄 알았네.”

“엄마도 보고 싶었지.”

“입에 침이나 발라라.”

“엄마도 내가 결혼하면 좋겠어?”

“뭐 누구 있나.”

“없지.”

“없으면 억지로 시킬 생각 없다.”

엄마는 귤 까던 손을 멈춰 옷에 문질렀다. 색 바랜 앞치마에 작고 노란 얼룩이 생겼다.

“그래도 그럴 일 있으면 한복은 분홍색 입고 싶네.”

그러면서 또 귤을 내 입에 집어넣었다. 누워서 먹다가는 즙이 기도로 넘어갈 것 같아 벌떡 일어났다. 촌스러운 진달래 분홍 한복을 입은 엄마를 상상했다. 엄마가 분홍색 한복을 입고 내 결혼식에 혼주로 있을 날이 있을까. 결혼을 한다고도 안 한다고도 확언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게 스스로 실감 났다. 남들에게 난 가짜 성소수자일 수도, 가짜 이성애자일 수도 있다. 뭐든지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될 수 없었다.

12월 19일, 민희와 해미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깜빡 졸다 일어나니 트위터 멘션이 하나 와있었다.

저도 오늘 합정인데 혹시 만나실래요?

민희였다. 잠결에 올린 합정에서 혼술이나 할지 고민이란 트윗에 달린 멘션이었다. 트위터에서 이런 식으로 약속을 잡는 경우는 흔했지만, 상대가 민희였기 때문에 그것도 그가 먼저 만남을 제안했기 때문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사실 쾌재를 부르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뽀큐에서 쫓겨난 경험을 공유할 사람이 절실했다.

그러기 위해선 민희에게 대부분의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뽀큐에 지원한 서류를 통해 트위터 계정을 먼저 봤고, 대학교 동문인 것도 알고 있었다고, 민희를 만나자마자 이실직고했다. 당신을 스토킹했었다고 자백하는 기분이 들어 약간 죄스러웠다. 뽀큐 활동가들과 어떤 식으로 틀어졌는지까지 이야기가 나왔을 때까지도 민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었기에 조마조마했다. 행여 뽀큐의 대처가 옳았다고 주장한다면, 다시는 퀴어 계 지인과 오프라인으로 만나지 않을 거란 생각에까지 다다랐다.

와중에 민희도, 내가 내몰리듯 뽀큐 활동을 그만두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때 뽀큐 지원하고, 오티까지도 갔었어요. 활동도 계속할 뻔했는데.”

신이시여.

“그런데 술자리에서 햄희 님 이야길 엄청 하더라고요. 무성애자 관련해서 쎄한 얘기도 계속 나왔고……. 그대로 탈주했죠, 뭐.”

민희가 뽀큐의 편이 아닌 게 확정되었음에 안도가 되면서도, 그 자식들이 신규 활동가 앞에서 무슨 이야길 해댔을지 예측도 안 되어서 뱃속이 싸해졌다.

“마음 쓰지 마요. 계속 그딴 식으로 살다 말겠죠.”

내가 잠시 말이 없자 민희가 선뜻 위로를 건넸다.

“사실 탈퇴한 다음부터 좀 조급했어요. 쫄렸다고 해야 하나. 뽀큐 쪽에서 좋지 않은 쪽으로 소문내거나 할까 봐요.”

“그러면 진짜 답 없는 집단이죠. 아마 그랬으면 사람들이 오히려 뽀큐 쪽이 이상하단 거 금방 알아차렸을걸요.”

“그럴까요.”

“만약 진짜 햄희 님 잘못이었으면 지금 벌써 그쪽에서 공론화하고 난리 났을걸요. 근데 지들끼리만 뒷담 까잖아. 왜겠어요. 지들이 잘 한 거 없는 걸 아는 거죠.”

민희의 어투는 온라인에서 보다 훨씬 거칠었다.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내면서 상대방의 복잡함을 비질해주는 타입이었다.

“진짜, 진짜 혹여나. 그런 일은 안 일어나야겠지만? 걔네가 공개적으로 햄희 님 공격하더라도. 햄희 님 주변에서 같이 싸워 줄 거예요.”

민희가 말하는 내내 고개만 끄덕거렸다. 같이 싸운다는 말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어색했다. 사실 민희를 만나려고 애태운 것도 어색함과 피곤함을 꾹 참고 희진과 엄마를 보러 간 것도, 같이 싸울 사람을 찾아 헤맸던 건데. 아니, 같이 싸우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그냥 점점 싸늘해지는 계절 속에서 그나마 덜 춥게 연말을 함께 할 사람을 누구로 할지 결정하고 싶었다. 공동체는 나를 쫓아냈으나 난 여전히 그들이 주었던 소속감과 안식을 욕망하고 있으므로, 그것들을 줄 수 있는 누군가(들)을 얼른 찾아내고 싶었다. “본가는 잘 다녀왔어요?”

민희가 화제를 돌렸다. 나는 결혼할 친구를 만나고 왔다고 말하며 희진에게 들은 웨딩 업체의 행보를 포함하여, 규범적인 결혼식이 얼마나 희한해 보였는지 설파했다. 민희는 입을 살짝 벌린 채 그 모든 걸 잘 들어주던 중 문득 이런 이야길 꺼냈다.

“뽀큐 활동가들한테는, 그분이나 우리나 똑같아 보이겠죠?”

행복한 희진을 보며 착잡했던 이유를 다른 이의 음성으로 듣게 되어서, 난 조금 놀랐다. 어떻게 저랑 또옥같은 생각을 하셨냐며 호들갑을 떨고 말았다.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을 찰싹찰싹 마주쳤다.

“전 가끔 퀴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가 더 편해요. 퀴어 커뮤니티에 있으면 자꾸 뭘 증명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그렇잖아요. 끌리지 않는 걸 무슨 수로 증명을 해요. 케이크 이런 거로 비유해봤자 알아듣지도 못하고 구리다고 욕하고……. 근데 내 생각에도 구리긴 해.”

“그러고보면 왜 무성애 어쩌고는 먹는 걸로 많이 비교가 될까요.”

“그러게요. 섹스가 연루돼있어서 그러나. 섹스는 누가 누구 먹는다 맛있다 이런 은유가 익숙하니까…….”

“으악.”

그때쯤 우린 많이 취했고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분별없이 많은 이야기를 내뱉기만 하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크게 웃었다. 어느 순간엔 유성애자로 보이는 게 억울하다는 이야길 나눴고, 어느 순간엔 왜 그들에게는 우리가 퀴어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게 그토록 중요할까를 나눴고, 우리가 퀴어이거나 퀴어가 아니면 그들에게 가는 손해 혹은 이득이 무엇일지 고찰하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게임 이야기가 나와서, 가장 좋아하는 주민과 그 주민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를 잔뜩 흥분한 채 나열했다.

“전 사실 그 게임 안 해요.”

민희가 말했다.

“햄희 님이 꾸미고 썰 푸는 게 즐거워 보여서 닌텐도도 없는데 게임 아는 척했어요.”

민희는 민망한 듯 웃었는데, 난 이상하게 그 말이 듣기 좋았다. 그래서 마지막엔 충동적으로 술값을 계산했고, 민희를 따라 흡연구역으로 이동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민희 님.”

“뭔데요?”

“같이 싸워 준다던 주변인에…… 민희 님도 포함되실지.”

“뭐요?”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며, 정말로 끔찍하게 창피했다. 민희는 남의 속도 모르고,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대체 무슨 질문이냐는 듯. 민희의 웃음소리에서 게임 속 동물 주민들의 뿅뿅 거리는 효과음이 겹쳐 들렸다. 민희는 특히 사슴 주민을 닮았다.

12월 21일, 해미

카페에 앉아있는 도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다 휴대폰 카메라로 창밖을 찍고 있었다. 나도 찍어볼까 싶어 휴대폰을 켰다. 캘린더 어플이 실행되고 있었다. 광고 배너에 해피 크리스마스라는 문구를 깜빡거렸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크리스마스가 되는데, 당초의 목표만큼 12월 캘린더를 알록달록하게 채우지는 못하고 있다. 예상보다 외주 건수가 늘어나서 눈앞의 일들을 쳐내느라 새로운 관계를 향한 욕심은 점차 흐릿해졌다.

하지만, 원한다면 민희와 만날 수도 있고 희진과 만날 수도 있고 엄마를 보러 갈 수도 있다. 그냥 혼자 게임을 하면서 동물 주민들과 온종일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여차하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수도 있었다. 모든 게 내 삶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이 모든 게 있을 수 있는, 오롯하고 멀쩡한 크리스마스.






조소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