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에게 외 2편

김마오



발레리에게


물을 끓여서 따뜻하게 마셨다
추운 날에는 따뜻한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
발레리는 물었다
해가 이미 기울어 가는지?

얼마 남지 않았다
일몰 시간은 5시 24분
어제는 팔공산까지 걸어가고 싶었는데
오늘은 팔공산까지 걸어가고 싶지는 않고
조금은 걸어가고 싶을 수도 있지만 이미 길이 어둡다

우리는 그날 밤 팔공산 대신 고모 집으로 갔다
거실에 앉았다
귤을 까먹었다
고모는 발레리를 처음 봤다
발레리는 내 입 속에 포함되어 있어서
고모는 몰래 흘겨보기만 하고 발레리에 대해 묻지 않았다
고모는 자꾸 나를 먹였다
나는 받아먹었다
크게 웃었는데 그건 내 입 속에서 발레리가
웃고 있었기 때문에

자꾸 배가 불러서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
자꾸 배가 고파서
자꾸 배가 고프니까

입 안에 있는 발레리
해가 지니 춥다 다시 주전자를 불에 올리고
바람이 불면 옷을 여미고

준 음식을 받아먹으면 그 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지요.

다음 날 아침 일어나니 발레리의 눈썹이 희게 세어있었고
한 해가 다 간 것을 알았다
표정이 조금 달라보였다

집 안 행사를 앞두고 일하지 않는 사람의 눈썹은 희게 세지요.
눈썹 털은 매일 조금씩 희어지고
매일 조금씩 자라고
입 안에 있는 발레리
오늘은
빚진 것을 전부 갚기로 해요




카운터에서


스트로베리처럼 어리버리
가짜 꽃들
만지면 폭신폭신
과즙 머금은 것처럼
화단에 찔레꽃 새는 것처럼

안쪽에 서 있는 사람의

기다리는 게 일이야
앞면과 뒷면을 팔딱팔딱 뒤집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지
말도 참 예쁘게 하지
안녕 잘 가요

꽃잎을 운동화 밑창에 끼우고
과즙 내기 스퀴지
즙이 멎을 때까지 문지르지

열린 문으로 고양이가 들어오면
선별된 꽃과 과육 내놓자

아무리 귀엽게 뛰어도 입장하지 않으면
안쪽에 서 있는 사람은 모른다
유리문이 열려 있어도 가까이 들어오지 않으면




인공바위


바위는 자신을 창조한 사람이 앞을 지나갈 때만 폭포를 흘린다
병든 하얀 개들이 안간힘을 다해 사방으로 펄쩍 뛰어오른다 콸콸콸 병든 동물은 멈출 권리가 없고 멈추지 않는 개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게 요즘 이야기다 사람이 바위에서 쏟아지고 하이파이브를 하고 흩어지고 하이파이브를 하지 않는 사람은 다시 확인해보면 살아있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다
엄마?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다 마주치는 사람들은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손바닥이 닿지 않은 채로요.)

저녁잠에서 깨어난 67세 김모씨는 울기 시작했다 창밖에 폭포가 쏟아지는 소리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김모씨는 오늘 오전 병원에 방문했다
의사에게 증세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정말이지 목소리가
야 나 너 좋아해
터져나왔다 소리를 지르는 김모씨의 입 안으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바깥의 소음은 멎었다
김모씨도 그만 침대에서 일어나 차분해진 마음으로 등산화를 신었다

폭포로 가는 길 양 옆에는 저렴한 정원석이 깔려있다 잘 닦인 길이다
십 대 아이들 여섯 명이 화목한 분위기로 김모씨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전부 같은 반이었다 흰 개도 있었다 콸콸 멀어졌다 소리는 멀어질수록 제곱의 횟수로 반복되었다

김모씨의 눈앞에 바위가 등장했다 방금 지나간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제대로 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배가 살짝 아팠다
폭포는 쏟아지지 않았고
조용한 바위 앞에서 김모씨는 박수를 쳤다





김마오
안녕 또 만나! 나 까먹지 마
maomun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