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에너지 외 2편

이향기



위치에너지


위치에너지

붉은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사람
깨물면 사과 맛이 난다

감은 눈 위
동그란 이마에서 돌아가는 영사기
한밤중에 관자놀이를 통과하는 기차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아서
너는 속기사를 고용하고 싶었다

나는 그때부터 누가 꿈을 물으면
스크린
대답하기로 한다
오늘 밤에는 무슨 꿈을 꿀 거야?
도시의 모든 사다리에
네가 일제히 기어오르고 있다

꼬리를 자르고 사라지는 도마뱀들
남겨진 꼬리의 붉은 단면을 들여다봐도
알 수 있는 건 없었는데
그것들을 모아서 찰흙처럼 뭉치면
어쩌면 씨앗이 될 수도 있다고
너는 내게 알려주었다

너의 온몸에는
무수한 터널이 지나고 있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발자국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너는 그럴 수 있다
내게 상처 줄 수도 있으니까




누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약봉지를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저녁만 남았기 때문에
아스팔트에 바스러져 놓인
점심에 대해 생각한다

투명한 비닐 안에 가루가 날린다
코가 시린 약품 냄새
방부 처리를 한 것이다
왜 재앙을 아름답다 여기게 진화했는지
스노우볼 속 풍경 같은

비싼 유리를 쓰면 균열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가끔 볼 수 있어 다행이었고
자주 슬펐다

균열은 어둠속에서 더 선명하다
네 감은 눈꺼풀 밑에서 굴러가는 눈동자
어떤 흔들리는 풍경을 담고 왔을까
덜컹이며 어디까지 가고 있을까

미안해

너는 내 옆에 누워 있다

눈 속에 묻혀 있는 무수한 천사들
눈은 파묻히기 좋아 위험하다
차창으로 한강에 떠 있는 네 눈동자가 보일 때
곧 가라앉을 것 같아 불안한 것처럼

추워

어디선가 눈이 새고 있는 게 분명하다
모르는 새에 쉽게 젖는 것 알지
네 뺨을 만져보고서야
눈을 감는 저녁이 있었고




잔상


한밤중 장노출 카메라에 찍히는 붉은 빛의 궤적
무수한 교차점
매달린 십자가는 케이크 위의 토퍼
십자가는 가장 낮은 곳에 눕혀진다
예를 들어 아스팔트 위
살아있는 것처럼 들썩인다

한강변을 지나며 숨을 멈추는 건
안도감 때문이다

저 모든 가로등이 동시에 교체되지는 않는다는 약속

교차되는 순간
빛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밖이 캄캄할 때 가장 밝은 너의 내부
너는 보통 창밖을 보고 있으므로

가끔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가지 못하게 만든 긴 의자에 앉아
다른 책을 폈을 것이다

너의 묵음을 상상......

허밍





이향기
시를 쓰는 사람이다. 쉽게 읽혀버리는 시를 많이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