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쇼트 외 2편
최민우
롱쇼트
꿈속을 되짚어보는 꿈을 꿀까 나는 영사실에서 영화를 튼 채 잠들었다
파스텔 톤의 회색 사람들 그는 좌석 앞에서 망설이는 내가 익숙하다 그가 앞서 계단을 오를 때 나는 내가 정말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을 그에게 말했다 이걸 기록하는 지금 그의 대답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이름 모를 철학자의 말을 인용했다 아주 평범했는데 본 적 없는 내 인생을 적어둔 것 같았다
모두가 움직이지 못할 때 안주하는 것은 죄악이다
나는 제법 철학자처럼 생각해본다 철학자는
여기 있습니다 외치는 누군가의 손이 지하철로 들어섰다
안내방송 변주로 문이 열린다 지하철 문틈에 그가 탄 휠체어 바퀴가 낀다
나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그에게 말한다 모두가 움직이지 못할 때 안주하는 것은 죄악이다
사람들은 그를 무대 위로 밀어놓고 빈자리에 앉아 자신을 소개한다 저는 출근해야 돼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역 안에 그림자가 빼곡하다 희미한 핀 조명이 그에게서 떠나가지 않는다 빛이 먼지를 지그시 누른다 커피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평소보다 엘리베이터가 심하게 덜컹거리자 나는 꿈에서 깼다 인기 없는 독립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나는 출입 일지를 몰아서 썼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지하철역이 무너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무너진 틈바구니에서 모두 일광욕하고 있었다
모자이크 기법으로 꾸며진 풍경이다
따사로운 햇살은 하루 이틀이면 막을 내렸다 너는 누구와 걸어도 사랑에 빠질 날씨라고 했고 나의 공감은 도심 속 발걸음처럼 무뎌지고 있었다 창문 너머 풀 냄새가 가득했다
나는 마신 숨을 내뱉지 않고 다음 장면을 예상한다
맑게 터지기
꿈을 꿨다 몰래 꽃을 들고 가는 사람과 건너편에서 꽃병 들고 기다려주는 사람이 나오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이 선 정원은 넓고 아름다웠다
해충이 곳곳에 침습하고 불청객이 접시를 깨뜨리고 어제의 도굴꾼이 온 땅을 헤집어도
복구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서로가 서로의 종교가 되는 일처럼
그는 종종 해를 삼켜 사랑으로 불태우고 싶다고 말했다
눈이 없어 별을 모르는 벌레에게 나는 햇볕을 덮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거실에 있던 엄마가 잠꼬대처럼 말했다
오래된 연인은 몸이 편찮고 서울 남자는 꿈에서 유부남이라 하대 그래서 떠났고
쓸모없는 감정을 내게 묻지 마라
너는 기한이 만료된 이야기를 찢는다
나는 하나씩 분리된 나를 크로키 한다
바닥에 그림엽서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밑에 머무르던 엽서들이 건너편을 향한다
나는 비 냄새를 맡으며 높은 마음에서 추락하는 상상을 했다
내가 물방울처럼 맑게 터진다면 기꺼이 떨어지고 싶다
심장의 뒤편은 연약한 호기심만 남아
내가 최선을 다할 것은 푹신해지는 마음뿐이다
심폐소생술
교회에 가는 어린이들은 명치가 오른쪽에 자리 잡는다
오른쪽이라면 심폐소생술을 할 때
눌리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왜? 왜? 물음이 방언처럼 터져나온다
캣타워를 세워두니 고양이가 영춘권을 연습한다
고양이과의 특징은 급소를 노리는 것
넌 어쩜 그렇게 자극적이야
나는 캣파워를 들으면서 축제를 준비한다
지난 일기에서 이상한 메모를 발견했다
망한 요리에 리뉴얼을 진행한다
나는 끓는 냄비에 심폐소생술을 했다
안녕하세요 실례 좀 하겠습니다
후추 후추 간장 마늘 통마늘 말고 다진 마늘
왜? 왜? 죽은 존재는 마늘을 무서워한다던데
네가 죽은 걸 살릴 수 있다는 것도 고정관념이야
고정관념을 버려 수학의 정석이 라면받침인 것처럼
선교지의 야쿠트인들이 가뭄 때문에 축제를 준비할 수 없다고 연락해왔다
나는 망한 요리라도 가져다 주었다
제사장이 제단에 내 음식을 던져댔다
이게 그들의 풍습이라고 하지만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냄새긴 했다)
야쿠트 아이들이 나를 둘러싼 채 왜? 왜? 하며 나를 때렸다
정교회도 우리와 비슷한 방언을 하는구나
타격감이 없는 맛
나는 졸지에 캣타워가 됐다
어쩌면 이건 소련의 제노사이드에 대항했던 원주민들의 추모일지도 모른다
가끔 죽을 것 같을 때 눈이 번쩍 뜨여
고양이가 기분 좋다고 오른쪽 명치를 꾹꾹 눌러대서
25번째 사진엔 이해하지 못할 풍습들이
일기장엔 죽었다 살아나는 일주일이 가득하다
최민우
무슨 힘으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막 앞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제 모든 시가 읽히면 좋겠습니다. 반려시 하나 장만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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