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계절학기 외 2편
성기원
동계 계절학기
독자를 울리는 문장을 쓰려거든
인물이 먼저 울어서는 안 된다고 배웠다
합평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웃었다
교수는 웃지 않았다
모두가 빠져나간 강의실은
누군가 불 꺼주기를 기다리고
복도 끝에 자판기가 빛을 내며 서 있다
빛이 차가운지 따스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차가운 음료와 따뜻한 음료만이 있을 뿐
꼭 준만큼 내놓는 정직한 거래의 달인과
대화는 필요하지 않다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면
잡히는 동전 하나 없고
한 사람이 복도 가운데 서 있다
이리로 오려는지 저리로 가려는지 알 수 없다
실루엣은 숨은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걸음걸이나 목소리 따위 어느 하나 단서를 주지 않는다
그의 주머니에는 뭐가 들었을까
그는 다만 무언가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사이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
복도를 채우고
교수가 출석을 부르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겨울은 주머니가 많아지는 계절
배설의 변辯
―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이라는데 왜 싸고 죽자는 말은 없나
병원 밥이 이래도 되나 싶게 잘 나온다
이게 다 돈이니까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먹는다
탄단지가 고르고 섬유질이 풍부한 식사
다만 단맛이 부족한 게 아쉽다
안경을 어디 뒀나 머리맡을 더듬고 있으니
옆 병상 보호자가 지난밤 코를 골아 미안하다며
예정에 없던 후식을 건넨다
먹기 좋게 꼭지를 뗀 딸기 여섯 알
코 고는 소리는 신경도 안 썼는데
손이 먼저 나가 감사하다며 받아먹는다
이 딸기도 단맛이 아쉽다 멜론이면 더 좋았겠다
슬리퍼와 환자복 가슴팍에는 DH,
대장과 항문을 뜻하는 은밀한 암호가 적혀있다
여기 6인실 병동 어느 침대에도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은 없다
정말 모르는 게 약이다 치루와 치핵의 차이 같은 건
수술 직전까지 경험담을 찾아 읽어보았다
아래, 밑, 뒤 따위로 검색해서는 나오는 게 없었다
항문, 치질, 음모, 관장, 마취, 좌욕이 검색기록을 채웠다
수술 후 배변은 칼을 싸는 고통이라고 했다
뒷간을 해우소라 부르는 승려들의 지혜는
절밥의 식이요법만이 아니라
번뇌를 비우고 수행하는 삶에서부터 나올 테다
머리칼은 아니지만 거추장스러운 털은 밀었다
해우소의 칼춤을 추고 씻김굿을 열자
치질은 전염병이고 그 병원체와 감염원은 조롱이다
이게 내 가설
다시는 농담으로라도 치질환자를 놀리지 않으리
이건 내 업보
우울이 마음의 감기 같은 거라면
치질은 항문의 감기랍니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걸릴 수 있어요
하지만 선생님, 고작 감기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사람도 있어요
고작 감기에도 일반의약품 하나 못 사다먹고 끙끙대는 사람이 있어요
타고난 몸뚱이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나
물려받은 귀한 몸을 이따위로 굴린 건 내 잘못이었나
더럽고 치사한 삶의 함정과 장애물을 요령껏 피해갔어야 했나
달려드는 개새끼한테는 나뭇가지라도 던져주고 도망쳤어야 했나
마주 돌아버려 개처럼 팼어야 했나 물어뜯고 할퀴었어야 했나
가리지 않고 삼킨 것들 씹지도 않고 넘긴 것들, 뒤집어진다
다치지 않으려 한 선택들이 나를 병들게 했다면
씨발,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 새끼도 똑같은 고통을 겪기 바란다
이 꼴을 하고도 쓴 생각을 하면 술이 땡긴다
달디 단 술
마시고 죽자,
무통주사를 만지작거리며
내일의 금주를 다짐하는 사람이 있다
벌어진 사이로
모래가 씹히는 봄이 온다
들켜야 완성되는 거짓말처럼
깨져야 완성되는 약속처럼
보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려 한참을 불앞에 서 있었다
국을 오래 끓인다고 찌개가 되지는 않는데
거짓말과 약속 사이에
비밀이 있었다
비가 오는 줄 모르고 잤다
입을 벌리고 있으면 곰팡이가 필 것 같다
네 입 속에 들어갔던 날도 그랬다
섞인 시간의 하얀 기억
빈속이 편하다
젖은 목련을 보고 있으면 수제비가 먹고 싶구나
목련은 하얘서 좋은 게 아니라
그 하얀색이 금방 더러워져서 좋은 거야
봄이 오기 전에도 비가 오기 전에도
우아하게 서 있는 밤의 나무들을
입을 벌리고 한참 바라봤다
떠나가는지 다가가는지 모를 몸짓으로
모래가 씹히는 봄이 온다
성기원
1996년생, 경기도 의왕시에서 나고 자랐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다. 의왕 빡빡이 라이딩 클럽 및 과기대 민머리 슈게이즈 협회 소속.
E-mail : seonggw@seoultech.ac.krInstagram : @Xiwall_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