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o bada hana beega 외 1편

싸리






sano bada hana beega



산호는 광물이 아닌 생물이다. 붉고 불투명한 보석으로 가공되기도 하는
산호는 식물이 아닌 동물이다. 나무와 닮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흰 산호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아직 살아서

백화현상은 산호가 공생조류를 배출하는 현상을 의미한다. 산호의 죽음이 아니라
부정적인 환경 조건으로 공생 관계가 틀어지면 서로의 생존이 어려워진다. 그래서

몰아냈다. 죽지 않으려면 몰아내야 한다. 떠나지 않으면 우리 여기서 죽어. 작별한 나는 다시 만나지 않으면 오래 살지 못한다. 원래부터 빨강이었던 산호는 하양으로 사는 법을 몰랐다. 하지만 해수 수온 상승은 산호 개체 하나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광물이 아닌 생물, 식물이 아닌 동물, 그런데 원하는 곳 어디로든 갈 수는 없는, 나는 점점 뜨거워지는 바다 안에서 빨강을 잃어가는데 우리는 우리를 원망해. 다른 모든 것들은 자기 색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빨간 눈물을 흘렸고 빨강은 눈물을 타고 더 빠르게 흘러나와서 빛이 닿지 않는 깊은 밤바다 산호는 혼자 더 하얗게 웅크렸다.

밤에는 모든 색이 숨는다. 밤에는 모두가 어둡다. 밤중에 어디로든 떠나는 꿈을 꿨다 산호 몸을 입고도. 아침이 찾아왔고 햇빛은 몸 구석을 찔렀다 수면을 뚫고도. 깨고 싶지 않아서 눈을 꾹 감았다. 빛에 있는 시간은 부끄럽다. 내가 보이고 주변이 보이고 여기와 저기가 보인다. 하얀 몸으로 눈을 꾹 감고 매일 아침을 버텼다. 그날도 눈을 꾹 감고 있었는데.

거대한 무언가가 나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사람이었는지 버려진 사물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분리되었다 나는. 바위와 나를 분리했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누군가는 재앙이라고 했다. 죽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죽지는 않았다 하얀 몸은. 더 희게 드러났고 죽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죽지는 않았다 흰 시절보다. 하얀 몸은 탄산칼슘 덩어리로 조금씩 끊어졌다. 끊어지고

부서지는 몸은
여전히 생각을 했고 찰랑이는 수면을 뚫고 들어오는 빛무리인지 빛의 무늬인지를 보고 있었고 손바닥을 빛이 오는 쪽으로 뻗었더니 빨갛게 물드는 윤곽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지를 볼 수 있었다. 가루처럼 더 잘게 부서졌다고 했다. 다른 산호들이 멀리서 보고 외치는 말을 들었다. 가루가 되었다는 손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수면 위는 아래보다 뜨거웠고 빛이 닿는 방향에 따라 빨강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끝을 알 수 없는 수면에서 윤곽은 찰랑였다.


*

다음은 재리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다.

- 재리는 섬에 산다.
- 섬에 사는 재리는 가족과 함께 산다.
- 가족과 함께 사는 재리는 가족을 사랑한다.
- 가족을 사랑하는 재리는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 떠나지 않는 재리는 가족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모른다.
-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모르는 재리는 바닷가에 앉아 바다 끝을 자주 바라본다.
- 끝을 바라보는 재리는 재리가 보는 곳이 진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서 알고 있다.

하나를 알기 전까지 사실들은 사실이었다. 재리는 하나를 인터넷 카페에서 만났다. 만남은 항상 돌연한 사고를 닮아서 재리와 하나의 만남도 그랬다. 재리는 섬에 하나 있는 학교에서 만든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었다. 재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가 아닌 사람은 재리를 칭찬했다. 재리를 칭찬한 사람은 재리에게 팀원이 되기를 제안했다. 재리는 늘 어딘가의 팀원이 되고 싶었다. 같이 가자고 부르는 사람이 말하는 칭찬을 믿었다. 같이 가자고 말하는 소리가 다른 어떤 칭찬보다 기뻤다. 초대받은 곳에는 하나가 아닌 사람들과 함께 하나가 있었다.

돌연히 하나를 만났다.

하나는 돌연한 것들을 몰고 오는 사람이라서 장면은 돌연히 전환되었다.

지금 재리와 하나는 몽골로 가는 비행기에 나란히 앉아 있다. 팀은 헤어지기 이전에 흩어졌다. 창가 자리에 앉은 사람은 재리다. 재리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직 섬에 산다. 바닷가에 앉아 바다 끝을 자주 바라본다. 보이는 곳이 진짜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워서 알고 있다. 통로 자리에 앉은 사람은 하나다. 학교에 다닌다. 섬에 살지 않는다. 그 밖의 사실을 재리는 아직 모른다. 재리는 비행기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바다 표면을 바라본다. 시속 천 키로미터 속도로 날고 있지만 바다 장면은 느리게 지나간다. 상공 천 미터 위에서 구름 대신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건 지금 날씨가 맑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 하늘은 파랗다. 따라서 지금 바다는 파랗다. 재리는 파란 바다 표면을 바라보면서 그 아래에 있을 것들을 상상한다. 모든 현상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있으며 아래에 있는 근거를 상상해야 한다고 얼마 전에 배웠기 때문이다.

아래에 있는 근거를 상상해야 한다고

재리는 빨간 산호를 보았다. 하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하나가 보고 있을 것들을 재리는 아직 모른다. 빨간 산호는 눈을 뜨고 손을 뻗어 하나의 머리를 흔들었다. 하나는 눈을 뜨지 않고도 머리를 흔들었다. 빨간 산호가 손을 거두고도 하나는 스스로 머리를 흔들었다.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님 여러분, 기류 불안정으로 우리 비행기 흔들리고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 좌석벨트를 매십시오. 안내방송이 들린다. 빨간 산호는 무섭다고 말한다. 얼른 바다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돌아가지 않으면 죽을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비행기 창문은 시속 천 키로미터 바람을 충분히 막아낼 만큼 견고해서 연약한 산호 손으로는 깨지지 않는다. 빨간 산호를 사랑하는 재리는 비행기를 바다로 몰고 가기로 결정한다. 빨간 산호를 사랑하지 않는 하나는 재리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나는 어느새 눈을 뜨고서 기장실 문을 부수고 침입한다. 기장실에 있던 빨간 산호는 실수로 빨간 버튼을 누른다. 비행기는 비행을 멈추고 수직으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복잡하게 생긴 버튼과 계기판 속에서 하나는 어떻게든 답을 찾으려 했지만 비행 경력이 없는 사람에게 비행기 조종은 만만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리와 하나는 몽골에 도착했다.

추락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상금과 함께 국제교류활동 혜택이 주어졌다.

마야와 타미르를 만났다. 넷은 팀이 되었다. 재리는 팀 이름에 산호를 넣고 싶다고 했고 하나는 바다를 넣고 싶다고 해서 팀 이름은 바다 산호가 되었다. 산호 바다보다는 바다 산호가 더 손에 잡힐 법하고 구체적인 상상이 가능한 이름이기 때문이었다. 재리와 하나는 몽골어를 몰랐고 마야와 타미르는 한국어를 몰랐다. 팀원들은 모두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팀원들은 엉망인 말에 최선을 다한 몸짓을 더해 대화했다. 항상 최선을 다할 수는 없어도 해야 할 말은 항상 결국 통했다. 통역가 선생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통역가 선생님, 하나의 이름은 왜 하나인가요? 질문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란다. 그 애한테 직접 물어봐야지. 나는 답을 몰라, 너희에게서 너희에게로 말을 옮길 뿐이야. 그런데 너는 누구니? 제 이름을 묻지 마세요. 너희 말고 바다 산호라고 우릴 불러 주세요. 그래, 바다 산호. 손이 빨갛구나. 그게 반드시 강조해야 할 사실인 것처럼 강조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 얘기는 꼭 전하고 싶었어. 멀리서도 눈에 띄어서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네가 이렇게 부정할 수 없을 만큼 가까이 있을 때.

바퀴가 굴러간다. 트럭은 무겁다. 무거운 트럭 바퀴는 습기로 찰박거리는 초원을 파헤친다. 파헤칠 의도는 버릴 수 있지만 무게는 누구도 버릴 수 없다. 무게는 밟는 땅마다 씻을 수 없는 자국을 남긴다. 자국을 씻으려고 애쓰지 마. 오직 뒤엉켜 기다리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야. 그런데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요? 통역가 선생님, 그런데 이건 누가 하는 말인가요? 그는 트럭 운전에 집중하고 있다. 끈적한 흙덩이가 바퀴 무늬와 닮은 모양으로 땅에서 솟아오른다. 풀은 삶 하나와 삶 여럿의 구분 없이 뿌리채 뽑혀 바퀴와 함께 굴러간다.

끝을 향해 걸어가면 계속해서 새로운 끝이 열리는 땅에 우리는 살아. 낮에는 천막 안에서 별을 보고 밤에는 땅 위에서 별을 보는 곳에 우리는 살아. 마야와 타미르는 통역가 선생님의 말을 빌려 말했다. 재리는 통역가 선생님의 말을 빌리지 않고도 말하고 싶었다. 재리는 재리가 사는 곳에 대해서도 그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적절한 문장을 떠올릴 수 없었다. 적절함을 향한 길을 더듬다가 문득 어떤 말로도 섬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가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섬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를 향해도 같은 끝으로 가로막히는 땅에서 왔다는 사실이 죽을 만큼 부끄러웠다. 죽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실제로 죽지는 않았으므로 재리는 죽지 않은 몸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마야와 타미르와 바다 산호와 몽골을 떠나 섬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재리가 달리기를 시작하기 직전에 하나가 등 뒤에서 재리를 껴안았다.


*

끝을 향해 걸어가면 계속해서 새로운 끝이 열리는 땅에 마야와 타미르는 산다. 낮에는 천막 안에서 별을 보고 밤에는 땅 위에서 별을 보는 곳에 그들은 산다. 마야와 타미르가 사는 낡은 천막, 천장을 바라보면 작은 구멍들이 보이는 천막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알 길이 없다. 타미르를 낳은 마야의 어머니가 만들었을까. 어쩌면 아주 멀고 먼 조상이. 타미르는 마야에게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불이 타오르는 검정 금속 난로 앞에서. 붉은 빛으로 붉어진 얼굴을 더 환하게 붉히며 신이 난 목소리로 소리치기만 했다.

엄마, 천장 좀 봐! 별이 더 많아졌어.

마야는 무릎 위에 누워 몸을 뒤척이는 타미르를 쓰다듬었다. 작은 아이의 검은 머리, 흰 각질이 촘촘히 박힌 검정 머리카락을. 작은 점 안에 더 작은 점이 박힌 점도 보인다. 붉은 빛을 받아 붉게 빛나는 각질, 하얀 점. 뒤척이는 무언가는 꿈틀거린다. 천장을 바라보며 두 팔을 높이 뻗는, 돌출된 점. 뒤척이며 움직이는, 빛이 나는 구멍 같은 점. 들을 마야는 바라보면서

웃으며 말했다.
네 머리에도 별이 더 많아졌네.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았구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었다. 검은 구름떼가 몰려왔다. 빗줄기는 빠르게 굵어졌다. 천막의 구멍에서는

빛 대신 비가

떨어졌다. 빛 대신 비. 별에서 비가
떨어졌다. 별에서 비. 수없이 많은 별에서
수없이 많은 비가 떨어졌다.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천막 천장이 찢어졌다. 타미르가 새로운 발견을 외치기도 전에
기둥이 무너졌다. 기둥이 난로를 덮쳤다. 검정 금속 난로가
쓰러졌다. 헐벗은 불
은 나무 기둥을 껴안았다. 기둥은 무너진 천장에 불을 붙이고.
무너진 천장은 희고 둥근 카펫에 불을 붙였다.
마야와 타미르는 이미 밖으로 나와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우리의 집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를 우리의 집은 불 속으로 사라지고. 비는 맹렬히 쏟아졌다.
불은 맹렬히 타올랐다. 모든 우리를 향해서

엄마, 솔직히 좀 좋지 않아?

그러나 이것은 회상이다. 타미르가 돌아온 순간은

기억나지 않는다.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

불은 너무 많이 타올랐다.

그들은 집이 있던 자리를 떠나 걷는다. 검은 구름은 찢어지고 하늘은 닫힌다. 시절이 있던 자리에는 이제 불도 비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이 자리를 떠나서. 아무것도 없을 자리를 향해 걷는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황야를 걷는다. 오른손과 왼손을 마주잡고 걷는다. 조금씩 둥글어지는 지평선이 붉은 구름을 품는다. 하늘이 닫힌 자리에서 붉은 구름 사이로 새 빛이 희미하게 열린다.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다.


*

재리는 영어를 잘하지 못했지만 영어 노래는 자주 들었다. 몽골어는 아예 알아듣지 못했지만 몽골어 노래도 때때로 들었다. 몽골에서의 일주일이 지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마야와 타미르는 재리에게 자주 연락했다. 인터넷을 통해 연락할 때에는 포털 사이트 번역기 이용이 가능해서 바다 산호 팀원들은 최선을 다한 몸짓과 통역가 선생님 없이도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었다. 재리가 듣는 노래는 모두 마야와 타미르가 알려준 곡들이었다. 재리는 그들에게 새로운 곡을 알려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을 통해 알게 된 노래에 대해 항상 새로운 감상을 적어서 보냈다. 그 시절 재리와 하나 사이에는 대화 대신 낯선 노래가 흘렀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흐르는 노래는 대화를 대체할 수 있었다.

백화현상은 산호의 죽음이 아니라 공생조류와 일시적으로 헤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다음은 산호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이다.

- 산호들은 죽어가고 있다. 지난 삼십년 간 전세계 산호의 반 이상이 죽었다.
- 백화현상은 산호의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 산호는 광물이 아닌 생물이다.
- 산업혁명 이후로는 보석 산호 대량생산이 인공적으로 가능하다.
- 산호는 식물이 아닌 동물이다.
- 안 먹는 것 없이 다 먹는다. 부유물, 배설물, 박테리아, 플랑크톤, 거의 모든 유기물.
- 산호지대가 바다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아주 적지만 해양생물 사분의 일 이상이 산호지대에서 살아간다.


나타난 빨강은 기운다.

나는 이제 부서진 내가 지겹다. 다른 모든 바다는 바라는 대로 흐르지 않았지만. 파도는 날숨과 함께 빠져나간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바람이 떠나는 것처럼. 가루는 해변 모래알 사이로 섞인다. 누군가 섬으로 가는 배에 탑승하고 있다는 말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 소리가 슬픈 노래처럼 밀려온다. 햇빛은 잠시 작별한 어느 시절보다 뜨겁다.

어느 시절보다 뜨거운 모래사장을
맨발로 달려가는 몸이 있다. 달려오는 소리가 있다.





적벽과 바람


신입 광대가 자기는 불 공포증이 있다면서 불에 타죽는 병사 역할은 도저히 못 맡겠다고 한다. 신입인데 배역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아니 그보다 불을 무서워하면서 왜 서커스를 하러 온 거지?

여기서도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서커스에서 불은 왜 중요한가요? 다른 공연과 어떻게 다른가요?

사실 여기가 아니어도 질문은 어디서든 시작할 수 있다.

잘못은 여기서도 시작할 수 있다. 팔십만 대군을 불태워 죽이려는 저 영웅은 잘못했다. 경력이 긴 그의 배역은 영웅이다. 순순히 불에 타죽지 않겠다는 광대를 나무란다. 서커스에서 광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해본 적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신입은 잘못했다. 신입은 대군의 쪼가리가 아니라 동남풍의 조각이 되고 싶다고 한다. 동남쪽에서 출발하는 와이어에 몸을 맡긴 채로. 겨울을 거슬러 불길을 인도하는 바람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한다.

(사람을 죽일 불길을 인도하는 바람은 잘못했다. 이 계절에 불가능한 바람이 가능하도록 칠성단에 기도를 올린 저 영웅도 잘못했다.)

잘못했다고 죽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 제가 타죽는 것보다 지금 중요한 목표는 멋진 퍼포먼스 아닐까요?

이 전쟁에선 병사가 죽는 게 퍼포먼스야.

사슬처럼 얽힌 배와 배 사이로 화약을 실은 배 한 척이 돌진하고, 견고함은 취약성으로 추락하고, 끊을 수 없는 이 진영의 연결고리를 따라 불은 쏜살처럼 달려나갈 거야, 사방으로! 영웅들에게 승리를, 장대한 서사에 잊히지 않을 장면을. 이름도 없는 병사로 사라지는 게 속상할 수 있겠지. 듣기 싫은 충고일 수 있어도 사회생활에 도움이 될 재산이니까 잘 들어요. 신입인데 이 장면에 기여할 배역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에요. 자기 안에 갇히지 말아요. 당신 머리 한참 위에 선 사람들이 이 세상엔 당신 생각보다 아주 많아요.

(아니 저는 불이 무서울 뿐인데요.)


*

공연은 정시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다고 들었다. 나는 그보다도 더 늦은 시간에 입장했다. 저기 와이어를 타고 허공을 가로지르는 광대가 그 신입인지는 모르겠다. 신입과 나는 얼굴을 튼 적 없고 이 서커스단에 광대는 여럿 있으니까.

퍼포먼스가 멋지다. 이 이상 말하지 않고도

나는 내가 용서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이 계절에 불가능한 바람이 가능하도록 기도를 올린

사람이 잘못했는지 나는 모르기로 했다.








싸리
2000년부터 살고 있다. 태어난 위치와 고향이 다르다고 느낀다.
빛이 보이면 사진을 찍는다. 움직이고 싶어서 쓴다.
인스타그램 @sariforest
이메일 eunyu926@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