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동분향 외 2편

이구광



합동분향


그는 일을 하지 않는데도 회사에 남아서
양복까지 챙겨입고 구두 뒷축에 꽁초를 비빈다

현장체험을 하러 왔던 학생들이 불꺼진 사무실을 돌아다닌다
현장을 안내하던 인턴이 출구를 소개한다
유도등을 따라가면 늦은 시간에도 닫지 않는 문이 있어요

모두 안심한다 학생들은 아직 어려서
어두우면 앞이 보이지 않을 줄 알아서
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대답한다

순찰을 하던 경비원이 불빛에 이끌려
비상구를 밤새도록 들여다본다

복도에는 청소부가 한 명 남아있다
형광등이 깜빡거리는 것을 발견한다

전등을 갈아 끼운 게 어제 같은데
어디가 단단히 잘못됐는지
금방 죽어버린다
자주 어두워진다

신입사원 하나가 그림자에 엎드려 있다
잠결에 자세를 고치다가

문득 책상이 사라졌다는 걸 알아차린다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많이 늦어서
더 늦어질 것 같아서

먼저 퇴근한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오늘은 참 불길해
전에는 좀 나았던 것 같은데

어디서 구두소리가 난다
나가지도 않고 계속 뛰어다닌다
근처에 출구가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어두운 날이다
그가 라이터를 켜자
그림자에 불이 붙는다

연기가 난다

남아있는 것들이
낱낱이 밝혀진다




롱 배케이션


재작년에 죽은 사람이 TV에 나와 기도를 하고 있었다
담배를 한 개비 피우고 왔는데 아직도 상을 받는 중이었다

그렇게 좋으면 매일 하면 될텐데.

예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와인잔에 담긴 물을 와인처럼 마시는 게 연예인
목이 마르면 알아서 챙겨오는 쪽이 관계자

유명해지면 보이는 거에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다는 얘기를
그러니까 음료수나 물을 마실때도 신경을 쓴다는 후일담을
축제는 이제 막 시작했으니까 채널을 고정 하라는 대사를

들은 적 있었다
작년 쯤이었나
채널을 바꿨다
두꺼운 옷을 입은 구경꾼이 소원을 빌거나
별모양 더듬이를 단 아이돌 가수가 춤을 추거나

채널을 바꿨다
요즘은 이런 방송이 유행이구나
작년에는 어땠더라

채널을 바꿨다
보고싶은 게 있었는데
화장실이 비기를 기다리다

조금 지쳐서
잊어버렸다

화장실이 그렇게 좋은 곳이라면
사실 우리도 화장실에 가보고 싶었는데
화장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가 거기에 살고있는 듯했다

써야하니까 빨리 나오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었는데 아무도 없었다

배수구가 건배사를 외쳤다
배수구가 잔을 부딪히고 웃었다
변기 물을 내리자
조용해졌다

좋은 시절은 좋은 사람이 모여 만든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난 다음날에도 만나는 관계를 뭐라고 불렀더라
우리도 작년에는 알고 있었는데

밖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몰랐지만

채널을 바꾸면

예전에 우리 집을 떠난 친구가 TV에 나왔다
두꺼운 잠바를 입고 별모양 야광봉을 흔들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줄로만 알았던 축제가
예쁘게 입고 와인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재작년에 죽은 사람이 나와서 아직까지 상을 받고 있었다
기도를 너무 오래 했기 때문인지 아무도 박수를 쳐주지 않았다




키노


나는 영화를 보다가 깊이 잠들었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있었던 일과
팝콘이 엎질러진 것에 대해
다른 사건에 대해서도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에는 몰랐다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모인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 보고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내 의자를 발로 차면서
영화를 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딱히 일행도 아닌 듯 한데

불이 켜지면
관계가 깊어졌다

관계자들이 영화의 내력에 대해 설명하길

작년에 세상을 떠난 미희 언니가 메가폰을 잡았고
조감독은 치앙마이에 간 뒤로 한참동안 소식이 끊겨있던 남규 형님의 친구인데

이 형이 현지에 카페를 차리면서 알게 된 쥬몬지 나호씨가
또 쥬몬지 나호씨를 따라서 한국까지 찾아온 홍웨이린이
걔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빌어먹을 줄도 모르는 가난뱅이들이
거기에 대가리 숙일 줄을 모르던 재수 없는 89학번들까지 엮여서는

실력이 신통치 않은 감독이 10년간 선운사를 오락가락 하는 동안
벌레 파먹은 낙엽이 계곡이 되었다 감독은 떠오르고 또 가라앉기를 반복했으나

매번 익사만큼은 면했다고
돌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고

걔는 거기까지였던 거야

그대로 죽었으면 더 멋졌을텐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다 봤고
영화에 질린 사람들이
영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시간이 뭐냐면 남들이 소리도 좀 지르고 연애도 하고 그러다 헤어지고 그 사이 파란색 바람막이와 등산화가 완전히 마를 만큼 따뜻하고 물기도 없는 몇날며칠이 오늘도 내일도 자식이 태어나고 자란 뒤에도 이어지는 식의

여유?
그런 거 있잖아
알면서

그렇구나, 그건 힘들었겠네
그런 건 조금 아쉽네
그렇다면 이건 슬픈 영화네

마지막에는 불이 켜지고

모두가 일어나서 기립박수를 쳤다

그 날 전미가 울었다는데
나는 영화에 대해 잘 몰랐고
자느라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구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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