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외 2편
노서정
이력서
주제 파악을 못한 사람입니다.
환생
꿈에 내가 나왔다며 찾아왔을 때
나는 네가 준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전거 스웨터 양말 책을
네가 사준 가방에 넣고 멀리 가려고
그럴 수 있지, 너는 자주 말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내 손목을 잡은 너의 손을 오래 보았더니 꼭 가짜 같았다
너는 질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고
작별의 인사를 건네려다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너는 다시 시작해보자고 말했는데
그 말에 죽도록 화가 나
이건 꿈이니까 너를 한 대만 치고 싶었다 딱 한 대만
너의 대답까지 가방에 넣고서
문을 나섰다
일어나보니 밖이었다
사람들이 잔뜩 움츠린 채로 지나쳐가고
모든 것이 선명한 날씨였다
여기에서 저기까지의 거리를
가보지 않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흑심
이 짓도 이제 그만해야겠다.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인의 글을 읽었다. 그냥 쓴다는 글이었다. 글인데 시 같았다. 시도 그 안에 있었다. 그 시는 글 같았다. 그리고 무언가 이어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가 쓰다만 글을 내가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주문했다. 살아야한다고 말했다. 왜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허망하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허망하다는 말은 일종의 고백인 셈이다. 왜 그가 허망하다는 말을 비밀처럼 말해야 했을까. 무언가를 계속 써나가는 사람은 허망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아니면 허망한 사람은 고백을 하지 않아서? 모를 일이다. 모른다는 것은 가능성이다. 모른다는 것을 제외한 모든 가능성이다. 내 눈꺼풀이 닫히고 다시 열리는 동안 발생하는 모든 무책임한 가능성이다. 버려지지 않았다면 말해야 한다. 버려졌다면 말해야 한다. 때로는 허망하다는 말도 질문이 될 수 있다. 그것은 그가 허망하다는 말을 내뱉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무언가 이어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쓰다만 글을 내가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한다. 다시 질문을 해야 한다. 이 질문의 운동 방식은 회전에 가깝다. 회전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그 힘은 일종의 장을 만들어낸다.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는 시를 망치고 있다고 말했다. 더이상 걷잡을 수 없이 망치고 있다고 했다. 그것도 가장 시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시를 망친 것은 그가 아니라 시다. 그 장이 닫혔다가 열리는 동안 발생하는 모든 무책임한 가능성이다. 허망한 사람은 고백을 하지 않는다. 허망하다는 말은 망쳤다는 뜻이다. 망쳤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뜻이다. 말한 뒤에도 허망하다는 뜻이다. 다시 고백한다는 뜻이다. 허망한 사람은 허망하다고 말하면서 허망함에 구멍을 낸다. 그 틈으로 나는 허망하다는 말을 듣게 된다. 나는 그 말을 듣기 위해 허망해졌다. 그리고 허망하다고 말을 할 준비를 한다. 그는 살아야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노서정
마라탕을 먹고 농구를 하고 회사에 다닙니다. 장혜영 의원을 후원합시다. @Killinusoft
