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은혜는

기조혜
심심해서 사람을 사귀고, 지루해서 사람을 찼다. 최가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덜 마른 수건처럼 침대에 널부러진 최가희는 이 진리가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누리끼리한 천장의 얼룩을 셌다. 하나, 둘, 최가희는 의미없게 꼬리를 무는 생각의 늪으로 지루하게 가라앉았다. 하나, 둘, 최가희는 빨랫감처럼 구겨져 있었지만, 생명 없는 그것처럼 조용하지는 않았다. 하나, 둘, 최가희는 자신의 몸이 구겨졌다 펴지는 횟수를 헤아렸다. 최가희 위에 올라탄 남자 때문에 최가희는 일정한 박자에 맞춰 흔들리고 있었다.
‘숨 막혀, 이 새끼야!’ 최가희는 투덜댔다.
최가희는 의무적으로 움직였다. 어떤 부위를 몇 박자로 움직여야 성공적으로 행위를 끝마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곧 찾아올 자유를 그리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성실한 숙련공이었다.
고된 노동 현장에서 담배와 껌은 값어치가 높다. 김이 모락모락 날 것 같이 얼굴이 빨개진 남자가 최가희에게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최가희는 그것을 물며 습관적으로 생각했다. ‘시가렛 애프터 섹스.’ 그가 제일 싫어하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인용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그는 그 노래를 들어보기도 전에 싫어하게 됐다. 최가희는 우울한 앨범 아트와 흑백투성이인 사진을 가끔 검색하며, 여전히 들어본 적 없는 그 노래를 혐오했다. 그는 무겁고 침울한 것을 싫어했다. 킬링타임용 노래, 경쾌한 사람, 그리고 깔끔한 관계를 좋아했다.
“좋았지?” 남자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히죽거렸다. 최가희는 가벼운 사람을 좋아했지만, 머리와 센스도 가벼운 사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나쁘진 않았지.”
하지만 티내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머리맡 탁자에 다시 내려놓았다. 최가희는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남자는 시가렛 애프터 섹스를 마저 피우더니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남자가 애프터를 샤워 애프터 시가렛 후에 청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든 최가희는 담배를 꺼뜨렸다. 사라질 준비를 시작했다. 최가희는 분비물이 묻은 허벅지 안쪽을 티슈로 대강 닦아냈다. 그가 립스틱을 고치는 사이에, 남자의 핸드폰 화면이 울렸다. 사생활 보호 모드를 켜지 않은 핸드폰에는 남자의 아내가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가 훤히 보였다.
최가희는 굳게 닫힌 화장실을 바라봤다.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유로운 마음이 든 최가희는 이 부주의한 남자에게 선의을 베풀기로 했다. 최가희는 아까 곁눈질로 쉽게 외운 남자의 화면 잠금 패턴 ‘Z’ 모양을 그려서 핸드폰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리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치우고, 사생활 보호 모드를 켜려고 했다. 남자의 아내가 익숙한 이름만 아니었다면 최가희는 남자의 사생활을 보호해줬을 것이다.
밝게 빛나는 화면에는 ‘노은실’이라는 이름 석 자가 떠올라있었다. 최가희는 당황했다. 최가희의 머리가 돌아가기도 전에 손가락이 노은실의 프로필 사진을 눌렀다. 푸른 하늘에 만발한 유채꽃이었다. 핸드폰 카메라를 줌하는 대신 손을 가까이 유채꽃에 가져가서 찍은 탓에 핸드폰의 그림자도 어설프게 찍혀있었다. 헬멧을 쓴 중년 여성이 있는 배경 사진까지 확인하고 최가희는 확신했다.
“이 남자가 선생님의 남편이었나요?”
어떤 흙탕물에 처박혀있더라도 자신의 욕망을 명확히 깨닫는 사람이 최가희였다. 최가희는 늘 솔직했다. 그래서 최가희는 옛날부터 되바라진 여자애였고, 지금은 인생을 막 사는 여자였다. 그는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남편이랑 잔 년이 됐지 시발. 학교에서 유일하게 좋아했던 선생님이었는데!”
최가희는 철면피였기 때문에 남들의 시선에 의연한 것이 아니었다. 최가희는 솔직하지 못한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뿐이었다. 욕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려던 최가희의 잔을 낚아챈 것은 최가희의 유일한 친구 도루미였다.
“청승은 그만 떨어 이 것아.”
도루미는 뺏은 소주잔을 쭉 들이켰다. 최가희가 도루미를 어이없다는 듯이 쏘아보자 도루미는 잔을 탕 소리나게 내려놓더니, 소주 두 병에 삼겹살 2인분을 곧장 추가했다.
“니가 사는 거 아니라고 막 시키지 마라.”
“어차피 니가 다 드실 거잖아요.” 도루미는 최가희를 한 마디로 조용히 시켰다. 도루미는 시무룩한 최가희를 흘깃 보면서 고기를 또박또박 잘랐다. 그리고는 적상추를 얹어주며 그릇을 최가희 쪽으로 밀었다.
“먹으면서 마셔. 채소도 먹고.”
“옘병.” 최가희는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친구가 밀어준 그릇은 말끔히 비웠다. 소주도 도루미와 속도를 맞춰 자분자분 마셨다. 도루미는 그런 최가희를 빤히 쳐다봤다.
“난 이해가 안된다. 한문쌤 남편이랑 잔 게 그렇게 우울해할 일이야? 재작년에 네가 만난 남자가 난교 파티에 갔을 때 이 정도로 축 처진 시금치처럼 굴지는 않았잖아.”
“난 그 새끼가 난교 파티에 간 게 불만이었던 게 아니야. 날 쏙 빼놓고 가서 배신감 들었던 거지.”
이제 도루미가 최가희를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라봤다.
“가희야, 가희야, 난 정말 네가 이해가 안 간다. 나름 번듯하게 돈 벌고 외모도 그럴듯한 애가 왜 그렇게 사니.”
“왜 그따구로 사냐는 소리는 지겨워.”
“‘그따구’가 아니라 ‘그렇게’라고 말했어. 어투 꼬지 마.”
도루미의 투명한 눈동자에 지레 찔린 최가희가 꼬리를 말았다. 사실 최가희는 오랜만에 심한 혼란을 느끼는 중이었다.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그때도 본능에 충실히 살았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알고 행한 것은 아니었다. 카카오톡 배경사진에 있었던 파란색 헬멧을 쓰고 있던 중년 여성이 머리속에서 어른거렸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 최가희는 솔직하게 고백했다.
도루미는 왼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건 그녀의 습관이었다. 오른쪽 눈썹은 안된다. 오직 왼쪽 눈썹만 갈매기 날개마냥 구부릴 수 있었다. 곧게 뻗은 눈썹을 가진 도루미는 이 잔재주를 자신의 습관으로 굳혔다.
“모르겠다고?” 도루미는 물었다.
“응.”
“너 같은 미친년이 네가 왜 이러는지를 모르겠다고?” 도루미는 재차 물었다.
“미친년이 왜 미친년이겠니.” 최가희는 자조하는 듯 되물었다.
“학창 시절에 선생님을 좋아했고, 실수로 그 선생님의 남편이랑 원나잇을 했어. 그걸 일주일 넘게 괴로워하는 건 정상인이 할 짓이야.”
“음, 내가 미친년이 아니라 정상인이 됐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니?” 최가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 반대야. 너는 정상인과 미친년을 뛰어넘은 더 미친년이라는 소리야. 정상인이 느낄 감정으로 괴로워하는 것도 아니면서 정상인처럼 괴로워하고 있으니까.”
“무슨 소리야. 알아먹게 말해.”
도루미는 상추쌈을 우적거리며 말했다. “마땅히 느낄 정상적인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게 아니잖아, 너. 다른 감정으로 괴로워하고 있지.”
“이게 양심의 가책이 아니면 뭔데!” 최가희가 소리를 질렀다.
“사랑.”
최가희가 도루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철판이 지글거리면서 적막을 채웠다. 도루미는 예의 그 눈썹을 휜 상태였다. 7년 전의 앳된 얼굴과 다름없는 그 표정에서 최가희는 여상함을 느꼈다. 도루미 넌 그때나 지금이나-
“도라이 년이구나.”
“뭐래, 미친년이.”
도루미가 소주를 한번에 털어 넣었다. 최가희도 답답한 마음에 따라 마시려고 했다. 하지만 도루미가 잔을 전광석화로 뺏었다.
“야, 최대한 말짱한 정신으로 잘 들어. 넌 그 노년실? 노은실? 하여튼 그 한문쌤을 여전히 좋아하는 거고, 그래서 한문쌤의 남편이랑 잤다는 게 괴로운 거야. 니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상처를 줘서 마음이 불편한 거라고. 양심에 찔리기는 뭐가 찔려. 니가 양심이 있었긴 하냐. 솔직히 니가 잔 유부남이나 유부녀가 한둘도 아니고, 가정 파탄낸 게 처음도 아니고.”
“파탄내긴 뭘 파탄 내. 내가 돈 달라고 칼 물고 협박이라도 했냐. 바람 핀 놈이 잘못한 거지.”
“어쨌든!” 도루미가 다시 소주잔을 내리쳤다. 천장에 달린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사장이 힐끗 쳐다봤다. “너는 죄책감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왜 그런 줄 알아? 네가 이기적인 년이라서 그래. 넌 너밖에 모르지. 그런 네가 생판 남한테 죄책감을 느낀다면?”
도루미는 소주잔을 허공으로 건배하듯이 쳐올리면서 소리를 쳤다. 최가희는 그 모습을 보면서 대사를 외우지 못해서 동작만 과장하고는 했던 고등학교 연극부장을 떠올렸다. “네가 그 생판 남을 좋아해서 그래!”
축구 삼매경이었던 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고, 왁자지껄 술을 마시던 건너 탁자의 중년 남성들도 도루미를 쳐다봤다. 도루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주잔을 한입에 털어 넣고 다시 채웠다. 어안이 벙벙해졌던 최가희는 자신의 똘끼 넘치는 친구가 5년째 데뷔하지 못한 작가 지망생임을 새삼 깨달았다.
“너랑 상담한 내가 진짜 미친년이다.”
그렇게 최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도루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잡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러셔? 내 도움은 필요 없어?”
최가희는 멈칫했다. 반사적으로 입이 열렸다. “무슨 도움?”
“네가 견디고 있는 괴로움을 해결해줄 수 있지. 내가 글밥을 괜히 먹었겠니.”
최가희는 욕망에 충실하다. 그 말은 그가 괴로움이라는 고통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한다는 소리였다. 그는 도루미에게 승낙의 뜻으로 턱을 살짝 들었다.
“괴로움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뭔줄 알아?” 도루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바로 괴로움에 직면하는 거야. 니가 제일 못하는 거지.”
‘옘병.’ 최가희는 생각했다. 도라이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도루미가 노은실에게 연락을 넣으라며 부채질하는 것을 뿌리치고 술집에서 나왔어야 했다. 그리고는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더 마시고 놈팽이 한 놈과 홧김에 자는 걸 다섯 번 정도 반복했어야 했다. 동기의 남친이랑 잤을 때나 원장님의 아내를 꼬셨을 때처럼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최가희는 차마 술과 잠자리 따위로 노은실을 잊을 수 없었다. 최가희는 학생이었던 자신과 성인이 된 지금의 자신을 분리할 수가 없었다. 흐르는 시간과 함께 노은실을 향한 기억은 증발하지 못한 채 나선형을 그리며 퇴적됐다. 그래서 최가희는 도루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속으로만 연신 욕을 하며 커피잔만 쳐다보고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의 커피잔과 상대방의 커피잔 두 잔 모두 싸늘하게 식은 지 오래였다.
노은실은 그 커피보다 가라앉은 눈으로 최가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최가희는 후회했다. 이 문제는 손전등을 키고 이리저리 비출만한 어둠이 아니었다고, 무의식의 샘에 잠기게 내버렸어야 했다고.
“선생님.” 그러나 최가희는 이미 노은실과 직면했다.
“가희 씨는 졸업한 지 오래고, 저는 은퇴한 지 오래니, 그 호칭으로 부르지 않기로 말아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 아니 사모님의 남편이랑 잔 것은 고의가 아니었어요. 선,, 사모님의 남편분이신줄 알았으면 애초에 연락도 안 받았을 거예요!”
노은실은 ‘사모님’이라는 호칭에 눈살을 찡그렸다. 하지만 입을 열지 않은 채 식은 커피잔을 들었다. 최가희는 커피물이 얼굴에 끼얹어질 각오를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경험상, 식은 커피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 옷은 세탁소에 맡기면 되고, 화장실에서 화장을 고치면 된다. 최가희는 갈아입을 후드티까지 챙겨왔다.
하지만 노은실은 커피를 최가희에 끼얹는 대신에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담배를 피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거부한 건, 저희가 스승과 제자 사이의 이후의 사회적인 관계가 있어서 그런 거예요. 하지만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불편하군요. 스승을 의미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연장자를 부르는 단순한 호칭을 뜻하는 ‘선생님’으로 부르는 것으로 하죠. 자 그럼 가희 씨, 왜 그랬어요?”
최가희는 순간 움찔거렸다. 노은실의 물음에 찔린 것이 아니라, 성씨 없이 이름으로만 불린 경험이 별로 없기에 반사적으로 놀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7년 전의 학생 시절을 끌어올렸다. 최가희는 노은실이 자신의 이름을 다시 불렀다는 사실이 눈물겨울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기억이 치닫는 와중에 최가희는 노은실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최가희는 진실을 말했다.
“그렇군요.” 노은실은 찻잔을 한 번 더 들어 커피를 마셨다. 한숨은 없었다. 최가희는 노은실이 차분히 커피를 한 모금 기울이는 이 모습이 마치 그때와 같다고 생각했다.
“빌어 처먹을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요, 선생님. 제가 정말로 그랬다면 제 부친 또래의 개저씨만 벗겨 먹었겠죠. 하지만 저는 대가리가 텅텅 빈 어린 놈들이랑도 놀아난답니다. 그러니까 내 비행의 원인을 드디어 알아냈다는 듯 눈 빛내면서 키보드 두드리지 마세요, 시발.” 최가희는 상담 선생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더니 으스러질 정도로 문을 세게 닫고 나왔다. 씩씩거리던 최가희가 발견한 것은 교사 화장실을 가고 있던 노은실이었다. 노은실은 칫솔을 입에 문 채 최가희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뭘 봐, 시발.” 최가희는 눈길에 화답했다. 최가희와 노은실의 첫만남은 이러했다. 최가희는 명문도 똥통도 아닌 고등학교에서 명실상부 가장 꼴통인 학생이었고, 노은실은 30여년을 근무한 평범한 한문 선생이었다. 한문 선생의 운명은 보통 지루하다. 학교에서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는 고리타분한 노인을 한문 선생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일리 있는 편견이었다. 한문이 수능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문 선생은 수업이라는 노고에 답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노은실은 세월의 스러짐에도 꼿꼿한 사람이었다. 그의 단아한 이목구비와 옅은 머리색은 학생들이 한문 선생이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을 돌리게 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친구 같은 선생이 되는 쉬운 길을 노은실은 선택하지 않았다. 노은실은 장난 섞인 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한자를 읊었고, 결국 학생들은 노은실의 수업을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노은실은 친구같이 만만한 선생이 아니었다. 노은실은 아직 분을 삭히지 못한 어린 최가희에게 말했다. “足家之馬(족가지마).” 칫솔을 물고 말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한 발음이었다. 최가희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도 학생에게 점잖게 쌍욕을 하는 중년 여자 선생은 처음이었다. 노은실은 어안이 벙벙한 최가희를 뒤로 하고 치약물을 뱉으러 사라졌다. 하지만 최가희 역시 만만한 학생은 아니었다. 최가희는 노은실이 화장실에서 나올때까지 기다렸다. 나오자마자 대뜸 대거리를 걸어오는 최가희에게 노은실은 아까는 실제 고사성어를 인용했을 뿐이며, 그래도 계속 따질 테면 자리를 옮기자며 최가희가 뛰쳐나왔던 상담실로 들어갔다. 최가희가 폭언을 뱉었던 상담 교사는 점심을 먹으러 간 지 오래여서 햇볕이 드는 상담실에는 최가희와 노은실뿐이었다. 노은실은 보온병으로 커피를 따라 최가희에게 건넸다. 최가희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노은실을 쳐다봤다. 노은실은 김이 오르는 종이컵을 가만히 밀었다. “자, 마시세요. 학생이라도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될 거예요.”
최가희는 카페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나 노은실이 든 커피잔을 붙잡았다. 세월의 실금이 가지런한 노은실의 입매가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최가희의 주둥이가 더 빨랐다. “식은 커피를 마시게 하기 싫어요. 저랑 술 마시러 가요, 선생님.” “술은 지겨운데, 일단 자리를 옮기는 건 어때요?” 노은실은 반쯤 승낙했다.
상담은 계속됐다. 최가희가 상담 선생을 욕하고 뛰쳐나간 뒤로 최가희가 받던 공식적인 학교 상담은 최가희가 노은실 선생과 비공식적인 상담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다수가 만족한 결과였다. 최가희는 足家之馬(족가지마)라는 고사성어가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꾸짖는 뜻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따라서 노은실이 足家之馬(족가지마)라고 말했던 이유는 그 상황이 고사성어와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욕을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논파했다. 의기양양한 최가희 앞에서 노은실은, “맞아요. 욕해서 미안해요.” 하고 고개를 숙였다. 선생의 사과에 당황한 최가희는 노은실의 정수리만 쳐다봤다. 노은실과의 상담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가장 날카로우리라 믿었던 공격이 노은실의 호수 같은 반응에 잠겨서 형체를 잃은 채 흐트러졌다. 최가희는 난방이 잘된 방에서 차꼬를 차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은실과 있을 때마다 참아야 할 것이 생겼다. 그러나 그 속박이 답답하지는 않다고 최가희는 생각했다. 충분히 감수할만 했다. “선생님, 결혼하셨나요?” “했죠.” “아이가 있으신가요?” “있었죠.” 노은실은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먼저, 그는 침묵으로 공백을 채우는 법을 알았다. 노은실은 최가희가 말하기를 멈추면 자신도 멈췄다. 입을 열거나 컴퓨터의 키보드나 서류의 볼펜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그저 시침 소리로 그 정적을 채우거나 커피의 뜨거운 김으로 허공을 물들었다. 최가희는 그때마다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느꼈다. 두 번째, 노은실은 항상 상담실에서 최가희를 먼저 기다렸다. 최가희가 아무리 달음박질을 쳐도 선생은 이미 상담실에 도착해 있었다. 벅찬 숨을 내쉬는 최가희가 상담실을 열자마자 보는 광경은 창문에 커튼을 치는 노은실의 뒷모습이었다. 해질녘의 황금빛 가시가 선생의 어깨에서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학생은 그에게 자신의 심방을 열었다. 심장이 한 번 뛸 때, 최가희는 노은실을 소유한 것만 같았다. “결혼은 일찍 했지만 아이가 쉬이 생기지 않았죠. 늦둥이 딸 하나만 봤었어요.” 최가희의 질문에 노은실이 길게 대답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뒤편에서 보았던 여자들. 브래지어를 찬 여자들이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들은 어항 같은 유리 벽 너머 손을 뻐끔거렸다. 그 건널목을 지나갈 때마다 그녀들을 감상하던 남자들을 있었다. 가로등에 삼삼오오 모인 그들은 담배를 길게 피며 그녀들을 연기 너머로 훑었다. 최가희는 남자들 중 눈에 익은 얼굴을 헤아렸다. 가장 익숙한 사람은 항상 찾지 못했다. 그러나 최가희는 언젠가는 자신의 부친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폭력적이고, 꼴초고, 여자를 좋아하는 그가 그의 아비를 닮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비가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최가희는 혼자 담배를 피며 여자를 관찰했다. 핸드폰을 하면서 옆의 여자들과 즐겁게 대화를 하는 여자를 봤다. 최가희는 반짝거리는 하이힐이 그녀의 웃음소리에 따라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노은실의 가느다란 다리가 저 여자의 다리보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최가희는 여자들을 보면서 더 이상 그의 아비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생을 상상했다. “제 딸은 아홉 살 때 떠났어요. 음주운전 과실치사였죠.” 노은실이 마저 대답했다. 최가희는 노은실의 수업 때만큼은 졸지 않았다. 그 사실이 노은실에게 큰 감흥을 일으키진 않았다. 노은실은 아이들이 졸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녹색 칠판에 가지런히 한자를 쓰는 선생이었다. 한 획을 그었다. 최가희는 공책에 노은실의 획을 흉내 냈다. 한 획을 맺었다. 최가희는 노은실의 하늘거리는 손길을 음미했다. 늘 무표정한 노은실은 한 문장를 완성할 때마다 입가에 희미한 흡족함을 머금었는데, 최가희는 입매가 맺히는 그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가장 미세한 초신성 폭발을 목격한 유일무이한 관찰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아기는 실수의 결과죠. 사랑의 결실이라고 포장할 수 없단 말이에요. 늘 엉겁결에, 계획없이, 얼렁뚱땅 생겨요. 그래서 아기가 선물이 못 되면 재앙이 되는 법이죠.’ 최가희는 노은실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위로하는 법을 모르는 그는 노은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선생님 아기에게 선물 같았을 거예요.” 그래서 최가희는 여느 때처럼 하고 싶은 말을 했고, 노은실은 그 말에 웃었다. 마치 한 문장을 완성했을 때처럼. 최가희만 유일하게 알아챘던 그 순간처럼. 우리 둘끼리만 그 암호를 즐기는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하하, 가희 학생은 부모님께 스스로 어떤 존재였을 것 같아요?" “와 저는 완벽한 재앙이자 사고이자 재난이었죠.”
“그러니까 죄송해요, 선생님.” 최가희는 노은실에게 계속 사과했다. 7년 만에 만난 은사는 옆머리에 은실이 몇 줄 더 그어진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자그맣게 여윈 어깨도 수평선을 띄는 입가도 똑같았다. 그래서 최가희는 노은실을 그때 그 시절의 노은실과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가희는 사과를 거듭했다. 모든 게 죄송스러웠다. “계속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가희 씨.” 과거의 노은실이었다면 말을 더 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노은실은 달랐다. “저는 이미 남편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어요. 별거한 지도 벌써 3년이 넘었죠.” 노은실의 말이라면 스폰지처럼 흡수하던 어린 최가희도 성인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날 남편분의 핸드폰에는 저녁 식사하고 오냐는 카톡을 보내셨던데요.” 최가희는 말을 골랐다. “저를 위해 선생님은 거짓말을 자주 하셨었죠. 별거 중이라는 말도 거짓말이죠?” 노은실은 침묵했다. 최가희는 그것을 공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가희는 노은실에게 배운대로 침묵을 하나의 말로, 대답으로, 진실로 받아들였다. “선생님, 제가 복수해드릴게요.”
노은실은 수업 시간에 딴 길로 새는 법이 없었다. 그 자신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학생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언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따라 노은실은 흰 분필을 멈췄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뜬 채로 자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최가희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다섯 명의 학생과, 이미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는 나머지 스무 명의 학생을 돌아봤다. 노은실은 교탁을 나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점심시간 직후의 5교시는 항상 햇볕이 가득했다. 햇살은 노은실을 따뜻한 심장의 색으로 물들었다. “다음 주부터 시험에 대비해서 자습시간을 줄 예정이에요. 공부할 다른 책을 가져와서 봐도 좋아요. 30분까지는 수업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습하는 걸로 할게요.” 졸음을 참지 못했던 다섯 명은 지렁이 글씨체로 다음주부터 한문 자습-이라고 간신히 메모하더니 풀썩 엎드렸다. 곧이어 도로롱거리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가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최가희가 어떠한 소리라도 내려는 순간, 뜻밖에도 노은실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사는 게 쉽지 않죠?”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가희는 완전히 잠이 달아난 눈으로 노은실을 쳐다봤고, 엎드렸던 아이들 중에 얕은 수마에 빠졌던 몇몇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지루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노은실은 자장가를 속삭이듯이, 학교에서 가장 똑똑했던 학생이 졸업 후에 자살한 이야기를 해줬다.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용의 자극성으로 인해서 졸고 있던 대여섯명이 머리를 완전히 세웠다. 학교 출신자가 자살하면, 졸업한 후에도 학교에서 그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노은실은 말했다. 일산화탄소 중독이었어요. 흰머리가 나온 관자놀이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선생은 그 학생이 택한 방법은 고통이 없는 자살법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고 읊조렸다. 이제 열 명 정도가 노은실의 말을 듣고 있었다. 노은실의 수업 시간에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깨어있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최가희는 노은실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 최가희는 저번 주 상담 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선생님, 제가 오래전부터 계획한 게 있는데요.” 노은실은 최가희를 기다렸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건 최악이에요. 20분간은 신경이 거뜬히 살아있어서 온몸이 아작난 고통을 고스란히 느낀대요. 게다가 저는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어서 추락사는 안 고를 거예요. 손목을 긋는 건 잘 안 죽고, 목매는 것도 척추 부러뜨릴 거 아니면 오래 걸린대요. 농약을 마시는 건 성공률이 낮고요.” 최가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는 건 고통이 없대요.” 최가희는 알고 있다. 노은실이 자신이 주절거렸던 말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날은 3학년 학생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다음날이었고, 그래서 위층 복도가 어수선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담실에 가기 가던 최가희는 그 복도를 지나쳐야 했고, 빈 책상에 국화꽃을 두고 나오던 한 선배를 봤다. 그는 경쟁자가 한 명 줄어서 다행이라고 옆의 친구한테 소근거렸다. 최가희는 하복 교복 위에 입은 가디건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날따라 최가희의 팔뚝에 든 멍은 시퍼렇고 커다랬다. 최가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게 고통이 없는 자살법이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죽는 순간의 고통은 자살자만이 알 수 있어요. 아무도 알 수 없죠. 정말로 고통이 덜 한지 더 한지.” 어쩌면 노은실이 자신을 겨냥해서 지금 이런 얘기를 꺼냈을지도 모른다고 최가희는 생각했다. 닷새에 하나꼴로 늘어나는 멍자국을 가리려고 가디건을 잡아당겼다. “이것만 알아주세요. 자살에 성공해서 나중에 발견된 시신들을 보면, 모든 시신들이 전혀 온전하지 않아요. 한 구도 빠짐없이요.” 노은실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최가희는 노은실에게 전혀 고맙지 않았다. 최가희는 원체 저작권도 없던 자신의 꿈을 뺏긴 것 같아서 분했다. 노은실은 최가희의 비밀스러운 소망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설사 최가희가 노은실에게 고백한 그의 바람이 헛된 망상일지라도, 노은실은 그를 위해 조용히 비밀을 지켰어야 했다. 하지만 노은실은 최가희를 배신했다. 그의 오랜 꿈이 공기에 노출되어 갈변됐다. 마치 그의 부친이 남긴 멍자국처럼. “죽음 또한 삶처럼 결코 깔끔하지 않은 고통이에요.” 노은실은 그 말을 끝으로 창문에 커튼을 쳤다. 최가희는 그날 상담실에 가지 않았다. 최가희는 그날 상담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상담실에 간 대신에 최가희는 대학생 남자와 저녁을 보냈고, 그 남자를 통해 쓸데없는 참견을 받지 않고 번개탄을 샀다. 그리고 집으로 갔다. 창틀과 문틈을 청테이프로 막고, 깨진 소주병을 버렸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부친을 밀고 번개탄을 피울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서툴게 불을 피웠다. 부친은 깊이 잠식되지 않았다. 이상한 냄새에 곧장 일어난 그는 번개탄을 후려쳤다. 창문을 주먹으로 깨뜨려 차가운 밤공기가 들이쳤다. 최가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친을 보면서 소주병을 미리 치워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사흘 뒤에 등교한 최가희는 모든 게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최경희는 아득바득 갈았던 복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노은실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복수한다는 말이죠?” 10년이 지나 다시 만난 노은실이 최가희에게 물었다. “당연히 선생님 남편분이 피운 바람이죠! 선생님이 유리하게 이혼하실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릴게요. 남편분 사진 많이 찍어올게요. 그걸로 소송 거세요.” 노은실은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저는 제 결혼생활에 만족해요.” “학교에서 쫓겨나실 때조차 만족하셨다는 말을 하셨나요?” 최가희가 쏘아붙였다. “모든 게 완벽해야만 만족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자포자기한 상태가 어떻게 만족스러우실 수가 있죠? 그건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하는 거예요.” 노은실은 최가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카페 밖을 나섰다. 노은실은 최가희를 따돌리려고 했을 것이다. 몰아치지는 장대비에 걸음을 멈추지만 않았더라면 성공했을 것이다. 최가희가 노은실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그는 물방울무늬를 가진 우산을 샀다. “가희 씨, 왜 하나만 사서 왔나요?”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최가희는 젖은 어깨를 털더니 노은실에게 우산을 씌웠다. 둘은 보조를 맞춰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노은실은 편의점에 즐비한 우산들을 봤다. “편의점에 우산이 하나만 있었을 리가 없죠.” 최가희가 노은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거짓말을 했군요.” “선생님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계시니, 서로 동점인걸로 해요.”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노은실은 걸음을 멈췄다. “가희 씨가 저와의 과거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스스로를 해치는 행동이니까요.”
노은실이 더 이상 학교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최가희는 상담실 창문에 의자를 던졌다. 그 일로 정학을 당한 뒤로는 자신의 부친에게 소주병을 던지고 집을 나왔다. 최가희는 유리벽이 가득한 골목을 걸으면서 노은실이 쫓겨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근무 태만, 지시 불이행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도루미라는 학생이 낸 소문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랑 있었던 모든 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최가희는 정학이 끝난 후 등교하자마자 옆반에 찾아갔다. 큰소리로 친구들과 떠들고 있던 도루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도루미의 친구들이 필사적으로 최가희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최가희는 도루미를 흠씬 두들겨 팼다.
“선생님이랑 매일 저녁에 이야기하고, 선생님 수업을 듣고, 선생님한테 키스한 것 모두 저를 지탱하는 기억이었어요.”
언젠간 상담이 길어져서 노은실과 같이 학교를 나왔을 때였다. 최가희는 정문을 열자마자 눈부시게 쏟아졌던 여름 햇살을 기억했다. 옅은 갈색빛이던 노은실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것도 생생히 기억해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입술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최가희 학생-“
“이제 저는 학생이 아니죠.” 성인이 된 최가희가 외치자 노은실이 우산을 뺏었다. 그 바람에 최가희는 크게 휘청거렸고 지나가던 승용차가 튀긴 물보라를 뒤집어썼다. 그 물보다 더 얼음장 같은 눈으로 노은실은 소리쳤다. “그럼 이제 어른 좀 되세요!” 빗물이 최가희의 머리카락과 뺨을 따라서 줄줄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선생님.” 노은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노은실은 뒤를 돌아 초록불이 된 횡단보도를 건넜다. “선생님, 저는 언제까지나 선생님께 죄송해할 거예요. 하지만 그만큼 제가 선생님께 감사해했다는 것도 알아주세요.” 사실 최가희는 충분한 양의 번개탄을 구매하지 않았다. 치명적일 양으로부터 딱 세 푼이 모자랄 양을 샀다. 대학생 남자 이후로 잡혀 있던 중년 남성과의 약속은 취소했다. 만남용 어플은 삭제했다. 눈이 밤탱이가 된 도루미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도루미는 그 사과를 받아줬고, 최가희는 도루미와 친해졌다. 도루미는 할머니와 함께 파란 슬레이트 지붕에서 살았다. 도루미의 할머니는 최가희를 아꼈다. 집을 나온 최가희는 새롭게 돌아갈 집을 얻었다. “감사합니다, 노은실 선생님.” 자신의 후회를 다잡는 일은 완벽하지 않았다. 최가희는 여전히 폭력적이었고, 만남용 어플을 재설치했으며, 학교에서 난동을 피웠다. 이런 발작적인 폭력은 심장의 공백에서 시작됐다고 최가희는 믿었다. 그는 말 없는 말과 쉬지 않는 숨으로 공백을 채울 줄 알았던 자신의 선생을 그리워했다. “이제는 진짜 어플 지우려고요. 아! 선생님이 남편분께 복수하기를 원하시면, 그 복수만 한 다음에 바로 지울게요.” 도루미는 노은실에 대한 최가희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일컬었지만, 최가희는 그것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그것의 시작은 증오였고, 그 다음은 숭배였으며, 마지막에는 후회였다.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만 부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삶이 고통이라고 하셨죠. 그 말을 했던 선생님의 삶도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지금에서야 저는 생각해요. 제가 그 고통을 다 헤아릴 수는 없죠, 하지만.” 자신의 말을 여전히 기다려주는 노은실을 보면서, 최가희는 그가 자신의 행복이었다고 7년만에 정의를 내렸다. “방황하던 누군가가 선생님 덕분에 행복을 배웠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계속 이혼 얘기를 꺼낸 거예요” 최가희는 겸연쩍어했다. “선생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어요.” 최가희는 자신의 선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문득 최가희는 머리를 때리던 빗방울이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수도꼭지에 쏟아지는 듯한 빗소리는 여전했다. 고개를 드니 노은실이 최가희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횡단보도는 빨간불로 바뀐 지 오래였다. “제가 산 우산도 아닌데, 쓰고 가는 건 미안하더라고요.” 노은실이 손수건을 건넸다. 최가희는 손수건이 상하지 않게 조심히 젖은 얼굴을 닦았다. “그럼 저기까지 씌워주세요.” 최가희는 가까운 술집에 고갯짓을 했다. 노은실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냐고 물었다. 최가희는 자신이 매일 술을 마시는 건 아니라고 변명했다. 노은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럼 오늘만 자신도 술을 마시겠다며 최가희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요 선생님, 결국 제가 선생님이랑 만날 용기를 낸 건 도루미 덕분이었거든요? 기억하세요?” “도루미 씨는 못 잊죠.” “걔가 지금 5년째인가 6년째인가 계속 공모전에 글 내고 있거든요. 그래서 걔가 이번에 선생님이랑 얘기 잘되면, 혹시 저희 이야기를 소재로 써도 되냐고-“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넵.” 최가희는 속으로 도루미에게 건투를 빌어주며 자신이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선생님의 카톡 배경사진을 보니까 헬멧 쓰시고 계시더라고요? 무슨 운동이에요?” 노은실이 소리내어 웃었다. “적적해서 몇 년 전부터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했어요.” “우와,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돼요? “가희 씨는 고소공포증이 심하지 않았나요?” “에이, 선생님이랑 같이 하는 건데 그 정도는 참아야죠. 제가 두근거리는 걸 좋아해서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있는데, 사람의 뇌는 심장이 막 뛰어도 이 심장이 무서워서 그러는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두근거리는지를 구분하지 못 한대요. 제가 아무리 위아래 없는 사람이라도 선생님 보고 심장병 걸리라고 기도할 수는 없으니까 패러글라이딩이라는 익-스트림한 스포츠를 같이 하는 건 어떠-” “술 뭐 마실래요?” 노은실은 술집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맑은 종소리가 났다. 최가희는 얼른 뛰어 들어갔다. “선생님이 고르시는 거 아무거나 좋아요!”
기조혜
“빌어 처먹을 불우한 가정환경 때문에 아무나 만나고 다니는 게 아니라고요, 선생님. 제가 정말로 그랬다면 제 부친 또래의 개저씨만 벗겨 먹었겠죠. 하지만 저는 대가리가 텅텅 빈 어린 놈들이랑도 놀아난답니다. 그러니까 내 비행의 원인을 드디어 알아냈다는 듯 눈 빛내면서 키보드 두드리지 마세요, 시발.” 최가희는 상담 선생의 말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자리를 박차더니 으스러질 정도로 문을 세게 닫고 나왔다. 씩씩거리던 최가희가 발견한 것은 교사 화장실을 가고 있던 노은실이었다. 노은실은 칫솔을 입에 문 채 최가희를 물끄러미 바라봤고. “뭘 봐, 시발.” 최가희는 눈길에 화답했다. 최가희와 노은실의 첫만남은 이러했다. 최가희는 명문도 똥통도 아닌 고등학교에서 명실상부 가장 꼴통인 학생이었고, 노은실은 30여년을 근무한 평범한 한문 선생이었다. 한문 선생의 운명은 보통 지루하다. 학교에서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는 고리타분한 노인을 한문 선생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은 일리 있는 편견이었다. 한문이 수능의 필수 과목으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문 선생은 수업이라는 노고에 답가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노은실은 세월의 스러짐에도 꼿꼿한 사람이었다. 그의 단아한 이목구비와 옅은 머리색은 학생들이 한문 선생이라는 사람 자체에 관심을 돌리게 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친구 같은 선생이 되는 쉬운 길을 노은실은 선택하지 않았다. 노은실은 장난 섞인 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한자를 읊었고, 결국 학생들은 노은실의 수업을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시간으로 삼았다. 노은실은 친구같이 만만한 선생이 아니었다. 노은실은 아직 분을 삭히지 못한 어린 최가희에게 말했다. “足家之馬(족가지마).” 칫솔을 물고 말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한 발음이었다. 최가희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도 학생에게 점잖게 쌍욕을 하는 중년 여자 선생은 처음이었다. 노은실은 어안이 벙벙한 최가희를 뒤로 하고 치약물을 뱉으러 사라졌다. 하지만 최가희 역시 만만한 학생은 아니었다. 최가희는 노은실이 화장실에서 나올때까지 기다렸다. 나오자마자 대뜸 대거리를 걸어오는 최가희에게 노은실은 아까는 실제 고사성어를 인용했을 뿐이며, 그래도 계속 따질 테면 자리를 옮기자며 최가희가 뛰쳐나왔던 상담실로 들어갔다. 최가희가 폭언을 뱉었던 상담 교사는 점심을 먹으러 간 지 오래여서 햇볕이 드는 상담실에는 최가희와 노은실뿐이었다. 노은실은 보온병으로 커피를 따라 최가희에게 건넸다. 최가희는 경계심 어린 눈으로 노은실을 쳐다봤다. 노은실은 김이 오르는 종이컵을 가만히 밀었다. “자, 마시세요. 학생이라도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셔도 될 거예요.”
최가희는 카페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나 노은실이 든 커피잔을 붙잡았다. 세월의 실금이 가지런한 노은실의 입매가 살짝 벌어졌다. 그러나 최가희의 주둥이가 더 빨랐다. “식은 커피를 마시게 하기 싫어요. 저랑 술 마시러 가요, 선생님.” “술은 지겨운데, 일단 자리를 옮기는 건 어때요?” 노은실은 반쯤 승낙했다.
상담은 계속됐다. 최가희가 상담 선생을 욕하고 뛰쳐나간 뒤로 최가희가 받던 공식적인 학교 상담은 최가희가 노은실 선생과 비공식적인 상담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다수가 만족한 결과였다. 최가희는 足家之馬(족가지마)라는 고사성어가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꾸짖는 뜻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따라서 노은실이 足家之馬(족가지마)라고 말했던 이유는 그 상황이 고사성어와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욕을 하고 싶어서 그랬다고 논파했다. 의기양양한 최가희 앞에서 노은실은, “맞아요. 욕해서 미안해요.” 하고 고개를 숙였다. 선생의 사과에 당황한 최가희는 노은실의 정수리만 쳐다봤다. 노은실과의 상담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가장 날카로우리라 믿었던 공격이 노은실의 호수 같은 반응에 잠겨서 형체를 잃은 채 흐트러졌다. 최가희는 난방이 잘된 방에서 차꼬를 차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은실과 있을 때마다 참아야 할 것이 생겼다. 그러나 그 속박이 답답하지는 않다고 최가희는 생각했다. 충분히 감수할만 했다. “선생님, 결혼하셨나요?” “했죠.” “아이가 있으신가요?” “있었죠.” 노은실은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먼저, 그는 침묵으로 공백을 채우는 법을 알았다. 노은실은 최가희가 말하기를 멈추면 자신도 멈췄다. 입을 열거나 컴퓨터의 키보드나 서류의 볼펜에 손을 대는 법이 없었다. 그저 시침 소리로 그 정적을 채우거나 커피의 뜨거운 김으로 허공을 물들었다. 최가희는 그때마다 자신이 존중받는다고 느꼈다. 두 번째, 노은실은 항상 상담실에서 최가희를 먼저 기다렸다. 최가희가 아무리 달음박질을 쳐도 선생은 이미 상담실에 도착해 있었다. 벅찬 숨을 내쉬는 최가희가 상담실을 열자마자 보는 광경은 창문에 커튼을 치는 노은실의 뒷모습이었다. 해질녘의 황금빛 가시가 선생의 어깨에서 부서지는 것을 보면서 학생은 그에게 자신의 심방을 열었다. 심장이 한 번 뛸 때, 최가희는 노은실을 소유한 것만 같았다. “결혼은 일찍 했지만 아이가 쉬이 생기지 않았죠. 늦둥이 딸 하나만 봤었어요.” 최가희의 질문에 노은실이 길게 대답했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뒤편에서 보았던 여자들. 브래지어를 찬 여자들이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들은 어항 같은 유리 벽 너머 손을 뻐끔거렸다. 그 건널목을 지나갈 때마다 그녀들을 감상하던 남자들을 있었다. 가로등에 삼삼오오 모인 그들은 담배를 길게 피며 그녀들을 연기 너머로 훑었다. 최가희는 남자들 중 눈에 익은 얼굴을 헤아렸다. 가장 익숙한 사람은 항상 찾지 못했다. 그러나 최가희는 언젠가는 자신의 부친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폭력적이고, 꼴초고, 여자를 좋아하는 그가 그의 아비를 닮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아비가 이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최가희는 혼자 담배를 피며 여자를 관찰했다. 핸드폰을 하면서 옆의 여자들과 즐겁게 대화를 하는 여자를 봤다. 최가희는 반짝거리는 하이힐이 그녀의 웃음소리에 따라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노은실의 가느다란 다리가 저 여자의 다리보다 예쁘다고 생각했다. 최가희는 여자들을 보면서 더 이상 그의 아비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생을 상상했다. “제 딸은 아홉 살 때 떠났어요. 음주운전 과실치사였죠.” 노은실이 마저 대답했다. 최가희는 노은실의 수업 때만큼은 졸지 않았다. 그 사실이 노은실에게 큰 감흥을 일으키진 않았다. 노은실은 아이들이 졸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녹색 칠판에 가지런히 한자를 쓰는 선생이었다. 한 획을 그었다. 최가희는 공책에 노은실의 획을 흉내 냈다. 한 획을 맺었다. 최가희는 노은실의 하늘거리는 손길을 음미했다. 늘 무표정한 노은실은 한 문장를 완성할 때마다 입가에 희미한 흡족함을 머금었는데, 최가희는 입매가 맺히는 그 순간을 목격할 때마다 가장 미세한 초신성 폭발을 목격한 유일무이한 관찰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아기는 실수의 결과죠. 사랑의 결실이라고 포장할 수 없단 말이에요. 늘 엉겁결에, 계획없이, 얼렁뚱땅 생겨요. 그래서 아기가 선물이 못 되면 재앙이 되는 법이죠.’ 최가희는 노은실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위로하는 법을 모르는 그는 노은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선생님이 선생님 아기에게 선물 같았을 거예요.” 그래서 최가희는 여느 때처럼 하고 싶은 말을 했고, 노은실은 그 말에 웃었다. 마치 한 문장을 완성했을 때처럼. 최가희만 유일하게 알아챘던 그 순간처럼. 우리 둘끼리만 그 암호를 즐기는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하하, 가희 학생은 부모님께 스스로 어떤 존재였을 것 같아요?" “와 저는 완벽한 재앙이자 사고이자 재난이었죠.”
“그러니까 죄송해요, 선생님.” 최가희는 노은실에게 계속 사과했다. 7년 만에 만난 은사는 옆머리에 은실이 몇 줄 더 그어진 것 빼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자그맣게 여윈 어깨도 수평선을 띄는 입가도 똑같았다. 그래서 최가희는 노은실을 그때 그 시절의 노은실과 도저히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최가희는 사과를 거듭했다. 모든 게 죄송스러웠다. “계속 사과할 필요는 없어요, 가희 씨.” 과거의 노은실이었다면 말을 더 잇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노은실은 달랐다. “저는 이미 남편과 이혼을 준비하고 있어요. 별거한 지도 벌써 3년이 넘었죠.” 노은실의 말이라면 스폰지처럼 흡수하던 어린 최가희도 성인이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날 남편분의 핸드폰에는 저녁 식사하고 오냐는 카톡을 보내셨던데요.” 최가희는 말을 골랐다. “저를 위해 선생님은 거짓말을 자주 하셨었죠. 별거 중이라는 말도 거짓말이죠?” 노은실은 침묵했다. 최가희는 그것을 공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가희는 노은실에게 배운대로 침묵을 하나의 말로, 대답으로, 진실로 받아들였다. “선생님, 제가 복수해드릴게요.”
노은실은 수업 시간에 딴 길로 새는 법이 없었다. 그 자신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성격도 아니었거니와, 학생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만한 언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따라 노은실은 흰 분필을 멈췄다. 그리고는 눈을 부릅뜬 채로 자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최가희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다섯 명의 학생과, 이미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는 나머지 스무 명의 학생을 돌아봤다. 노은실은 교탁을 나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점심시간 직후의 5교시는 항상 햇볕이 가득했다. 햇살은 노은실을 따뜻한 심장의 색으로 물들었다. “다음 주부터 시험에 대비해서 자습시간을 줄 예정이에요. 공부할 다른 책을 가져와서 봐도 좋아요. 30분까지는 수업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습하는 걸로 할게요.” 졸음을 참지 못했던 다섯 명은 지렁이 글씨체로 다음주부터 한문 자습-이라고 간신히 메모하더니 풀썩 엎드렸다. 곧이어 도로롱거리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가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최가희가 어떠한 소리라도 내려는 순간, 뜻밖에도 노은실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 사는 게 쉽지 않죠?”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최가희는 완전히 잠이 달아난 눈으로 노은실을 쳐다봤고, 엎드렸던 아이들 중에 얕은 수마에 빠졌던 몇몇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지루한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노은실은 자장가를 속삭이듯이, 학교에서 가장 똑똑했던 학생이 졸업 후에 자살한 이야기를 해줬다.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내용의 자극성으로 인해서 졸고 있던 대여섯명이 머리를 완전히 세웠다. 학교 출신자가 자살하면, 졸업한 후에도 학교에서 그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노은실은 말했다. 일산화탄소 중독이었어요. 흰머리가 나온 관자놀이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선생은 그 학생이 택한 방법은 고통이 없는 자살법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다고 읊조렸다. 이제 열 명 정도가 노은실의 말을 듣고 있었다. 노은실의 수업 시간에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깨어있는 것은 이례적이었다. 하지만 최가희는 노은실의 말에 집중하지 않았다. 최가희는 저번 주 상담 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선생님, 제가 오래전부터 계획한 게 있는데요.” 노은실은 최가희를 기다렸다.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건 최악이에요. 20분간은 신경이 거뜬히 살아있어서 온몸이 아작난 고통을 고스란히 느낀대요. 게다가 저는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어서 추락사는 안 고를 거예요. 손목을 긋는 건 잘 안 죽고, 목매는 것도 척추 부러뜨릴 거 아니면 오래 걸린대요. 농약을 마시는 건 성공률이 낮고요.” 최가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데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죽는 건 고통이 없대요.” 최가희는 알고 있다. 노은실이 자신이 주절거렸던 말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날은 3학년 학생이 옥상에서 뛰어내렸던 다음날이었고, 그래서 위층 복도가 어수선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상담실에 가기 가던 최가희는 그 복도를 지나쳐야 했고, 빈 책상에 국화꽃을 두고 나오던 한 선배를 봤다. 그는 경쟁자가 한 명 줄어서 다행이라고 옆의 친구한테 소근거렸다. 최가희는 하복 교복 위에 입은 가디건 소매를 잡아당겼다. 그날따라 최가희의 팔뚝에 든 멍은 시퍼렇고 커다랬다. 최가희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여러분, 이게 고통이 없는 자살법이라고 아무리 말해봤자, 죽는 순간의 고통은 자살자만이 알 수 있어요. 아무도 알 수 없죠. 정말로 고통이 덜 한지 더 한지.” 어쩌면 노은실이 자신을 겨냥해서 지금 이런 얘기를 꺼냈을지도 모른다고 최가희는 생각했다. 닷새에 하나꼴로 늘어나는 멍자국을 가리려고 가디건을 잡아당겼다. “이것만 알아주세요. 자살에 성공해서 나중에 발견된 시신들을 보면, 모든 시신들이 전혀 온전하지 않아요. 한 구도 빠짐없이요.” 노은실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최가희는 노은실에게 전혀 고맙지 않았다. 최가희는 원체 저작권도 없던 자신의 꿈을 뺏긴 것 같아서 분했다. 노은실은 최가희의 비밀스러운 소망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설사 최가희가 노은실에게 고백한 그의 바람이 헛된 망상일지라도, 노은실은 그를 위해 조용히 비밀을 지켰어야 했다. 하지만 노은실은 최가희를 배신했다. 그의 오랜 꿈이 공기에 노출되어 갈변됐다. 마치 그의 부친이 남긴 멍자국처럼. “죽음 또한 삶처럼 결코 깔끔하지 않은 고통이에요.” 노은실은 그 말을 끝으로 창문에 커튼을 쳤다. 최가희는 그날 상담실에 가지 않았다. 최가희는 그날 상담에 가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상담실에 간 대신에 최가희는 대학생 남자와 저녁을 보냈고, 그 남자를 통해 쓸데없는 참견을 받지 않고 번개탄을 샀다. 그리고 집으로 갔다. 창틀과 문틈을 청테이프로 막고, 깨진 소주병을 버렸다.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부친을 밀고 번개탄을 피울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서툴게 불을 피웠다. 부친은 깊이 잠식되지 않았다. 이상한 냄새에 곧장 일어난 그는 번개탄을 후려쳤다. 창문을 주먹으로 깨뜨려 차가운 밤공기가 들이쳤다. 최가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부친을 보면서 소주병을 미리 치워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사흘 뒤에 등교한 최가희는 모든 게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최경희는 아득바득 갈았던 복수심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노은실을 쫓아냈기 때문이다.
“무엇을 복수한다는 말이죠?” 10년이 지나 다시 만난 노은실이 최가희에게 물었다. “당연히 선생님 남편분이 피운 바람이죠! 선생님이 유리하게 이혼하실 수 있도록 제가 도와드릴게요. 남편분 사진 많이 찍어올게요. 그걸로 소송 거세요.” 노은실은 한숨을 쉬었다. “괜찮아요, 저는 제 결혼생활에 만족해요.” “학교에서 쫓겨나실 때조차 만족하셨다는 말을 하셨나요?” 최가희가 쏘아붙였다. “모든 게 완벽해야만 만족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자포자기한 상태가 어떻게 만족스러우실 수가 있죠? 그건 자기 자신한테 거짓말하는 거예요.” 노은실은 최가희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카페 밖을 나섰다. 노은실은 최가희를 따돌리려고 했을 것이다. 몰아치지는 장대비에 걸음을 멈추지만 않았더라면 성공했을 것이다. 최가희가 노은실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하더니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그는 물방울무늬를 가진 우산을 샀다. “가희 씨, 왜 하나만 사서 왔나요?” “하나밖에 없더라고요” 최가희는 젖은 어깨를 털더니 노은실에게 우산을 씌웠다. 둘은 보조를 맞춰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노은실은 편의점에 즐비한 우산들을 봤다. “편의점에 우산이 하나만 있었을 리가 없죠.” 최가희가 노은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선수를 쳤다. “거짓말을 했군요.” “선생님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계시니, 서로 동점인걸로 해요.” “거짓말하는 게 아니에요.” 노은실은 걸음을 멈췄다. “가희 씨가 저와의 과거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건 스스로를 해치는 행동이니까요.”
노은실이 더 이상 학교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최가희는 상담실 창문에 의자를 던졌다. 그 일로 정학을 당한 뒤로는 자신의 부친에게 소주병을 던지고 집을 나왔다. 최가희는 유리벽이 가득한 골목을 걸으면서 노은실이 쫓겨난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근무 태만, 지시 불이행 등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도루미라는 학생이 낸 소문이 결정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랑 있었던 모든 순간이 너무 행복했어요.”
최가희는 정학이 끝난 후 등교하자마자 옆반에 찾아갔다. 큰소리로 친구들과 떠들고 있던 도루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도루미의 친구들이 필사적으로 최가희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최가희는 도루미를 흠씬 두들겨 팼다.
“선생님이랑 매일 저녁에 이야기하고, 선생님 수업을 듣고, 선생님한테 키스한 것 모두 저를 지탱하는 기억이었어요.”
언젠간 상담이 길어져서 노은실과 같이 학교를 나왔을 때였다. 최가희는 정문을 열자마자 눈부시게 쏟아졌던 여름 햇살을 기억했다. 옅은 갈색빛이던 노은실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던 것도 생생히 기억해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입술이 어디에 있었는지도 똑똑히 기억한다. “최가희 학생-“
“이제 저는 학생이 아니죠.” 성인이 된 최가희가 외치자 노은실이 우산을 뺏었다. 그 바람에 최가희는 크게 휘청거렸고 지나가던 승용차가 튀긴 물보라를 뒤집어썼다. 그 물보다 더 얼음장 같은 눈으로 노은실은 소리쳤다. “그럼 이제 어른 좀 되세요!” 빗물이 최가희의 머리카락과 뺨을 따라서 줄줄 흘러내렸다. “죄송해요, 선생님.” 노은실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노은실은 뒤를 돌아 초록불이 된 횡단보도를 건넜다. “선생님, 저는 언제까지나 선생님께 죄송해할 거예요. 하지만 그만큼 제가 선생님께 감사해했다는 것도 알아주세요.” 사실 최가희는 충분한 양의 번개탄을 구매하지 않았다. 치명적일 양으로부터 딱 세 푼이 모자랄 양을 샀다. 대학생 남자 이후로 잡혀 있던 중년 남성과의 약속은 취소했다. 만남용 어플은 삭제했다. 눈이 밤탱이가 된 도루미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도루미는 그 사과를 받아줬고, 최가희는 도루미와 친해졌다. 도루미는 할머니와 함께 파란 슬레이트 지붕에서 살았다. 도루미의 할머니는 최가희를 아꼈다. 집을 나온 최가희는 새롭게 돌아갈 집을 얻었다. “감사합니다, 노은실 선생님.” 자신의 후회를 다잡는 일은 완벽하지 않았다. 최가희는 여전히 폭력적이었고, 만남용 어플을 재설치했으며, 학교에서 난동을 피웠다. 이런 발작적인 폭력은 심장의 공백에서 시작됐다고 최가희는 믿었다. 그는 말 없는 말과 쉬지 않는 숨으로 공백을 채울 줄 알았던 자신의 선생을 그리워했다. “이제는 진짜 어플 지우려고요. 아! 선생님이 남편분께 복수하기를 원하시면, 그 복수만 한 다음에 바로 지울게요.” 도루미는 노은실에 대한 최가희의 감정을 사랑이라고 일컬었지만, 최가희는 그것만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이라고 말하기엔 그것의 시작은 증오였고, 그 다음은 숭배였으며, 마지막에는 후회였다.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이름으로만 부를 수가 없었다. “선생님은 삶이 고통이라고 하셨죠. 그 말을 했던 선생님의 삶도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지금에서야 저는 생각해요. 제가 그 고통을 다 헤아릴 수는 없죠, 하지만.” 자신의 말을 여전히 기다려주는 노은실을 보면서, 최가희는 그가 자신의 행복이었다고 7년만에 정의를 내렸다. “방황하던 누군가가 선생님 덕분에 행복을 배웠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계속 이혼 얘기를 꺼낸 거예요” 최가희는 겸연쩍어했다. “선생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였어요.” 최가희는 자신의 선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문득 최가희는 머리를 때리던 빗방울이 멎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수도꼭지에 쏟아지는 듯한 빗소리는 여전했다. 고개를 드니 노은실이 최가희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횡단보도는 빨간불로 바뀐 지 오래였다. “제가 산 우산도 아닌데, 쓰고 가는 건 미안하더라고요.” 노은실이 손수건을 건넸다. 최가희는 손수건이 상하지 않게 조심히 젖은 얼굴을 닦았다. “그럼 저기까지 씌워주세요.” 최가희는 가까운 술집에 고갯짓을 했다. 노은실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냐고 물었다. 최가희는 자신이 매일 술을 마시는 건 아니라고 변명했다. 노은실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럼 오늘만 자신도 술을 마시겠다며 최가희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요 선생님, 결국 제가 선생님이랑 만날 용기를 낸 건 도루미 덕분이었거든요? 기억하세요?” “도루미 씨는 못 잊죠.” “걔가 지금 5년째인가 6년째인가 계속 공모전에 글 내고 있거든요. 그래서 걔가 이번에 선생님이랑 얘기 잘되면, 혹시 저희 이야기를 소재로 써도 되냐고-“ “꿈도 꾸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넵.” 최가희는 속으로 도루미에게 건투를 빌어주며 자신이 묻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그런데 선생님의 카톡 배경사진을 보니까 헬멧 쓰시고 계시더라고요? 무슨 운동이에요?” 노은실이 소리내어 웃었다. “적적해서 몇 년 전부터 패러글라이딩을 시작했어요.” “우와,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돼요? “가희 씨는 고소공포증이 심하지 않았나요?” “에이, 선생님이랑 같이 하는 건데 그 정도는 참아야죠. 제가 두근거리는 걸 좋아해서요. 어디서 주워들은 말이 있는데, 사람의 뇌는 심장이 막 뛰어도 이 심장이 무서워서 그러는지 좋아하는 사람 때문에 두근거리는지를 구분하지 못 한대요. 제가 아무리 위아래 없는 사람이라도 선생님 보고 심장병 걸리라고 기도할 수는 없으니까 패러글라이딩이라는 익-스트림한 스포츠를 같이 하는 건 어떠-” “술 뭐 마실래요?” 노은실은 술집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갔다. 맑은 종소리가 났다. 최가희는 얼른 뛰어 들어갔다. “선생님이 고르시는 거 아무거나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