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서

김애진


오늘은 나의 2학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결정되는 날이다. 오늘을 위해 종교도 없는 내가 기도를 했다. 나는 이랑이와 꼭 짝꿍이 되어야 한다. '되고 싶다.'와 같은 바람이 아닌 무조건 ‘되어야 한다.'가 맞다. 우리 반에서 나보다 더 걔를 궁금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짝꿍은 제비뽑기로 뽑았는데 나는 토끼를 뽑았다. 나의 거북이는 누굴까. 신이 있다면 이랑이가 꼭 거북이를 뽑게 해주세요.

세상에 신은 존재한다. 이때까지 신의 존재를 의심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한다. 이랑이는 내 짝이 되었다. 나는 부푼 가슴을 누르며 자리를 옮겼다.

"뭐야! 네가 내 짝이야? 난 너랑 짝하기 싫은데."

마음과는 다른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 그래? 그러면 선생님께 짝 바꿔 달라고 말씀드려볼까?"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얼마나 너랑 짝하고 싶었는데. 너는 안 그런가보다.

"아냐! 선생님 바쁘실 텐데 우리 그냥 앉자."

짝꿍 되는 과정이 조금 껄떡 지근하긴 했지만, 이후에 우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랑이는 영화를 좋아하고 방과 후나 주말에는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극장이라는 곳을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가봤다. 그것도 현진이 어머니가 데려가 줘서. 어렸을 때 현진이 어머니께서는 나와 영현이를 데리고 넷이 영화를 보러 다녔다. 영현이와 나는 현진이 어머니를 이모라 부르며 따랐다. 영현이와 현진이는 서로 옆집에 살았고 우리집은 좀 떨어져 있었지만,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동네라 셋이 함께 자랐다.

그때 어떤 영화를 봤는지보다 극장에 처음 간다는 사실에 들떴었다. 만화가 원작인 영화였다. 극장 가기 전날 밤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만화를 찾아봤었다. 정작 영화 내용은 만화가 원작인가 싶을 정도로 달랐지만. 영화가 끝나고 현진이 어머니는 근처 콩국수집에 우리를 데리고 갔다. 나는 그때 콩국수를 처음 봤는데 사실 이게 식사인가 싶었다. 흔한 오이 고명 하나 없었고 콩물이 아주 진해 콩국수인데 면이 보이지 않았다. 맞아, 걸쭉한 아침햇살 같았다. 나는 한 입 푹 콩국수를 떴다가 현진이 이모에게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냐고, 니 맛도 내 맛도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이모는 수저통 옆에 있는 작은 단지 뚜껑을 열어 보이며 설탕 쳐서 먹으라 했다. 나는 반짝거리고 고운 설탕을 한 숟가락 듬뿍 떠서 콩국수 위에 사르르 부었다. 하얀 설탕이 콩물에 젖어 투명하게 녹는 걸 지켜봤다.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하며 맛을 봤는데 맛이 진하고 달콤했다. 설탕 하나로 음식 맛이 이렇게 바뀌다니. 처음으로 토마토에 설탕을 뿌려 먹었던 날이 생각났다. 이제는 콩국수를 보면 넷이 함께 갔던 영화관이 떠올랐다.

나와는 달리 이랑이는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영화를 봤고, 자신만의 영화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게 멋있어 보였다. 그 애는 영화를 많이 알고 좋아하는 영화가 선명했는데 나는 영화를 접한 시기가 늦었고 당연히 좋아하는 영화 색깔이란 게 없었다. 어쩌다 극장에 가더라도 현진이네 이모가 끊은 영화를 봤으니까.

내가 이랑이였다면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것을 떠벌리고 다녔을텐데 걔는 주로 미소를 지으며 듣기만 했다. 내가 영화에 대해 물으면 모르는 게 거의 없는데도 걔는 잠자코 듣는 날이 많았다. 그런 이랑이에게도 뭔가가 움직이는, 꿈틀거리는듯한 것을 보일 때가 있었다. 자기 취향인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였다. 걔를 보면서 나는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얼굴만큼 벅차오르는 게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종종 나에게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추천해 주었고 나는 걔가 추천해 준 영화는 다 봤다. 이랑이가 좋아하는 영화는 나도 다 좋고 다음엔 어떤 영화를 좋아할지 궁금하다. 좋아하는 걸 말할 때 반짝거리는 그 애 눈이 좋았다.

1

이랑이를 처음 만난 건 그날이었다.

“자, 오늘 새로 전학생이 왔다.”

쟤는 어쩌다 이 시골까지 오게 됐을까.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동네 친구들은 유치원부터 지금까지 함께였다.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가끔은 애 같기만 한 이 애들이 지겹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안녕. 나는 서울에서 온 이랑이야. 잘 지내보자.”

오묘한 목소리를 한 그 애는 나의 눈을 사로잡았고 사람을 궁금하게 하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눈은 새까만 게 무심해 보이면서 안광이 빛나 살아있는 거 같았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안녕? 내가 학교 구경 시켜줄게. 나가자.”

친해질 때 먹을 거만큼 좋은 게 없다. 나는 그 애를 데리고 학교 밖 주유소로 향했다. 시골 깡촌에 있는 학교는 주변에 편의점은커녕 가게 하나 없다. 긴 교문을 따라나서면 큰 도로가 나왔고 길 건너편엔 주유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거기엔 기름 넣으러 온 손님들을 위한 자판기가 한 대 있었는데 곧 그 자판기는 학교 애들 차지가 되었다.

“너 뭐 마실래? 종류가 별로 없기는 한데 여기 망고 주스 맛있어. 망고 주스 마실래?”

“어...”

걔 눈이 이쪽저쪽 정신없이 흔들린다. 이게 아닌가?

“다른 거 마실래?”

“응.”

이거였구나.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구나. 말이 없는데 애인데 겉으로 보여서 다행이다.

“뭐 마실래?”

“나는, 아침햇살..!”

“참, 너 같은 거 먹는다. 아침햇살 같이 생겨서는.”

걔는 진짜 아침햇살 같았다. 까슬까슬할 정도로 짧은 새까만 머리에 뽀얀 우유처럼 참 하얀 얼굴이었다. 팔다리는 길쭉길쭉하고 말랐는데 신기하게 볼만큼은 통통해서 앳돼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눈 밑에 주근깨가 참 매력적이었다. 그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 있으면 얼굴은 귀여운데 팔다리가 시원시원한 백구가 생각났다.

2

“너 왜 여기로 전학 왔어?”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영현이와 현진이랑 나는 이랑이에게 다가갔다. 서글서글한 성격을 지닌 영현이가 이랑이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 좋은 학교라 하던데.”

이랑이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이맘때쯤이면 여기 애들은 보통 도시로 나가는데. 너는 왜 시골로 온거야?”

이번에는 현진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물었다.

“할머니댁이 여기야. 어렸을 때 방학이면 여기서 지냈는데.”

우리는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수업 종이 울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국어 시간을 싫어한다. 문학, 특히 시가 싫다. 읽을 때는 재밌지만 읽고 나서 아무 생각이 안 들 때가 있는데 선생님은 감상하고 나서 꼭 어떤 느낌인지 물어서 싫었다. 그래서 내가 모르겠다고 하면 그런 게 어딨냐고 수업 시간에 집중하라고 했다. 사람들마다 느끼는 게 다르기 때문에 문학을 배워야 한다고 했으면서. 이것 참, 표리부동이구먼. 선생님 머릿속에 이미 정해진 답이 있으면서 그런 건 뻔하고 별로 재미없다. 그랬는데 오늘은 국어 시간이 재밌었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그 애가 자신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오늘 같다면 국어 시간이 좋아질 거 같다.

“이 반에 전학생 왔다며? 쓴 거 한번 읽어봐라.”

걔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자신의 글을 읽어나갔다.

‘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도 방금 일어난 것처럼 그때 느꼈던 사소한 감정까지 모두 생생하게 기억한다는 것이다. 불행한 현재에도 5초면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갈 수 있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행복한 순간들을 초콜릿처럼 꺼내 먹을 수 있다. 그래서 이 험난한 삶을 이어가려면 초콜릿 같은 순간들을 많이 만들어 놔야 한다. 계속해서 생을 지속해 나갈 수 있게. 오래되어 눅눅한 햇빛 같은 행복한 기억은 고통스러운 날에 떠올리면 행복하다. 마음이 무거운 날에 그런 기억을 꺼내면 나도 모르게 입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사실 이 능력(?)은 단점이 더 많다. 망각은 신의 축복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불행하거나 부끄러웠던 일도 5초 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린다. 아니, 이 경우에는 떠올린다기보다 떠오른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쨍쨍한 오후 두 시의 햇빛 같은 행복한 기억은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한다. 봄날의 햇살은 나를 부끄럽게 한 기억이 있다. 눈이 시릴정도로 아름답고 따뜻해 눈물이 났다. 그런 종류의 행복한 기억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슬프게 한다. 이것을 맛보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몰랐다면 덜 고통스러울까. 쨍쨍한 햇빛의 기억이 눅눅한 햇빛의 기억이 되도록 시간이 흐르길 기다린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대화보다 글로 먼저 걔를 알게 되었다. 걔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알고 싶어졌다. 그 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학교 끝나고 같이 집에 가자고 해봐야겠다. 내가 자란 이곳은 내 눈길이 안 닿은 곳이 없다. 즉, 걔 집이 어디든 거긴 우리집 가는 방향이다.

“우리 짝꿍 됐으니까 집에 같이 가자. 이 동네에서는 짝꿍이랑 집에 같이 가야 돼.”

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 당할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말을 내뱉었다.

“아, 그래? 같이 가자.”

쟤도 참 특이하다 싶었다. 경계심이 없는 건지,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 말을 건 게 나여서 망정이지. 생긴 게 백구 같은 줄 알았더니 하는 짓도 백구 같다. 함께 걸으며 나의 일방적인 호구조사가 시작됐다. 걔는 우리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작은 뒷산 쪽에 산다고 했다. 그 집은 원래 빈집이었는데 거기로 들어왔구나. 옆집은 감나무 집인데 거기에 삼촌이 살고 부모님은 일 때문에 주말에만 내려오신다고 했다. 그쪽은 우리 집 가는 방향이 아니라 조금 돌아가야 했지만 뭐, 안 그래도 요즘 운동하려던 참이었다.

그 후로 우리는 매일 같이 집에 갔다. 좁은 골목길을 돌아 야트막한 산을 오르면 중간에 길게 뻗은 감나무 가지 보였다. 그 모퉁이를 돌면 걔네 집이 나왔고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대문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내일 학교에서 봐.”

3

이랑이가 학교에 오지 않은지 벌써 2주가 됐다. 이 시골까지 전학 온 건 이랑이가 몸이 약해서였다. 이랑이가 아파서 학교에 안 오는 동안 나는 영화를 보면서 그 애를 기다렸다. 걔가 외로울 때 봤다는 영화, 가슴 아픈 망한 사랑 영화, 생각 없이 보기 좋은 영화 등등. 나는 혼자서 그 애가 봤던 영화를 봤다. 박찬욱의 미장셴이 뛰어난 영화, 히치콕 이야기를 하며 말했던 맥거핀도 익혀 두었다. 나중에 걔가 학교에 오면 우리 사이의 대화가 매끄러울 수 있게 열심히 봤다.

그 애와 함께 걸었던 골목길을 두고 곧장 집으로 가로질러 갔다. 걔가 전학 오기 전에는 이 길로 다녔는데 뒷산으로 가는 방향이 원래 드나들던 곳 같다. 나는 운동화 앞코로 애꿎은 돌을 차며 걸었다.

토옥 톡 데구르르.

돌이 멈춘 곳까지 걸었다.

탁탁탁 데구르르.

돌이 풀숲으로 들어가 버렸다.

에휴, 내일은 이랑이가 학교에 나올까.

4

“너 이랑이 좋아하지?” 현진이가 책상에 엎드려 있던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뭐야? 그런 거였어?” 옆에 있던 영현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갑자기 뭐야.”

가뜩이나 이랑이 걱정에 머리 아픈데 갑자기 쟤가 왜 저러나 싶다.

“쟤 요즘 기분 안 좋은 거 이랑이가 학교 안 와서 그런 거잖아. 한동안은 걔 옆에 찰싹 붙어서 정신없어 보이더니.”

내가 그랬나 싶었다가 그게 티가 났나 싶었다.

“전에 나랑 이랑이랑 이야기하고, 제야는 너랑 이야기하고 있었거든. 근데 쟤 말하면서 너를 쳐다보는 게 아니라 계속 이랑이 쳐다보고 있었어.”

“그랬어? 야, 아무리 그래도 나랑 대화할 때는 나한테 집중해야지.” 현진이가 영현이한테 말하자 영현이가 서운한 척하며 나를 놀렸다.

"네가 말하는 게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면 나는 이미 그 단계를 넘었지."

나는 책상에 한 팔로 팔배게를 하며 돌아누웠다.

"뭐라는 거야."

"근데, 티 많이 나냐?"

"아마 너랑 이랑이 빼고 다 알 거 같은데? 걔도 좀 특이하잖아. 되게 에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해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바보 같고."

"하아, 나 그랬는지 전혀 몰랐는데. 아무튼 너 이거 절대 이랑이한테 말하며 안돼. 알았지?"

말을 뱉고 보니 나중에 결국 들키게 되는 영화의 뻔한 클리셰 장면 같이 느껴졌다.

내 인생에 그 아이가 있었던 시간보다 없었던 시간이 더 긴데 이전에는 어떻게 지냈나 싶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익숙한 형체가 보인다.

5

“몸은 좀 괜찮아?”

“응. 이제 좀 괜찮아.”

이랑이와 내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돌을 차며 걸었다.

톡톡톡 데구르르.

타다타다다닥.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막상 이렇게 얼굴을 보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음. 나는. 네가 이 학교에 오기 전에는 원래 집에 혼자 갔는데. 네가 아파서 학교 끝나고 혼자 집 가니까 심심하더라.”

“미안.” 이랑이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멋쩍게 웃었다.

“많이 아팠어?”

“응. 이렇게 심하게 아픈 게 오랜만이라 무서웠어. 얼른 자고 일어나야 몸이 좀 나을 텐데 너무 아파서 잠이 들 수가 없을 정도로.”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데 많이 아팠나 보다.

“나만 빼고 모두 잠들었는데 밤은 너무 길어 얼마나 이 고통을 느껴야 아침이 밝을까. 혼자 아침을 기다리는 밤이 외로웠어.”

나는 마음이 아팠다. 단단해 보이기만 했는데. 그 아이의 몸이 약해진 동안 마음이 더 약해진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아픈 게 당연한 건데 좀 건강해졌다고 그걸 잊었네. 오랜만에 아프니까 억울하더라. 남들은 10의 시간을 쓸 수 있다면, 나는 2, 3 밖에 못 쓰는 기분이야. 그래서 초조하고 불안해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몰랐다. 내가 학교에서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는 다른 사람이 되어 온 거 같았다. 이랑이의 말처럼 나의 하루와 이랑이의 하루는 달랐다. “요즘은 내가 빨리 죽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병들거나 아니면 자살해서 빨리 죽을 것만 같아. 이건 인생에서 드물게 오는 확신이야. 내가 삶을 떠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근데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조금 편해져.”

가슴 속 저 밑에서 뜨거운 게 올라온다. 목구멍에서 뜨끈뜨끈한 게 올라와 애써 침을 삼키며 눌렀다. 이건 화일까. 아니면 섭섭함? 모르겠다. 이건 한 단어로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덩어리다. 지금은 나를 머리 아프게 하는 네가 미울 뿐이다. 너를 알기 전과 후는 나에게 다른 세상이 되었는데 자신이 없는 세상을 생각했다니.

“떠나지마.”

“안 떠나.”

“나 헤어지는 거 잘 못한단 말이야.”

이랑이가 피식 웃는다. 웃을 때 저 한쪽 입꼬리만 올라가는 게 좋아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싶어서 너를 웃기고 싶었다.

6

어느새 이랑이 집 앞에 도착했다. 쟤는 저런 엄청난 말을 내뱉고는 평소와 같이 집으로 들어갔다. “내일 학교에서 보자.”

나도 평소처럼 집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착잡한 마음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갔다.

이랑이가 요즘 힘들어 보여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헤어지고 집에 가는 길에 꽃집을 발견해 꽃을 선물하기로 했다. 걔는 화려한 꽃다발보다는 지나가는 길에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들풀이 어울리는 애다.

나는 꽃다발을 사서 이랑이와 함께 걸었던 길을 다시 혼자 되돌아갔다. 이랑이네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매일 보던 대문인데 그 문이 아닌 거 같았다.

나는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초인종을 눌렀다.

“와. 정말 고마워.”

이랑이가 눈이 휘어지도록 웃는다. 좋아하는 얼굴을 보니 역시 선물은 받을 때보다 줄 때가 더 행복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꽃다발보다 수수한 들꽃들로 달라고 했어. 전에 네가 들꽃 좋아한다고 해서.”

“진짜 마음에 든다. 나 태어나서 꽃 선물 처음 받아봐.”

“뭐? 친구들이나 부모님께 안 받았어?”

“응. 꽃을 받아보니 사람들이 왜 꽃을 선물하는지 알겠다. 살아있는 것을 받으니까 나도 꽤 소중한 사람이 된 거 같네. 정말 고마워. 요즘 행복하다. 너를 만나고서부터 말도 안 되게 행복해.”

너는 행복할 때 말도 안 된다는 표현을 했다. 꽃은 내가 줬는데 오히려 내가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누가 나에게 이랑이는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이요.”

너무 좋아서 여러 번 읽다 못해 구절들을 외워 버린 그런 책 말이다. 그렇게 많이 읽으면 이 생각이 내 생각인지, 그 책의 내용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가끔은 내가 한 말이 나중에 책을 보면 그 책의 구절인 적도 있었다. 이랑이는 보고 있으면서도 계속 보고 싶고, 내가 걔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으면 좋겠다. 함께 있을 때는 오늘이 아니면 만나지 못할 것처럼 계속 떠들었고 같이 있지 않을 때는 걔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가끔은 이랑이가 좋아서, 너무 좋아서, 좋은 게 싫을 때가 있다. 그 애와 같이 있을 때나 함께 하지 않을 때나 내내 그 애만 생각해서 힘들었다. 걔도 나만큼 나를 생각할지, 나와 같은 온도일지 자신이 없었다.

7

“집에 들어왔다 갈래?” 우리가 짝꿍이 된 이후로 매일 집에 같이 갔지만 이랑이네 집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이 대문을 넘어보는구나. 매일 이 대문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는데. 나는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발을 내딛었다. 작은 마당과 나무로 된 작은 집이 나왔다. 그래도 이랑이 혼자 지내기에는 작지 않은 집이었다. 바닥은 마룻바닥이었고 깔끔해 빤딱빤딱 광이 났다. 나는 괜히 스케이트 타는 시늉을 했다. 거실에는 큰 텔레비전이 있었는데 텔레비전보다는 스크린 같았다. tv 맞은편에는 소파가 있었는데 우리집에 있는 갈색 소파 같은 게 아니라 1인용 소파 2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꼭 영화관에 비싼 좌석 같았다. 후에 그게 리클라이너라는 것을 알았다. tv 밑에는 책, 비디오, dvd가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꽂혀있었다. 양이 많고 정돈된 모습이 인테리어 소품 같았다.

"잠깐 소파에 앉아 있어. 뭐 마실래?“

“아냐, 괜찮아.”

나는 넋을 놓고 집에 있는 책과 영화를 구경했다. 그러자 이랑이가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보자고 했다. 걔는 이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평소보다 신이 나 보였다.

“이 영화는 소프트콘을 먹으면서 봐야 하는데. 여긴 한국이니까 빵빠레로 대체하자.”

평소에는 그 애가 나를 지켜보고 내가 떠들었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 애를 지켜보고 그 애가 재잘거렸다. 걔는 복잡한 동선의 거침없는 배테랑 연극 배우처럼 혼자 분주히 움직이며 영화 볼 준비를 했다. 나와 이랑이는 소파에 기대어 빵빠레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영화를 봤다. 아이스크림은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내 옆에는 이랑이가 있다. 아이스크림이 혀가 아릴 정도로 너무 달달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아니,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내 마지막 순간은 너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영화를 본 순간으로 간직할 수 있을 텐데.

"아, 너무 행복해, 그럴 때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춰버렸으면 좋겠어."

"나는 너무 행복하면 불안해."

"불안하다고?"

"응.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나는 불행한 사람인데. 행복을 맛봐버리면 다음에 올 불행을 내가 견딜 수 있을까. 그래서 행복하면 그 후에 거대한 불행이 올 것 같아서 무서워. 이 행복이 끝나고 나면 나는 전보다 더 불행하겠지 하고말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네가 맛보는 행복감이 지겨울 정도로 자주. 더 많이."

그때 TV에서 주인공이 친구에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주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생일인 친구에게 불꽃놀이를 보여주려는 마음이 따뜻했다.

“나는 생일 축하 노래 처음 들었을 때 혼자 울었다.”

이랑이가 덤덤하게 말했다.

“왜?”

“우리 집은 생일을 안 챙겨서 교회에서 처음 생일 축하 노래를 들었어. 교회에서는 그달 생일을 같이 묶어서 축하하잖아. 그때가 6살 때쯤인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불러주는데 너무 슬픈 거야.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니. 내가 들어도 되는 노래일까 무서웠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너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어. 그 사실이 의심될 때면 나를 떠올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너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

그러자 이랑이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근데 우리는 어떻게 친구가 됐지?"

"나는 너 전학 온 날 생각나. 눈은 심드렁하고 입은 꾹 닫고 있는데 그 모습이 물이 가득 담긴 컵 같았어. 물이 찰랑거려서 곧 넘치기 직전인데 넘치지는 않는. 보통 그러면 물이 넘쳐버리는데. 너는 아슬아슬 전부 담아두고 있는 거 같더라.”

이랑이는 생각에 잠길 때면 왼쪽 눈썹을 찡그린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너의 머릿속을 꺼내서 들여다보고 싶어.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나는 영영 자라지 않고 이대로였으면 좋겠는데.”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왜?”

“대학에 가고 졸업을 해서 내 영화를 찍고 싶거든. 그때를 상상하면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 얼른 내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너는 나보다 빨리 자라는 거 같아. 나는 아직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 모르는데. 이럴 때면 네가 나만 놔두고 훨훨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너와 함께 있으면 세상이 궁금해지고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미래의 난 어떤 모습일까 그리게 되고 그 미래에 너와 계속 함께이기를 기도한다.

8

“내가 연락했는데 왜 안 받았냐? 어제 시내 가려고 너한테 전화했는데.” 현진이가 툴툴거리며 내게 말했다.

요즘 얘네한테 소홀했나보다.

“어제 이랑이 집에서 영화 보느라 연락을 못 봤어.”

“뭐? 우리도 갈래. 왜 너만 재밌는 거 하냐.” 영현이가 눈을 반짝거리며 이랑이를 쳐다봤다.

“음. 그럴래?”

“또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뭐 좋네. 그럼 추석 지나고 놀러 가도 돼?”

“추석은 너무 많이 남았는데.” 현진이가 제안하자 영현이가 얼른 놀고 싶다며 징징거렸다.

“어차피 그때 어디 안 가니까 추석 때 모이자,”

“야, 우리는 어디 안 가도 쟤는 가겠지.”

“우리 부모님 바빠서 추석 때 못 오신대. 그날 집에 나 혼자 있어.”

“잘 됐다. 그럼 우리 추석 때 각자 음식 싸가지고 이랑이네 집에서 모이자. 미드 보면 파티할 때 그렇게 하잖아.” 영현이가 들떠서 당장 내일이 추석인 것처럼 말했다.

영현이는 집에서 육전을, 현진이는 집에서 만든 송편, 나는 미역국을 싸갔다. 추석과 미역국은 관련이 없어 보이지만 전에 이랑이가 음식 중에 미역국을 가장 좋아한다고 했었다. 생일에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미역국을 먹는게 운명 같다며.

“웬 미역국? 추석에 미역국 안 먹지 않냐?” 영현이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우리 집은 추석에 미역국 먹어.” 내가 더 어이없다는 듯 답했다.

영현이랑 내가 투닥거리는 걸 이랑이가 보며 웃었다. 그러고는 명절에 주로 혼자 집에서 영화를 봤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으니 이상하다며 또 웃었다.

“와, 그럼 너 여기서 혼자 지내는거야? 좋겠다.”

“뭐가 좋냐. 외롭고 무섭기도 할텐데. 근데 여기 책이랑 영화가 정말 많다. 작은 도서관 같다.” 내가 이랑이네 처음 갔던 날처럼 영현이랑 현진이도 구경하기 바빴다. 학교에서 이랑이 집에 놀러 간 건 나뿐이었는데. 뭐, 그래도 처음으로 온 건 나니까. 요즘 나는 내가 얼마나 유치해 질 수 있는지 놀랐다.

“여기 비디오도 많네. 오! 나 어렸을 때 디지몬 어드벤처 엄청 좋아했는데.” 영현이가 흥분하며 반가워했다.

나왔다. 저 표정. 이랑이 얼굴이 환해지면서 신이 나 보였다. 나는 간만에 보는 그 모습에 걔가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나 디지몬 진짜 좋아해."

이랑이가 그렇게 흥분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야, 나도 엄청 좋아해. 나도 비디오 있어."

"여기 1화랑 마지막화 빼고 다 있는데. 그거 두 개 절판 돼서 못 구했어."

"우리집에 전편 다 있어!"

이랑이가 입을 벌리고 놀란다. 그렇다, 영현이는 이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비디오 가게 집 아들이었다.

이랑이가 신나서 막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미지근하게 식어버렸다. 룰루랄라 신난 등산객이 말도 안 되게 높은 산에 압도되어 입구에서 돌아가는 모습 같았다.

흔치 않은 이랑이의 뭔가가 꿈틀거리는 순간을 보고 싶었는데. 눈치 없는 영현이만 계속 떠들었다.

"저거 전부 다 열 번씩은 봤을거야."

그래도 둘이 저렇게 대화하는 건 처음 봤다.

“둘이 저러는 거 처음 봐.” 현진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우리들만의 추석을 보내고 우리는 각자 집에 갈 채비를 했다. 그러자 이랑이도 밖에 나갈 준비를 했다.

“너는 왜? 어디 가게?”

“맨날 네가 우리집까지 바래다 줬으니까 오늘은 내가 너 바래다줄게.”

현진이와 영현이는 같이 집으로 갔고, 나와 이랑이는 함께 걸었다.

“너 아까 영현이랑 되게 신나 보이더라?”

“나 만화 중에 디지몬 제일 좋아하거든. 너도 봤어?“

“아니, 나는 포켓몬스터 봤는데.”

나는 7살인 이랑이가 비디오를 집중해서 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나는 그중에서 마지막화 보던 날이 생생해. 그날 거실 풍경, 분위기, 공기 다 기억나.”

“그렇게 좋았어?”

“좋았다기보다 복잡해. 마지막화에 주인공들이랑 디지몬이랑 헤어지거든.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각자의 방법으로 이별을 하지. 어떤 애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펑펑 울고 어떤 애는 담담히 디지몬이 좋아했던 자신의 하모니카 연주를 들려줘.”

그때를 떠올리며 나에게 말하는 모습이 이 애한테는 그게 단순히 만화가 아니었구나 느꼈다.

“그렇게 서로 작별 인사를 하는데 어떤 애는 헤어지는 게 싫어서 숲으로 숨어 버려. 어렸을 때는 곧 떠나야 하니까 저럴 시간이 없는데 하고 초조했는데 지금은 그 애가 나 같아. 마음이 아파 어떻게 이별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도망가버리는.”

“그거 애들이 보는 만화 아니야? 그렇게 슬픈 내용이었어?”

“그러니까. 난 그 날 이후로 자라지 못한 거 같아.”

아니야, 너는 이렇게 잘 자라주었는걸. 나는 구태여 덧붙이지 않고 그 애의 눈을 쳐다봤다.

“이게 진짜 마지막인 건가. 이제는 보고 싶어도 더 이상 볼 수가 없나. 그 이후로 모든 이별이 다 어색하고 싫었어. 이 날이 지나면 우리는 다시 못 만나는구나. 여러 이별을 하다 보면 나중엔 잘 헤어질 수 있게 될까. 애초에 이별이 익숙해지는 날이 오기는 할까. 나만 빼고 모두 훌훌 털고 쉽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 같은데.”

“세상의 모든 이별은 힘든 거야.”

“그러니까 너만은 먼저 나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얘는 꼭 슬픈 말을 담담하게 하고 마지막에 애써 웃어보였다. 그 웃음이 앞서 한 말과 너무 어우러지지 않아 나는 눈물이 날 거 같았다.

9

오예. 지난번에 신청한 영화 시사회에 당첨되었다. 신청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은 영화라고 구구절절 보냈다. 평소에 당첨 운이 없는데, 징조가 좋다. 이랑이한테 학교 끝나고 같이 저녁 먹고 영화 보러 가자고 해야겠다. 이러니까 왠지 데이트 같다.

"네가 좋아하는 감독 있잖아. 그 감독이 이번에 관객과의 대화하는데 그거 당첨됐거든. 그거 같이 갈래?"

"진짜? 그거 보고 싶었는데!"

시사회로 영화관은 사람들로 붐볐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제야요."

"네. 확인되셨고요. 모니터에서 좌석 선택해주세요."

"어디 앉을까?" 내가 물었다.

"앞자리밖에 안 남았네. 목 아플 거 같은데. 커플석 앉을까?"

"그..그래. 좌석도 넓고 좋네..."

나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너는 아무런 마음도 없는 걸까?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좌석에 앉았다. 커플석은 팔걸이가 없구나, 커다란 캡슐 우주선에 둘만 탑승한 거 같다, 이러면 같이 팝콘을 먹거나 손을 잡기에 용이하겠네와 같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극장 불이 꺼졌다.

전에는 극장에 가는 것이 시간 때우기 좋은 일이었는데 요즘은 극장에 가면 묘한 흥분감이 든다. 이랑이와 같이 가서 그런가. 불을 끄고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것은 본다는 것이 참 낭만적이다.

많은 것이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도 느린 사람들이 있다. 클릭 한 번이면 손쉽게 집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데 영화를 보러 시간 맞춰 극장에 간다. 가서 본 영화가 좋든, 싫든 꼼짝없이 2시간 동안 봐야 한다. 이렇게 불편하고 귀찮은 일이 좋아졌다. 영사기 빛 사이로 보이는 부유하는 먼지는 마치 고전 영화의 노이즈 같고, 사람들과 한 공간에 모여 같은 것을 본다는 게 낭만적이다. 여기서는 추하게 울어도 사람들이 영화가 많이 슬펐나보다 하고 이해해 줄 거 같다. 이렇게 영화를 보고 있으면 같이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슨 연유로 이 시간에,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나와 같은 귀찮은 짓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특히 영화가 좋았으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안에 불이 켜지면 사람들을 붙잡고 영화가 어땠는지 묻는 상상을 한다.

‘이 영화 엄청 좋지 않았어요? 이거 어떻게 알고 보러 오셨어요?’

10

관객과의 대화가 시작되었고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이랑이랑 영화보고 싶어서 신청한 거였는데 생각보다 재밌었고 특별한 금요일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랑이를 쳐다보니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왼쪽 눈썹을 한껏 찡그리고 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너도 나처럼 행복한 순간이면 좋겠다.

나는 좋은 관계에서 항상 끝을 먼저 상상했다. 이 관계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하고. 우리의 끝은 어떨지 그려본다. 나는 누군가와 헤어질 때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겠지.'하고 생각한다. 그러면 꽤 이상하고 섭섭한 기분이 든다. 이제 오늘 이후로 만날 일 없는데 이상하게 그 사실을 아는 건 나뿐인 것 같다. 그러니 우리는 동시에 죽자. 한날한시에. 우리 사이의 섭섭함, 기대, 슬픔 아무것도 모르게.

관객과의 대화가 끝나고 우리는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워서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누가 먼저 말할 것도 없이 근처 가게에서 빵빠레를 사 들고. 아이스크림은 부드럽고, 밤바람은 시원하고, 나와 이랑이는 나란히 그네를 타고 있다. 여기서 뭐가 더 필요할까.

"와, 바람 진짜 시원하다."

"정말. 너무 기분 좋아. 영화도 재밌었고."

"응. 오늘 같은 날은 비가 와도 하늘이 오늘을 잊지 말라고 비 내리는 거라 생각할거야."

“요즘 정말 행복하다.” 앞으로 행복하다고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얼마나 있을까? 이랑이가 나를 쳐다본다.

"왜? 불안해?" 내가 묻자 이랑이의 표정이 일렁인다. "나중에 오늘을 두고두고 그리워할 것 같아. 나는 행복해서 오늘 죽어도 괜찮을 것 같은 날이었어, 너는?"

이랑이가 또 내가 아는 표정을 짓는다. 왼쪽 눈썹을 찡그리며 내게 말한다.

"나도. 나 불안해."






김애진
이야기를 좋아하는 김애진입니다. 소설과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하며 이를 사람들과 나눌 때 살아있는 듯한 기분을 느껴요. 요즘은 제가 이야기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재밌어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혼자 글을 쓰고 있어 지금 하고 있는 게 맞나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번에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